교사는 자신의 교실에 천재 한 명보다는 바보 멍청이 여러 명이 들어오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가 옳을 수도 있다. 교사의 임무는 탁월한 인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는 성실한 보통 사람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은 지금도 마음이 아리고 답답하다. 등장인물 한스를 통해 잊고 지냈던 30여년 전 고등학교시절의 나의 고통이 떠올랐다.
한스와 비슷한 시골마을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나는 진학하였다.기숙사와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매일 도시락 두 개를 손수 싸는 자취생활을 했다. 시골 중학교의 10배가 넘는 전교생이 3천명이나 되는 큰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0교시가 있던 시절이라서 7시20분까지 등교를 했고,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매달 월례 고사가 치러졌고, 학년별 150여명의 성적은 학교 복도에 부착했다. 학생은 자연스럽게 내신 성적순으로 서열화되었다.
그 때 수학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이 난 아직도 생생하다. " 너희들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그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간다." 숨막혔다. 한스와 하일너의 우정을 방해했던 교사들처럼 , 그 시절 교사들은 나의 친구들을 우정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서 이겨야할 경쟁자로 각인시켰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의 교실 풍경이 그 때와 달라진 것이 있을까? 달라진 것이라면 개인정보보호차원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노골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에 불과할 것이다. 상대평가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내신성적은 대학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과시하는 상황이다. 2022년 교실에서도 친구들은 우정을 쌓을 대상이라기보다는 경쟁자이다. 청소년 자살율은 OECD국가 중에서 몇 년째 1위지만,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위로하기보다는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극복해야만 한다고 채찍질만 한다.
이 책이 출판된지 116년이 지난 지금. 독일은 그 때와 많이 달라졌지만, 대한민국을 아직도 그대로이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독일은 학문 탐구에 뜻이 있는 30%만 대학진학을 하지만, 대한민국은 대학을 취업의 도구로 인식하고 90%가 진학을 하고 있다. 독일은 90%가 공립대학으로 이들 간 대학서열화는 전혀 없고 지리적으로 주거지와 가까운 대학을 진학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은 대학서열화가 너무나 극명하고 모두가 IN 서울을 꿈꾸고 있다. 왜 대한민국은 116년이 지났는데도 한스가 살던 그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는가? 가슴이 답답하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있을까? 신이 와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해결될 수 없다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한스처럼 병들어 가고 있다. 하루 하루 힘겹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위로를 보낸다.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너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 보라. 그 목소리가 부르는 곳으로 가서, 네 열정을 쏟아부어라. 기성세대의 기대에 네 행복을 양보하지 말라.
기성세대들이여 반성하라. 왜 그네들이 다녔던 그 시절과 지금의 교육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대들이 기득권을 조금만 내려 대학서열화에 균열을 일으켜 다오. 그러면 대한민국은 조금씩 바뀔 것이다. 그대가 힘들었는 거 안다. 그렇다고 그대의 자식까지도 그 용광로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가? 그대들이 기득권을 내린만큼, 그대 자식들의 행복감은 올라갈 것이다.
데미안을 재밌게 읽어서 그런지 <수레바퀴 아래서>도 정말 취향에 맞았다.
헤르만 헤세의 글에는 화려한 기교가 없는,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깊이가 있다.
신학교에 진학하는 한스의 이야기가 나중에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걸 뒤늦게 작가의 소개글을 보고 알게 되었다. 한스가 느꼈던 고뇌와 고통을 헤르만 헤세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는 독서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