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이르는 길
<데미안>을 읽고
마침내 나도 데미안을 만났다. 불현듯 '영접(靈接)했다'고 고쳐 쓰고 싶어진다. 소설에서 싱클레어와 별개의 인물로 등장하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보여지는 데미안의 심리와 언행에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특히 '카인과 아벨',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등 종교적 의미가 담긴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싱클레어를 송두리째 흔들어 깨운 그를 보면서 어쩌면 싱클레어 안의 또 다른 자아 혹은 영적 존재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을 읽은 사람들의 공통된 소감은 어느 시기에, 또 어떤 감정상태일 때 읽느냐에 따라 그 감상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첫 손에 꼽는 책이지만 좀처럼 읽을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책과 서평에서 헤세가 쓴 유명한 문장들을 만나본 터라 안 읽었지만 읽은 척 했음을 고백한다. 마흔을 앞두고, 마흔을 넘긴 두 북클러버가 3월의 봄날을 맞아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듯 싱클레어가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그가 사는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27~128쪽)
너무도 유명한 문장이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소년에서 청소년을 지나 청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열 살 무렵에 선과 악, 빛과 어둠, 따스함과 차가움 등 대립하면서도 양립하는 가치들과, 그것들이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세계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악마와 같은 동네 아는 형님 크로머가 한 축을 담당한다. 어느날 '허름한 허세'를 부리며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한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덫에 걸려 진짜로 저금통에 손을 댐으로써 생애 첫 도둑질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과 세상 사이에 펼쳐진 모래판에서 온갖 시련들과 씨름하게 된다.
계속되는 고독과 절망에 좌절하지만 다시 일어나면서 자기가 갖힌 알의 껍데기, 즉 미지의 세계를 향한 벽을 깨부수기 위해 분투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알껍데기를 깨기에는 역부족일지 모르나, 그에게는 '줄탁동시(?啄同時)'에 나오는 어미 닭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데미안이다. 싱클레어의 멘토이자 조력자로서 가리워진 길 위의 이정표로 서서 기다리고, 익숙한 길의 왼쪽에서 방향감을 잃었을 때는 손 위에 지남철이 되어준다. 그 길 위에서 교차하고 교감한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깨달음이 담긴, 이전까지 내가 설익게 접했던 문장들을 옮겨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내게 되면, 그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자신,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이 그것으로 이끈 것이다.(135~136쪽)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 법이오.(156쪽)
각성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다지고 결국 어디에 이르든지 간에 자신만의 길을 계속 앞으로 더듬어 가나는 것, 그 한 가지 말고 다른 의무는 결코, 결코, 결코 없었다.(174쪽)
소설과 떼어 놓고 보아도 잠언과 같이 잔잔한 울림을 주는데, 이 문장들을 다시 들여다보면 책을 관통하는 주제에 대한 변주임을 알게 된다. 헤르만 헤세가 책머리에서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8쪽)"라고 밝혔다시피 무수히 많은 삶 가운데 그가 한평생 걸어갔던 길, 그 위에서 경험하고 사색하면서 발견한 깨달음을 독자와 나누고자 한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소설 말미에 헤세는 지적한다. 개인의 자아성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동체로 확장시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그는 데미안의 입을 빌어 개인과 개인이 모인 사회인 '공동체'에 대해서도 같은 뜻을 견지한다. 당시의 (어쩌면 오늘날도) 공동체는 '개인의 두려움과 무지'로 인해 부자들끼리, 노동자들끼리, 지식인들끼리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무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가장 극단적이고 무서운 결과물이 '전쟁'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한 인간을 죽이는 데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면서도, 신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몰라. 한 시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조차 몰라.(187쪽)
어떠한 이유로든 폭력은 인정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마다 자국의 이념과 이권 때문에 전쟁을 불사해왔음을 인류의 오랜 역사가 말해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목도한 헤세였기에 전쟁에 참여한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장면을 통해 반전(反戰) 의식은 물론, 나아가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전쟁이 계속 되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문득 그들의 손에 총 대신 <데미안>이 쥐어져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이제서야 데미안을 (다른 출판사의 책을 각각 읽어서 두 번 만났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가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다음 번에는 동행인과 함께 만날 것 같은데, 그때의 나 그리고 아이에게 데미안은 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직 <데미안>을 읽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터놓은 책길을 따라 걸으며 삶을 대하는 여러 갈래의 마음가짐을 챙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까지 아마 4권쯤의 데미안을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이용 문고본 포함으로 말이다.
그 중 이 번 책이 가장 맘에들었던 판본이다.
기실 나는 같은 책을 2번 이상을 잘 보지 않는 성격인데 어찌 데미안 만큼은 어찌어찌 4번이나 보게 되었다. 광적으로 좋아할 만한 내용도 아닌데 어찌 이리 읽었는지 나 스스로도 아리송할 지경.
이번에 데미안을 4번째로 읽으면서 은근 많은 생각을 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데미안에 나오는 각종 인물들에 상징이 어쩌구 아브락삭스가 어쩌구 알을 깨는 것이 어쩌구 뭐 이런 역자 후기에 나오는 말 따위를 줍줍하여 마치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양 어줍잔을 잘난 척으로 감상평을 도배했을 것이다.
근데 말이다 같은 책을 4번을 읽고 나니 이런 것들이 모두 너무나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이라고 해야 하나.
감상은 짧고 담백해 졌으며, 나의 내면의 내스스로에 대한 심상이 깊어진 격이라고나 할까.
심상이라는 단어를 쓰고 나니 더욱 오글거리고 남부끄럽긴 하지만 저보다 더욱 적절한 단어를 찾을수가 없으니 원....
여튼은 같은 책을 여러번 읽는 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된 격이라고나 할까.
어떤 책을 읽고 그것을 꼭꼭씹어 어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자신의 몫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 왔다고 하겠다.
여기서 중한 것이 있는데 같은 책을 여러번 보더라도 되도록 이면 현대판으로 촌시럽지 않은 문장으로 씌여진 가급적 최신판을 읽는 것이 좋을거 같다는 깨달음 또한 얻었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면 당연히 어떤 문장이 자연스레 마음에 숙숙 들어 오는 경우가 생기는데 국일미디어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이는 '임자' 였나 뭐 이런 아주 옛스러워 당혹 스러울 지경의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마음에 아로새기는 건 좀 스타일이 안사는 일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국일미디어 판의 명조체를 가장한 궁서체가 돋보이는 잃어 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좀 처분을 하고 바꿔서 새로 읽어봐야 할거 같단 생각을 했다.
이번 달 북클러버 도서를 데미안으로 선정했다.
친구가 조심스럽게 추천한 고전소설이기 때문이었다.
몇년 전에 읽은 헤르만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에서'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특:'재미있었다'라는 기분만 남아있고 내용이 정말로 기억이 한.개도 안남)
출판사/번역가에 따라 많은 버전이 있는 책이라서 내가 선정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리디셀렉트에 있어야 할것 ···
번역이슈가 없어야 할것 ··· 리디셀렉트에서 리뷰를 보고 선정
주인공, 등장인물의 외관 설정이 없어야 할것 ··· 모 출판사의 모 그림작가님이 참여한 표지, 예뻤지만 특정 집단의 니즈를 노린것 같아서 피했다.
이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
싱클레어의 비대하고도 얄팍하고도 흡수력이높은 ... 마치 B2 사이즈 습자지같은 자아를 데미안이라는 폭풍한가운데서 지키기위한 여정 ...
이라고 할수 있겠다
시작부터 주인공은 생각이 많은 친구로 등장한다.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의 독백 위주였는데 조금 괴로웠다...
왜냐하면 그는 사춘기를 쎄게 겪고 있는 소년이었고, 그의 실수가 나비효과처럼 불어나 자신의 세계를 얼마나 망가뜨리는지를 봐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주인공을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단계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소개팅에서 상대의 떨어진 비밀일기를 읽어본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너무 딥해서 당황스러웠다
싱클레어(주인공)가 내가 이 책을 읽은 사실을 알면 과연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해줄까? 하는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나를 향해 부르짖고, 매도하고, 절교할것 같았다
그만큼 이 책은 사춘기 시절의 현실적인 고민을 너무 잘 녹여내서 괴로웠다.
싱클레어, 그의 B2습자지 자아를 생각해 본다면,
1. 너무 휘둘린다. 시작부터 데미안이라는 인물의 한마디 한마디에 정신없이 휘둘린다. 휘둘린다못해 내면은 폭풍우가 치고 벼락이 내리고 난리가 나는 지경이다. 아무튼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태평소치고 전부 다 한다. 그만큼 성장도 비약적이지만, 그 과정이 정말이지 시끄럽다 ···
보는 내내 내가 이걸 읽어도 되는건가 고민했다 ... 싱클레어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이쯤에서 일기장을 덮어줘야하는게 아닐까? 여어, 싱클레어. 너 이거 떨어트렸더라. 아니, 내용은 안 봤어. 그런데 너 데미안이랑 아는사이더라, 이렇게 말했다가 그만 뺨맞고 쫓겨날것 같음
여튼, 싱클레어는 자아가 있는건지 없는건지, 있으니까 휘둘리겠죠? 아무튼 데미안에게 엄청! 큰! 영향을 받는다. 근데 그 상황도 이해가 간다. 사람이 살면서, 유년시절에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한두명쯤은 있지 않은가 ···나도 나름 내 유년시절을 생각하면서 공감하는 면도 있었다.··· 나같은 경우에도 또래 친구였는데··· 아무래도 그 나이때에는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단단한 친구들에게 굉장히 놀라게 되는건 어쩔수 없는것 같다.
물론, 데미안이라는 인물이 정말이지 말그대로 '폭풍'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단단하고 완벽했고 유연할줄 아는 그야말로 완벽한 인물 ···그런데 다정함도 갖고있고 배려심도 있으며 후에는 사명감까지 갖고있는 ··· 보는내내 웬지 단명할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나같애도 이녀석의 주변에 있었다면 내 세계 전체가 놀라버렸을거다··· 하지만 나는 싱클레어처럼 습자지처럼 물들기전에 황급히 도망쳤을 것 같다··· 분명 호감가고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기에 너무 위험함을 풍기는(ㅠㅠㅋㅋ) 아~ 웬지 요즘에 웹소설로 이런 인물이 나왔으면 백만팬덤을 이끌기에 충분한 그런 녀석이었다.
싱클레어가 그를 만난게 처음에는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자아가 휘둘리다못해 없어진것 같았다··· 뭘 할때마다 데미안을 떠올리고, 데미안에게 보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가 급기야는 그림을 그려버리고, 사랑을 했다··· 우리가만나···
이렇게까지 휘둘릴거면 그냥 만남 자체가 잘못된거 아냐? 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으나, 한편으로 이런 얄팍한 자아를 가진 인물이 데미안이라는 완벽한 인물을 어린시절 일찍 만났기에 이정도로 그칠수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엄청나게··· 비대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싱클레어 이녀석은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내가 봤을때 생각이 많은 사람치고는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그렇게 없을 것 같은데··· (자기소개임) 싱클레어는 주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묻고, 알아보려고하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다듬는다. 이게 독학이 가능한건지 모르겠다. 나는 외부에서 자극을 받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게 더 좋은데 이녀석은 외부의 자극에 강한건지 약한건지, 좀 선택적인것 같기도 하고··· 만취학도일때는 그냥 갈대같은 자아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형인 소녀 한번 봤다고 갑자기 똑바로 서는 갈대가 되어버려서 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정말이지 생각이 많다 못해 그 소녀에게 이름하나 묻지 않고 급기야는 자기가 혼자서 멋대로 지어버리기에 이른다··· 첫눈에 반하고 너무 사랑한나머지 가면 안될길마저 가버리고만다···(그림을 그리게된다 ㅋㅋ) 열심히 독학해서 소녀를 그리는데 성공했지만 알고보니 그는 기억속의 데미안을 그렸다는 그 전개가 너무 당황스럽고, 데미안이 알면 안될것 같고, 내가 나서서 이 비밀을 지켜줘야만 할것 같고, 해명해줘야할것 같은 기분에 나도모르게 읽는 내내 싱클레어를 변호했다···
아 애가 좀 어리잖냐, 어리면 그럴수도 있지, 데미안이 얼마나 영향을 크게 끼쳤어, 애가 폭풍같은 녀석이잖아, 이녀석이 사랑이란걸 처음 느껴서 그래, 아니면 그 소녀가 엄청 미소녀였나봄, 애가 숫기가 없어가지고 말도 못걸고 그림으로 승화를 하네··· 이런 등등.
여튼··· 어느 순간순간에는 책속으로 들어가 싱클레어 멱살을 붙잡고 말리고 싶은 심경도 있었다.
싱클레어··· 분명 초반에는 부잣집 경건한 기독교 집안의 유약미소년같은 이미지였는데
중반을 갈수록 불량학생 질풍노도 사춘기 방탕 병약 수염 소년 (미소년 아님.)이 되고
후반부에는 이제 조금 어른이 되어 주관도 생기고 단단해졌지만 여전히 어린애같은 ···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의외였던 점···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해버림. 근데 이것도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건 아니었다··· 그의 내면을 끊임없이 서술했기 때문에 이제는 심정적으로 싱클레어 편이 되어가지고, 야 , 그래, 사랑할수 있지, 부인이라고 뭐, 아들이 있다고 뭐, 사랑을 하면 안되냐?! 어차피 넌 고백할 용기도 없잖아?! 혼자 사랑할거지?! 혼자 사랑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그리워하고 너 맨날 잘하는거 그거 그냥 대상이 바뀐거뿐이지?! 하면서···.
두번째로는 싱클레어가 전쟁에 얌전히(?)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이미지는 웬지 전쟁 터지면 싱클레어도 참지못하고 터져버릴듯 ···이녀석 이 모든 외부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듯··· 싶었는데, 의외로 전쟁터지기 전에 데미안을 만나 다시 정서적 교류를 하면서 영향을 받아버린 것 같았다. 데미안이 기꺼이 입영 지원을 했다는 걸 알게 된게 결정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싱클레어도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걸지도··· 내가 너무 이녀석을 어리게만 보는걸까 사람은 성장을하고 변화하는데도. 싱클레어 이녀석은 종잡을수가없고 물가에내놓은아이같구나. 어디옆집의 데미안같이좀 똑바로살아봐라알아서
어쨌든 얼핏 보면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데미안을 생각하고 편지하고 그리면서··· 마치 그를 사랑하는것 같아 보이고 마지막에는 그만 키스까지 하고말지만? (아무래도, 상상이었겠죠) 결국 싱클레어는 본인 자신을 너무너무 사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생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얄팍한 자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덧붙이고 단련하고 보수하는···. 그런 일대기를 본것만 같았다 데미안은 그냥··· 자신의 인생의 기준같은 느낌이긴 했다. 자신을 채워줄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다닌 느낌이었다, 그런 사람이 없을 시기에는 그냥 고독을 씹고맛보고뜯고즐기며 살았으니···
또, 내가 이북으로 이 책을 읽으며 표시해둔 구절을 소개한다.
사랑은 천사의 영상이며 악마였고, 남자인 동시에 여자였고, 인간인 동시에 동물이었고, 최고의 선인 동시에 극단적인 악이었다.
-데미안
이게 정말로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의 고찰인건지 ··· 싱클레어가 생각을 끊임없이 하다못해 어떠한 경지에 도달한것만 같은 구절이었다. 사랑이라는건 너무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말도안되는 그 성질하나로 인류를 이끌어온 인류의 필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싱클레어가 내린 결론이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 법이오.
- 데미안
···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마치 그거같다.
아는 맛이기에 더 무섭고 유혹적인 ···
이거아닌가요?
다만 한 시간이라도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는게 나았다.
- 데미안
너무 극단적이고 웃겨서 기록해둠, 싱클레어는 정말 극단적이고 웃긴녀석임. 근데 그걸 자신이 얼만큼 아는지 궁금하다···
나는 자연이 던진 주사위였다. 불확실성을 향해, 어쩌면 새로움을 향해, 어쩌면 무(無)를 향해 던진 주사위. 태고의 깊이에서 던진 이 주사위를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고 완전히 나의 의지로 만드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나의 소명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데미안
중~후반부에 나오는 독백. 이걸 이제야 안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너 계속 그러고 살아와놓고 몰랐단말이야···! 하긴, 이게 생각으로 정리되기까지는 성숙한 자아와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 구절 자체가 좀 데미안이라는 책을 관통한다고 생각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까?
결론적으로 나는 싱클레어에게 꽤나 많은 것을 일방적으로 공유당한 상황에서 내적 친밀감이 상승했고, 만나면 인사할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한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서 비로소 독립, 혹은 하나가 되어 벗어난것같아서 감명깊었다. 이제 이녀석을 보내줄 수 있어, 이녀석은 이제 혼자 살아도 자살하지않을것만같아··· 한다고 해도 휘둘린게 아니고 뚜렷한 주관으로 했겠지··· 하면서 안도감이 들었음···;
그가 전쟁에서 살아남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기질이 그래먹어서 쉽게 바꾸진 못하겠지만 내면에 대한 고찰은 이제 좀 덜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산책도 좀 하고 남을 배려하며,뭐 그런 인생을 사는걸 ··· 굳이 보고싶지는 않고 그렇게 살았길 바란다···
나의 내면을 고찰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이 들지만, 좀더 어렸을때 봤으면 매우 놀라고 큰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 책이었다. 나 또한 지금도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자신에 대한 고찰은 현대에와서는, 이미 남들이 다 해준것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것도 있고(MBTI ··· 농담임) 자신의 호불호, 맞는 스타일, 감명받는 포인트, 여러가지 이슈에 대한 윤리의식, 올바름의 척도 정도만 명확하면 이러나 저러나 문제없이 똑바로 살아갈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해서··· (적고보니 너무 많긴 하다,) 여튼 조금 부족했을지라도 남은 부분을 싱클레어가 전부 대신 고찰해준 기분도 들어서 묘하게 후련한것도 있었다.
역자 해설 등을 보면서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일생을 짤막하게 기록한걸 보니, 헤르만 헤세가 심적으로 많이 고통받고 힘들었을 시기라는 것이 이해가 갔다 ···그는 실제로도 정신 치료를 받기도 했고 놀랍게도 이 책은 치료 후에 쓰여진 책이었다. 싱클레어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 분명히 이 작가도 이정도의 생각을 하고 쓰여진 자전적 소설이겠거니 하는 느낌이 올수밖에 없긴 했는데···
헤르만 헤세 씨도 행복하셨길 바랍니다.
매우 늦었지만 노벨 문학상 축하드립니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겪었던 일보다 '겪지 않은 일', '왠지 잘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욱 강하다. 분명히 현재의 '나'는 달라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지'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저 '머릿속'에서만 바쁜 날- 예전에는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떨쳐냈었지?
아... 그 책이 있었다. 국문으로도 모자라 영어판으로도 더듬더듬 읽어낸 후, 마음속에 '구절' 하나를 품게 만들었던 그 책-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집어 들었다.
1877년생, 신학시험을 준비를 위해 브론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쳐나왔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한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1904년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해졌다. 1906년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 1919년 <데미안>과 <동화><차라투스트루라의 귀환>을 출간했다.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8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을 써냈다.
주인공은 10살의 '에밀 싱클레어' 그는 부유한 집, 다정한 부모님과 누이등 밝은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집의 하녀들, 불량한 친구들 등이 만들어내는 어두운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프란츠 크로머의 동료무리에 섞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되고, 그 거짓말로 크로머에게 휘둘리는 상태가 된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그의 협박을 들어주던 그때, '데미안'이라는 친구가 전학을 온다.
아이같지 않은 눈빛,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분명한 그는 싱클레어의 어려움을 꿰뚫어 본다
나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구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찾아왔다. 그 구원과 더불어 내 삶에 새로운 것이 등장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도 줄곳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처음 데미안을 읽었던 때가 중학생이었던 것 같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작은 갈등에, 작은 상처에도 이리저리 비틀대던 시절- 거기에 어설프게 세상을 알고 그 세상이 버거웠던 시절이었다. 싱클레어라는 '초등학생'이 당한 일은 머릿속에서 잊혀졌고,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은 '막스 데미안'이라는 매력적인 소년이었다. '우월하고 냉정하며, 자신감이 있는 어른같은 눈빛'을 띈 소년- 여기에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소년- 그는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을 건냈다.
나는 너를 좋아해. 아니면 너한테 관심이 많아서 네 마음을 속이 어떤지 알아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나는 벌써 첫걸음을 내디뎠어. 너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거든. 그러니까 너는 뭔가에 잘 놀라곤 해. 그렇다면 네가 무서워하는 일들이나 사람들이 있다는 거지. 왜 그럴까? 사람들을 무서워해서는 안 되는 법이거든.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지. 예를 들어 나쁜 짓을 저지렀는데,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가 있어. 그러면 그가 너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거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아주 명확해, 그렇지?
데미안은, 자신의 일을 말하기 두려워하는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도 그 녀석을 두려워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잘 알지, 그렇지? 그런 두려움은 우리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어. 그런 두려움은 떨쳐버려야해.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떨쳐 버려야 한다고. 내 말 알아들었어?
어느 순간 사라진 크로머의 협박,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자신을 도와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어두운 과거또한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를 잊어버린다. 아니, '성경'의 해석과 다른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하는 그도 왠지 '밝지 않은 세계' '유혹'일 것 같다는 의심에 그를 멀리하게 된다. 그렇게 상급학교로 진학을 한 후 싱클레어는 '술'에 빠지고 마는데...
다시금 빠져버린 또다른 세계- 또다시 그를 끌어올린 것은 '찰나의 감정'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한번 성장하고,
잊었던 데미안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메시지를 받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들어봤음직한 구절...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도무지 채용이 안되던 시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뿌리고 다니던 그때, 포트폴리오 맨앞을 시작했던 구절이기도 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가능성을 가진 자'이며, 그를 위해 '힘겹게 싸워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까?
십여년만에 다시 읽은 책은, 여전히 매력적인 '데미안'을 지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미 현재의 내 삶은 나이를 100살 더 먹는다고 해도 '데미안'같은 삶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슨 신과 같은 그의 모습보다 끊임없이 타락에 빠지고, 그 속에서도 답을 찾아내려고 '스스로'노력하는 에밀 싱클레어가 더 '인간적'이며 '나와 가까운 모습'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한 남자의 '스스로 자아찾기'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 '스스로'속에는 그에게 영향을 미친 '데미안'뿐 아니라 '피스토리우스' '베아트리체' '에바부인' 마지막으로 '크로머'까지도 포함된다. 그들의 역할이 적지 않지만 '스스로'라고 지칭한 이유는 결국 '싱클레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그들의 영향력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멘토가 누구든, 괴롭히는 자가 누구든 자신이 '따라가지'않으면 혹은 '경멸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데미안은 가장 멋진 '캐릭터'일 수 있고 에밀 싱클레어가 바라는 '롤모델'일 수 있지만, 전적으로 모든 판단과 몫은 '에밀 싱클레어'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러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소명밖에는 없다
나는 자연이 던진 주사위였다. 불확실성을 향해, 새로움을 향해, 어쩌면 무를 향해 던진 주사위,태고의 깊이에서 던진 주사위를 작용하게 하고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고 완전히 나의 의지로 만드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나의 소명이었다.오로지 그것만이!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작품이라는데 심각하게 거기까지 파낼 생각은 없고, 단지 자아(현실), 초자아(현실보다 이상적인것을 추구), 이드(본능, 쾌락) 같은 내 안의 '많은 나'들이 나에게 길을 인도하는 듯한 여정이이며,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추구하는 '초자아'인 것이려나..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몇개 더 적어둔다.
너한테 듣기 거북한 말을 할 생각은 없었어. 게다가 우리 두사람은 네가 어떤 목적으로 그 포도주 잔을 들이키는지 알지 못해. 네 안에 있는 것, 네 삶을 이루는 것은 그걸 알고 있겠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하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아. 미안해. 난 그만 집에 가봐야 해
그 무렵 나는 피난처를 찾아냈다. 흔히 말하듯 <우연히> 찾아냈다. 하지만 그런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내게 되면, 그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자신, 그자신의 갈망과 필연이 그것으로 이끈 것이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다지고 결국 어디에 이르든지 간에 자신만의 길을 계속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그 한가지 말고다른 위무는 결코, 결코, 결코 없었다. 이러한 인식이 나를 깊이 뒤흔들었고, 그것은 내가 그 체험에서 얻은 결실이었다.
가능성을 가득 품은 꿈은 사라지고, 이제는 '현실'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혹 이제 없을지도 모를 '가능성'의 끝자락을 쥐고 있던 나는 , 싱클레어를 뛰어넘어 이제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써낸 헤르만헤세의 삶까지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은 헤르만 헤세가 마흔이 넘은 시절, 아내의 병환, 아버지의 죽음, 자녀의 아픔까지 다양한 가족의 비극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기'위해서 쓴 책이라고 한다. 정신적으로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정신상담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다시금 '책'을 써낸다. 그러나, 이 책을 40살이 넘는 기존 작가가 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 주인공의 이름 '에밀 싱클레어'로 책을 발간했고,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그때 많은 청년들에게 '의지'와 '희망'을 선사한다. (이 책으로 신인상을 수상한 그는, 이후 자신의 작품임을 다시 밝혔고 2쇄부터는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99쇄 까지...) 대단한 거장에게도 '의기소침'한 시기를 선사하는 나이가 바로 이 때라면, 지금 나를 흔들고 있는 '불안'또한 다른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무엇이든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과 '방향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오늘의 나에겐 자아성찰을 넘어 '스스로의 힘'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붕대를 감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그 후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따금 열쇠를 찾아서 나 자신 안으로 침잠하면,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나를 구하는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아르's Review |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은 것이 <노예 12년>에 이어 두번째로 <데미안>로 읽은 것이었는데 처음에 읽었을 때는 조금 난해하기도 하고 어렵다고 느꼈던 것이 다시금 읽으면서 '아, 이런 것이었구나'라는 생각들을 계속했던 것 같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무조건 다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면 두번째 읽으면서는 그래, 편안하게 읽어보자, 라는 생각이 아무래도 이 책을 마주하는데 더욱 도움이 된 듯 하다. 너무 늦은 나이에 데미안을 보았다는 아쉬움과 강박감을 떨쳐버리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듯 했다. 10대의 기억들은 이제 아련하기는 하지만 그때의 선명히 남았던 기억들은 현재의 나에게 데미안을 읽는 내내 중첩되어 다가왔고 그래서 책을 보는 동안에 싱클레어의 행보들이 아련하게 다가온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며 바라보았는데, 사과를 훔쳤다는 상상에서 시작된 그의 속박은 안쓰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삶에 있어서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가는 우리의 모습들을 보는 듯 했다. 주인공이 아닌 조연같은 느낌이 가득한 데미안을 보며 싱클레어의 삶을 마주하는 동안에 데미안이 얼마나 그의 삶에 가슴 깊이 내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더욱이 그 세계는 훨씬 더 좁아서 원래 우리 부모님만 계셨다. 나는 그 세계의 대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는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불렸고, 사랑과 근엄함, 모범과 학교라고 불렀다. 은은한 광채, 맑음과 청결이 그 세계에 속했으며, 다정하고 상냥한 대화, 깨끗이 씻은 손, 깔끔한 옷, 예의범절이 그 세계의 것이었다. –본문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부모님을 틀을 벗어나 새로이 마주한 세상인 프란츠를 통해서 어두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그 어둠 속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데미안이었는데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은 구원자와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데미안에게 고맙다는 인사보다는 조용히 다시 부모님의 세계로 편승하게 되며 그 이후 데미안과 멀어진 다음 다시 그는 술과 함께 나락의 생활을 하게 된다. 모두가 그가 이제는 낭떠러지에 있는 것으로 보며 더 이상의 구원이 불가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조차 알폰스 베크가 들려운 야켈트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문구점에 들어서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아직 그의 내면까지 어둠이 가득 차지는 않았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데 우연히 마주한 베아트리제를 보면서 그리기 시작한 초상화가 데미안을 지나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회귀되는 것을 보면서 그가 이전의 방탕했던 삶을 청산하고서 다시 이전의 밝은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우린 슬퍼하지 않아요. 어머니, 다만 이 새로운 징조들이 무얼 뜻하는지 수수께끼를 조금 풀어 보려고 했을 뿐이예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오게 될 일은 불시에 들이닥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을 알게 되겠죠. -본문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보면서 어린 싱클레어가 지금의 어엿한 청년이 될 때까지 데미안은 그의 곁에서 그가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어두컴컴한 길 위의 한 줄기 빛을 밝혀주는 조력자와 같은 일은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재의 싱클레어가 완벽하게 다듬어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혼자 나아갈 수 있기에 데미안은 그를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홀로 남은 싱클레어도 자신이 어떠한 길을 가야할지를 알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사다난했던 유년기의 성장통은 값진 것이란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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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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