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불행과 행복은 서로 대척점에 있고 그 둘 사이에 교집합은 없는 것일까?"
안나 까레니나 독서를 마무리하며 나를 휘감았던 생각이다. 안나 까레니나의 시작에서 말하듯이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처럼 나는 독서를 통해 이 책은 모든 문장, 모든 부분이 불행, 혹은 행복을 내비치고 있다고 느꼈다. 각각의 등장인물은 각자 행복과 불행을 오가며 살아가고 저마다의 이유로 그들은 불행에 빠지며 또한 행복한 인생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의문이 들었던 점은 왜 그들은 불행하다고 하는 그들의 삶에서 어떤 이유로 행복을 느끼기도 하며, 행복한 삶 안에서도 다툼이나, 내적 갈등으로 인한 불행을 경험하는가였다. 이 의문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해결이 되지 않고 끝없는 갈증처럼 나를 뒤덮은 채로 남아있었다. 말 그대로 행복하면서도 또한 불행할 수 는 없는 것일까?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나 나름대로 이 갈증을 해소하는 의견을 스스로 내놓았고 그 생각을 이 리뷰를 통해 써내려가고자 한다.
본격적인 리뷰를 하기에 앞서 안나 까레니나의 후반부는 안나-브론스끼와 레빈-키티, 그 중에서도 안나와 레빈의 내면 묘사를 통한 상반된 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둘을 둘러싼 많은 인물들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전반적인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들을 여실히 보여주지만 초반과 가장 다르게 느낀 점은 인물들의 갈등, 죽음, 그리고 내면을 통한 톨스토이의 인생에 대한 철학을 후반부에 강하게 보여줌으로써 안나 까레니나라는 책을 단순히 사회 비판, 인간 관계 소설을 넘어서 이 책은 삶의 철학을 다루는게 핵심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키며 끝이 난다. 그렇기에 나도 이 책을 덮는 순간에 오히려 궁금증이 증폭한 채로 책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안나와 레빈의 삶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 무관하게 이제 내 삶은, 내 일평생은, 매 순간이 예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이라는 의심할 바 없는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를 내 삶 속에 불어넣을 권한이 나에겐 있다!"
레빈의 마지막 대사이자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이 말을 나는 수 십번을 반복해서 읽으며 이해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나는 이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되뇌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어떤 인생의 진리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내면의 소리라고 한정짓고 다가가면 레빈이 왜 이런 말을 했고, 톨스토이가 왜 이 말을 마지막으로 책을 끝냈는지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안나 까레니나라는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너무나 방대하고, 저마다의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안나와 레빈을 어떤 사람으로 내 안에 받아들였는지를 지극히 주관적인 언어로 풀어나갈 뿐이다.
책의 배경인 19세기 러시아는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하고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 나라가 격동하기 시작하는 시대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당시 사회가 어떤 식으로 변해가고 이런 변화가 사회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수많은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책 중간중간 귀족들의 대화를 엿듣다보면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한 개인인 국민들은 국가 의지를 따라가는 것이 타당하고, 개인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시선이 주를 이룬다.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사회주의에 대한 톨스토이의 시각으로 해석했는데, 그저 사회의 물결에 의지 없이 휩쓸리는 것이 아닌, 또한 무분별한 반항심으로 의지를 잃는 것도 아닌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으며 이러한 각 개인의 삶의 의미가 모여 큰 공동선을 이룬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나 나름대로 받아들였다. 즉, 공동의 의지가 선행되고 그 의지에 따라 개인의 행동에 선이 정해지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닌, 외부의 간섭에 흔들리지 않는 개인의 선이 모여서 절대적인 '선'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책 전반적으로 레빈의 입장을 가장 공감하고 그에게 이입하며 읽었기 때문에 어느샌가 레빈을 나에게 대입시키며 그의 대사를 따라 내뱉고 나에게 맞게 의미를 부여하곤 했는데, 마지막 문장 또한 책의 레빈이 아닌 내 안의 레빈은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했을까라는 방향으로 시작하니 나 나름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전히 이해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나라면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의 애매모호한 결론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앞서 언급했듯이 결국 평범한 사람으로의 고뇌를 대사로 읊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100% 논리정연한 문장으로 받아들이는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접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소극적인 방식만으로 정의로울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한동안 책을 덮고 문장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만 충격을 받은 이유는 내용에 관해서가 아닌 이 문장이 내 삶 자체를 관통하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삶에서 소극적인 방식이란 무엇이며, 정의는 또한 무엇인가? 단어가 내포하는 뜻의 나열이 아니라 내 삶에 이 단어들이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레빈은 내가 고민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 말을 작 중에서 했지만 큰 맥락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삶을 살아가며 나라를 바꾼다거나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를 둘러싼 주변환경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의 신념을 위해서, 혹은 나의 가족, 친구, 그리고 내가 속한 주변 사회적 환경을 위해 정의로운 행동을 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과연 필수불가결하게 그들의 앞에 나서서 의견을 내세우며 주도적으로 행동해야 할까? 아니면 남들을 바꾸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믿는 올바른 행동을 하며 주변에서 나에게 영향을 받기를 기대하며 비록 앞에는 나서지 않지만 느리더라도 서서히 선으로 물들기를 바랄 수도 있는 것일까?
"삶의 내밀한 부분들을 건드릴 때마다 안나가 실눈을 뜬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안나가 돌리를 외면한 채 실눈을 뜨고서 말했다."
각자 다른 문장이고 다른 순간에 쓰인 문장이지만 나는 이 구조적 배치에 대해서 무척 감탄하며 읽은 부분이다. 내용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던 문장들 처럼 내포되어있는 의미나 숨겨진 철학적 의미를 사색하는 문장은 아니지만, '실눈'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설명이 필요할 수 있는 부분을 생략하고 함축적으로 전달함으로 독자들에게 따로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도 단번에 상황을 이해시켰다. 앞 문장이 바로 전도 아니고 어느정도 텀을 두고 쓰여졌는데도 불구하고 뒷 문장을 보자마자 앞 문장을 떠올리며 "어? 실눈은 안나가 상황을 피할 때 하는 행동아닌가?"하고 안나가 왜 돌리에게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이 실눈 뿐만이 아니라 책 전반적으로 이런 장치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렇게 작은 부분조차도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오히려 책을 그저 정보의 전달이 아닌 책의 감정, 온도까지 독자와 공유하는 하나의 실존하는 '세계'처럼 느끼게 한다는 생각을 하며 톨스토이란 대문호에 대해서 연이은 감탄을 쏟아내게 되었다.
나는 소설을 쓰거나 남에게 보여질 목적의 어떤 산문적 글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의 의미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함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방식을 내 생활 내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남들과의 대화나 글로 목적을 전달할 때도 적용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안나 까레니나에서 배운 부분 중 하나이다.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진 이유는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고요."
안나가 마지막 결심을 하기 직전 기차에서 앞자리에 앉은 부부의 대화에서 나온 부분이다. 이를 통해 안나의 심리를 안나가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해주며, 이성이라는 부분을 안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는지 까지도 영향을 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안나는 항상 자신은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믿고 이성이 다른 충동적인 감정들보다 위에 있다고 믿으며 행동하려고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너무나 모순적이게도 안나는 자신의 불안한 처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충동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행동하며, 해결하기 위한 이성이 아닌 달아나기 위한 감성을 택한다. 하지만 안나 본인은 자신이 브론스끼나 다른 가까운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 이성적이라는 말로 포장하려고 한다. 한 예로 그녀의 아들인 세료자에게 찾아갔을 때 그녀는 아들에게 자신은 죄를 저지른 나쁜 사람이고 아버지 말을 따라야 하기에 세료자를 더이상 볼 수 없다고 하며 떠난다. 이 말만 본다면 그녀는 자기객관화를 잘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세료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한 말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하고, 저런 언행들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닌 단지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애써 포장하고자 나온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이성이 아닌 그녀가 이름 지은 같은 이름의 다른 도구일 뿐이다.
그녀와 대비 되게 레빈의 경우는 이성을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레빈은 끝없이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하며, 뭐든지 이해로 자신의 의문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이는 레빈이 이성을 자신의 불안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내면에서 끝없는 사유가 일어나도록 의도하듯이 느껴졌다. 나는 안정적일 수 없으며 끝없이 발버둥치며 살아간다고 외치듯이 이성이라는 추진력을 통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이를 자신이 삶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으로 산다고 느껴졌다.
이처럼 나는 책을 읽어나가며 레빈과 안나를 끊임없이 대비하고 같은 지침을 두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지를 가장 중점에 두고 읽었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부분도, "안나라면?", 혹은 "레빈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와 같은 자문을 끝없이 이어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나 까레니나를 누구와도 똑같이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나만의 방식으로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부분이 소설에서 나 자신의 독서 방식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문득 브론스끼와 처음 만났던 날 기차에 짓뭉개진 사람이 떠올랐고,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읽자마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는데, 시에서의 수미상관처럼 어떻게 이 긴 소설의 처음과 끝을 이을 수 있었을지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부가설명을 적을 필요 없이 기차에서 처음 등장한 안나,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찻길을 통해 이별을 고하는 안나를 기찻길이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는 안나의 시작과 끝은 너무나 명확하게 인지하고, 느끼고,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단순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이 장대한 소설에서 시작과 끝에 기찻길이라는 등대를 설치함으로 독자가 길을 잃지 않게, 또한 이 이야기의 방향 또한 잃지 않고 나아가도록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처음 기찻길에서 사고가 난 사람을 통해 보러간 안나와 그 가족에게 호의를 베푸는 브론스끼의 첫만남을 표현하며 그저 이 둘의 운명을 시작하는 한 순간의 등장인물 이지만, 마지막 부분에 이를 마치 안나 자신처럼 투영하는 부분에서는 그 어떤 인물보다 생생하게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이 책의 어느 한 부분도 여백으로 남기지 않고 독자가 이들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며.
앞에서 많이 이야기 했기 때문에 마치는 말에는 크게 언급할 부분이 오히려 떠오르지 않는다.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총평으로 남기기엔 이 책에서 할 말이 너무나 많고 간단히 줄여서 평을 하기에 다시 리뷰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고, 다른 걸 떠나서 소설 그 자체의 이야기와 내용 자체도 지루할 틈 없이 이어나가기에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데 그다지 다른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안나 까레니나는 어쩌면 나의, 내 가족의, 혹은 오늘 스쳐 지나간 어느 모르는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안나와 레빈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이지만 이들은 내가 될 수 있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는 이야기이도 하다. 특별하지 않고, 어쩌면 반대로 너무나 특별할 수도 있는 이야기는 읽는 독자마다 저마다의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삶에 맞게 이야기를 그 틀에 맞춰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책이다. 그렇기에 읽는 독자의 수만큼의 안나가 탄생하고 또 사라질 것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안나 까레니나가 저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결코 재미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며, 모두가 읽었으면 바라는 책이기도 하다.
이상 리뷰를 마치며 나도 안나와 레빈, 그리고 다른 이 이야기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안녕을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