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영업을 하며 부모와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의 전체 생계를 부양하던 그레고리 잠자는 아침에 깨어보니 자신이 한 마리의 커다란 갑충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소설의 충격은 그 충격적인 사실을 그레고리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레고리에게는 어느날 아침 벌레로 변해있는 자신의 실존적 모습이 중요하지 않다. 그가 신경쓰는 것은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네 식구의 유일한 수입원으로서 자신이 벌레로 변함으로 인해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과 그로 인해 맞게 될 가족의 경제난이다. 부모님이 진 빚을 다 갚으려면 아직 5~6년을 출장 영업사원으로 일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은 그레고리에게는 스스로가 갑충으로 변해서 침대 위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는 그 엄청난 사건과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실이다.
벌레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 않은 채 그레고르 잠자는 다섯 시에 기차를 놓친 원인, 네시에 울리도록 설정한 자명종을 듣지 못하고 편히 잠잤다는 죄책감, 다음 기차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하루의 업무에 대한 계획들로 가득차 있다. 침대에서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동안, 안쪽에서 잠긴 문 바깥에서 일어나라는 성화를 하는 가족과 회사에서 방문한 지배인의 비난에 무기력하게 대치할 뿐이다. 지배인을 설득시키려는 그의 속사포같은 대화는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로 바뀌고, 더이상 가족은 물론 인간 세상의 그 누구와도 인간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밖에서는 그레고르를 찾고, 안에서는 낯선 모습의 갑충의 외모 때문에 힘겹게 문을 열기 위해 분투하는 중에도 그레고르는 어서 이 위기를 이기고 다음 기차를 타고 출근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마침내 몸을 다쳐가며 겨우 문을 열고 그의 충격적인 모습을 가족과 지배인에게 보였을 때, 어머니는 기절을 하고, 그를 찾아왔던 지배인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도망가고, 아버지는 그를 구석으로 몰고 가는 등의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가족의 생계라는 그의 책임은 그의 마음을 비껴나지 않는 듯 보인다. 지배인을 설득하여 직장을 잃지 않으려는 절실한 허무한 노력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그가 혼자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게 방구석으로 내몰린다.
쉿쉿 소리와 함께 빗자루로 내몰린 그레고르의 방 갇힌 문의 안 쪽, 그곳의 공간은 이제 그레고르를 위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그레고르의 끔찍한 모습을 가족들로부터 유리시키는 공간이다. 물론 가족들 역시 그 혐오스런 갑충이 어떻게 해서인지 자신의 아들이고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벌레로서의 외형을 갖자 마자 하루 아침에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성을 말살당했고, 벌레 취급을 받는 실존에 적응하게 된다. 더이상 회사에 나가지 못하자 생계가 곤란해진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걱정과는 달리 먹고 살 궁리를 해나간다. 빚은 그레고르 몰래 이미 다 갚은 상태였고 아버지는 취직을 하고 집안의 빈 방을 하숙을 치고 하녀를 내보내는 등의 노력은 그레고르가 사장에게 그토록 무시당하면서도 삶의 이유였던 가족의 생계가, 실은 그의 헌신만으로만 가능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토록 헌신해온 가족들이 보내는 매정하고 잔인한 행위에 상처입고 좌절하면서도 무기력하게 죽음을 수용해가는 모습에서 소외된 인간과 헌신의 무용함을 읽을 수 있었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협소한 해석보다 더욱 넓고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가족들 중 그나마 가장 그레고르를 돌봐주었던 누이는 동생의 연주에 매혹되어 거실로 들어온 그레고르를 보자, '저것'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최후의 일격을 당한 그레고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제 그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가족들의 모습 앞에 쓸모없어진 자신을 원망도 비난도 없이 수용하는 모습이다. 어쩌면 이것이 카프카의 삶이 느끼는 실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의 상인 아들로 태어난 카프카는 두 형이 일찍 죽어 부모와 세 여동생과 함께 맏이로서의 역할을 의식하며 살았다고 한다. 유대인이이었기에 프라하의 독일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현대 지식인으로서 유대의 유산으로 소외되어 있었으며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위압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몰이해속에서 글쓰기를 계속해 나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카프카의 <변신>을 찾으면 어린이용 버전에서부터 일러스트가 있는 최신판까지 그야말로 수십권의 책이 나오는데, 가장 먼저 찾아지는 민음사 판은 오래된 데다가 번역이 최악이라는 평들이 많이 달려있고, 비교적 최근에 나온 일러스트가 있는 문학동네판은 미리보기만 살짝 보았는데 그림이 만족스러웠다. 문예출판사 10년 이북 대여 세트에도 변신이 있어서 봤더니, 판본 출처가 기재되어 있지 않고, 중역인듯 역자가 영문 번역가로 보였다.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었는데 종이책은 열린책들 버전이 빽빽해서 노안이 있으신 분들은 불편할 것 같다는 불평을 볼 수 있었고, 을유문화사 판이 수록 단편도 가장 많은 것 같았다. 워낙 위대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 내용은 대략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뿌듯했고, 왜 카프카가 그토록 많은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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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잠자씨에 대한 흥미로운 소문에 이끌려 보게 됐습니다.
책 구성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금세 적응이 되었지요.
이게 뭐지? 싶은 물음표가 잔뜩 뜨게되는 약간 의아한 글도 있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재밌었습니다.
카프카의 다음 책을 장바구니에 서둘러 담게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 입니다.
미친 작가들의 목소리는 참 흥미롭지요. 자고로 잘 미치고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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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소리가 서로 혼란스럽게 마구 뒤섞이는 가운데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섞게 되면 사람들은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붙잡혀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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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과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부분이 특히 재밌었습니다. 잘봤어요 카프카씨. 또 봐요.
한 때, 교훈적인 영화, 감성적인 영화중에 ‘안녕 형아, 우리 형’ 이라는 영화를 봤었습니다. 영화 내용은 ‘가족에게 더 잘해주고 좀 더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 후회 하지 말자’ 라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정말 느끼는 것이 많아서 그 후에, 책으로도 이런 감성과 감동, 교훈을 느낄 수 있는 책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교훈적인 책을 찾다보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줄거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줄거리만 읽었을 뿐인데, 느끼는 것이 조금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사서 읽어보고 싶어서 책을 샀고, 그래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의 줄거리는 그레고르와 그의 부모님과 누이동생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레고르 외의 가족들은 사지가 멀쩡하였지만, 일을 하지 않았고 그레고리만 일을 했습니다. 그레고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고 자기만의 시간도 갖지 못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고르는 불안한 꿈을 꾸었고, 아침에 꿈에서 깨자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습니다. 벌레로 변하게 되니 출근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출근을 안 하자 부모님과 지배인이 재촉을 하러 와서 문을 열자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벌레가 된 모습을 보자 그의 가족은 그를 박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벌레가 되었기 때문에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 없고, 손이 변해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레고르는 더 이상 그의 가족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고 계속하여 민폐를 끼치자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그레고르가 죽게 되자 그의 가족들은 새 출발을 하자며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책의 가치는 제가 보기엔 젊은, 어린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깨닫게 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중3이 끝나고 이 책을 읽었고, 또 20살이 되어서 이 책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이 더 생기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3때는 이 책을 보며 ‘아 부모님께 잘해야겠다. 많이 힘드시겠구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었는데, 20살이 되니 ‘부모님께 잘하자.’ ‘또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좋은 책입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교훈이 생기는 매력적인 책인 것 같습니다. 또 한, 이 책은 어려서 읽었을 때 느꼈었던 교훈을 커서 다시 읽었을 때의 그 교훈을 다시 상기 시키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아쉬운 점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족들 이야기를 조금 더 추가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의 가족들이 그런 정신 상태로 살아가고 망하는 이야기를 추가 했다면 속이 시원 했을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제가 했던 예전의 일이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경찰이신데 사건을 처리하시다보면 원래근무시간보다 늦게 오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 아버지의 근무는 아침근무, 새벽근무다보니까 일찍 자는 습관을 가진 저와 마주칠 시간이 없게 되었고, 마주 친다면 공부한다고, 논다고, 컴퓨터 한다고 직장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를 제대로 반기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로 ‘더 잘해야지’ 이제 이러한 실수는 하지 않도록 부모님께 더 잘하고 효도해야겠다고 느꼈었습니다.
이 책의 큰 주제는 소외된 인간의 고독이고, 작은 주제는 가장에 대한 소외감, 허무함, 고독이다. 읽고 난 후 ‘만약 내가 가장이되어 저렇게 소외받고 고독을 느끼고 허무함을 느낄 때 어떻게 할까?’, ‘난 저렇게 살지 않고 멋지게 살아봐야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모님께 잘해야지’라는 교훈 말고, ‘내 미래에는 어떻게 살까? 미래에는 저렇게 살지 않도록 열심히 살도록 해봐야지’라는 교훈 또한 얻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교훈을 마음으로 느끼고,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해보니까 주제가 정말 가슴에 와 닿았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 집안의 아들로서 가족을 부양하던 잠자는 어느 이른 아침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한다. 매일 변함없는 떠돌이 외판사원의 삶 자체가 이미 변신을 위한 불안한 꿈을 잉태하고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며 견고하게 다져왔던 가족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가족의 주된 수입원을 잃자 가족은 생존을 위해 각자 새로운 일거리와 주거를 찾는다.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흉물이 된 아들이자 오빠는 즉각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밀폐된 공간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
<성>의 측량사로 마을에 들어선 K는 성의 관료체제와 마을 주민의 집단적 배척 속에 길을 잃고 밤길을 헤맨다.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을 설명하거나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역시 상황을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그런 의문조차 갖지 않는지도 모른다. 성의 관리로부터 받은 모욕적인 편지를 찢었다는 이유로 아말리아 가족에게 내려진 처벌과 격리의 주체 역시 분명하지 않다. 그 누구도 결정하지 않은 처벌이 공공연하게, 암묵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집행된다.
어떻게든 성에 들어가겠다는 K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학교의 관리인으로, 그리고 마을 주민의 말 관리 일꾼으로 끌려가면서 소설은 미완성인 채로 남는다. 그의 사후에 미완성이라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미완성으로 끝난 것인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심지어 가장 근사한 마무리라 여겨질 때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K는 마을에 정착하려고 애쓰다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건에 연루된 <소송>의 당사자 요제프 K는 결국 법 집행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 어떤 사유도 찾을 수 없는 '부당한' 범죄자가 되어 결국 처형당한다. <성>의 권력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공모하는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소송>의 법 집행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과 <소송>의 관료 집단에서 ‘아이히만’과 같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악인의 탄생을 목격한 K는 <아메리카> 향한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K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서부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이 역시 미완으로 남았다. ‘오클라호마 자연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연출되고 조작된 서부의 역사 속으로, 마침내, 완전히, 실종되고야 마는 K. 전쟁의 광기를 피해 미 대륙으로 건너온 수많은 유럽의 작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K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다. 카프카를 말할 때, 프라하의 유태인이자 독일어를 사용하는 카프카의 중첩된 정체성에 대해서 주목하지만 카프카 본인은 이 정체성의 탐문을 일찌감치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고, 자신 안에 이미 각인되어버린 중첩된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K는 떠돌이들이다. 떠돌이를 위한 자리는 마련되지 않는다. 오직 떠돌며, 생존하는 것이 관건이다. 떠돌이들은 누구도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집요하게 묻지 않는다. 그들은 해석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갔고, 휩쓸리고, 거기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지만 모두 좌절을 경험한다. 자신이 왜, 거기에 있는지, 누구인지 따위는 질문에 포함되지 않는다. 기계와 노동으로 조직된 체계 안에서 고립된 개인에게 진실 따위는 필요치 않고 오직 생존의 윤리만 작동한다.
1883년에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태인 카프카가 독일어로 그리는 이 암울한 제국의 풍경은 권력과 정치가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배제한 채 오직 개인의 생존을 위해 내면화된 형태로 다가온다. 카프카가 그리는 이 출구 없는 세계에는 반드시 '이 곳에 출구가 있다', 라는 암시를 던지며 나타나는 그 누군가를 예고하고 있다.
고립무원의, 주변을 떠도는, 생존의 정치와 파편화된 권력에 익숙한 개인에게 비극적 출구가 열리는 순간을 채플린은 왜소한 몸이 펼치는 추적과 도주의 희극으로 구성했다. 카프카는 죽음의 결말과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역시 채플린의 떠돌이처럼 희극적인 K들로 출구 없음을 말하고 있다.
개인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아메리카>의 세계, 차이가 발견되었을 때 혐오로 돌변하는 <변신>의 세계, 권력을 무의식적으로 승인하며, 내면화하는 <성>의 세계, 개인의 구체적 진실이 사라지고 기계와 같은 체제의 부속품임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소송> 관료의 세계, 이 세계의 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것은 파시즘이다.
카프카 독서는 지속적인 내적 저항을 유발한다. 이야기는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예측불허는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 옆으로, 샛길로 자꾸만 미끄러지며 어떤 의도도 발견할 수 없다. 지난밤 꾸었던 꿈을 자동 기술하면 나올 법한 비논리와 환상 속을 헤맨다.
실패한 자신의 친구를 염려하며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게오르크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가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려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린다. 하녀를 무뢰한의 손에 남겨놓고도 죽어가는 아이를 구원하지 못하는 <시골의사>는 혹한에 맨몸을 내던지고, 인간이 되기 위한 출구를 찾으려는 원숭이는 <학술원에의 보고>를 통해 자유란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다.
"목표는 있지만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일 뿐이다."
카프카, 그의 세계에 머문다는 것은 인내하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그의 무의식에 접근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이 내적 저항은 읽는 자로 하여금 그 자리에 머뭇거리게 하며, 음침하고 우울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미로의 세계,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세계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며 끓임 없이 읽기 중단을 요청한다.
이 중단의 유혹을 인내하며 앞으로 나가더라도 다시 돌아보고, 옆을 힐끗거리며, 읽기와는 상관없는 기억이나 경험으로 빠져든다.
결국 자기 자신과 “최후의 고독한 싸움”에 직면하는 순간을 맞을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다면.
카프카를 읽는다는 것은 과연...
어느날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는 볼때마다 그 내용이 새롭게 다가온다. 인간의 실존은 무엇이고,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경멸스럽고 쓸모없는 인간에 불가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벌레나 다름 없는 것일까. 이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처지에서, 그리고 점점 늙어가는 처지에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가슴 한켠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