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eview MDCCCXII / 문예출판사 6번째 리뷰] 이 책에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모두 4편 실려 있다. 실려있는 순서대로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코에포로이>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다. 모두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적인 소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이 정해놓은 운명에 맞서 고뇌하고 고통받는
리뷰제목
[My Review MDCCCXII / 문예출판사 6번째 리뷰] 이 책에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모두 4편 실려 있다. 실려있는 순서대로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코에포로이>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다. 모두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적인 소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이 정해놓은 운명에 맞서 고뇌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 그리스에서 유행한 것일까? 이에 대해 많은 문학가들은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논한다. 신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또한 그 삶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 절망적이고 가망 없는 투쟁 속에서도 인간은 타협을 거부하고 파멸을 자초하면서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찾아내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정해진 운명'에 맞서 싸우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인간다움'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뭐가 '인간다움'이란 말인가? 그리스 비극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그야말로 '참담함, 그 자체'다. <아가멤논>에서는 아내가 내연남과 짜고서 남편을 독살하고, <코에포로이>에서는 아들이 어머니와 내연남을 죽이며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더 심하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는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안티고네>는 비극의 정점을 찍었다하겠다. 꼭 지켜야 마땅할 '국법 vs 도덕'의 갈등을 최고조로 보여주며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고뇌케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느 작품이나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비극적 주제'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이런 까닭에 많은 문학가들은 아이스킬로스를 '비극의 창시자'라고 부르고,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극의 매력'은 갈등양상을 벌이는 양쪽 모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한 쪽의 편을 쉽사리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비극에 푹 빠지게 만드는 이유라고 하겠다. <아가멤논>에서 아내(클리타이메스트라)가 남편(아가멤논)을 죽이기 위해 내연남(아이기스토스)까지 끌어들이는 '부정적인 일면'만 소개하는 일이 많은데, 사실 아내가 마땅히 사랑하고 존경해야할 남편이라는 작자가 '딸(이피게네이아)'을 전쟁 출정식의 산 제물로 갖다 바친 것에 대한 복수였던 것이다. 이는 어머니라면 당연히 가졌다고 보는 '모성애'를 공격한 남편의 천인공로할 만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아니겠냔 말이다. 그러나 전쟁영웅이기도 한 남편을 죽이기에 힘이 모자랐던 아내는 남편을 죽이기 위해 '내연남'을 꼬드겼고, 이러한 '아내의 불륜(?)'은 예나 지금이나 금기시 되고 동정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코에포로이>는 <아가멤논>의 뒷이야기에 해당한다. 남편을 살해하고 내연남과 함께 국가를 통치한 클리타이메스트라의 친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어머니와 내연남을 처지하며 복수에 성공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국가의 백성들은 행복한가? 아무리 '왕족의 운명'과 공동운명체(?)인 백성들이라고해도 민주정치의 원조라 자랑하던 그리스국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더구나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영웅들이 살아 숨쉬던 시절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그런 영웅들이 고국으로 되돌아와 통치에 참여한 모습은 전혀 비춰지지 않는다. 이것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한계점이다. 비록 '비극의 창시자'라는 칭송을 아낌없이 받고 있지만, '비극,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그냥 '한 가문(왕족)의 몰락'만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이다. 그에 반해 소포클레스는 좀더 심오한 내용을 담았다. 비록 '오이디푸스 왕'이 겪은 불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오이디푸스가 다스리는 '테바이'라는 나라가 겪는 풍파와 테바이 민중들이 겪는 고난까지 작품내용의 전개에 중요한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오이디푸스 왕>은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을 한 것에만 초점을 맞춰 '성도착증'이라는 성욕구만 해석을 해버리는 편파적인 결과만 부추긴 점이 아쉽다. 사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바이를 아주 잘 다스리던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점은 싹 가려지고 그저 비이성적인 성욕구에 대한 그럴듯한(?) 분석만 남겨놓았으니 억울할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군주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었는데, 테바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테바이는 '판데믹의 위기'로 빠져버리고 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델포이 신전으로 신탁을 받아 오지만, '도덕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이'가 테바이에 몰려온 위기의 원인이라는 애매한 말만 돌아왔을 뿐이다. 지혜로운 오이디푸스 왕도 이 수수께끼 같은 신탁을 해석하지 못해 고민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이 지혜로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테바이의 왕이 되기 전에 괴물 '스핑크스'가 테바이를 공포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는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고서 풀지 못한 나그네들을 잡아먹기로 유명한 괴물이었는데, 이 괴물이 낸 수수께끼를 이방인이었던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추고 스핑크스를 처지해서 때마침 테바이의 왕이었던 라이오스가 의문의 죽음(!)을 맞아 자리가 빈 임금자리를 오이디푸스가 차지하게 되었고, 살아있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해서 '테바이 왕가의 혈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등장은 테바이로서는 국난극복을 해낸 영웅의 등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그런 오이디푸스 왕이 테바이를 다스리는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평화로운 테바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테바이를 '죽음의 나라'에 버금갈 정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받아온 신탁이 '부도덕한 인물을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이니 지혜로운 오이디푸스마저도 풀지 못한 숙제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렇게나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최선을 다했고, 그 최선이란 것이 '부도덕한 인물'을 색출하여 마땅한 벌을 받게 하고 테바이에서 추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최고통치자인 자신부터 이를 실천하겠노라고 엄숙한 맹세까지 한다. 그 부도덕한 인물을 추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들겠노라고 말이다. 어찌 이렇게나 무서운 맹세가 자기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 예상이나 했을까? 그렇게 부도덕한 인물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인해 결국 그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진실을 보지 못한 죄'를 씻고,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맹인거지가 되어 테바이를 떠난다. 자신이 왕이었을 때 그 '부도덕한 인물'을 아무도 도와주지 말라 명했던 탓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간에게 내려진 무서운 운명에 벌벌 떠는 나약한 인간이 아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불운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멋진 인간에게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느냔 말이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당당히 벌을 받고 철저히 속죄하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다운 행동'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만, 그처럼 '인간다움'을 갖춘 인격이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들 뿐이다. 죄를 짓고도 비겁하게 '무죄'를 받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도 '과거의 영예'를 끌어들여 오물을 덮고 고약한 냄새를 감추려 애를 쓰는 비겁자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심지어 비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비윤리적인 행동'마저 정상이라고 떠벌리는 비정상적인 세태까지 펼쳐질 지경이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리 부끄러운 짓을 떳떳하게 밝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인간을 방치하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데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국민들도 '비정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비극'에 맞서 피하거나 굽히거나 굴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이다. 오이디푸스의 행보 하나하나를 눈여겨 보아야 할 '시대적 위기'가 우리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안티고네>는 무엇을 '지키고 따라야'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오이디푸스 왕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테바이를 통치할 자리에 올라야 할 '마땅한 권리'는 당연히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에게 있었다. 바로 장자 폴리네이케스와 차남 에테오클레스다. 하지만 왕의 자리는 하나였기에 두 형제는 '선택'해야만 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합의'를 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말이다. 비극적 운명은 이 둘에게 '싸움'을 종용했고, 둘은 못나게도 싸웠다. 물론 처음엔 장자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하지만 외삼촌인 크레온의 야욕(?)에 의해 둘은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장자가 내쫓기고 차남이 왕위에 오르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억울했던 장자는 이웃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고국 테바이를 향해 창을 꼬나쥐게 된다. 이렇게 벌인 싸움에서 두 사람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치명상을 당하여 죽고, 비어 있는 왕위는 크레온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왕의 자리에 올라 오랫동안 고난을 겪은 테바이를 바로 잡고자 '국법'을 내세웠으니, 조국을 위해 싸운 자에게는 명예롭게 하고 조국을 배신한 자에게는 불명예를 내리겠다는 모두가 이해할 만한 '합당한 법'을 공표한다. 이처럼 크레온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똑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극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불명예를 받아 마땅한 테바이의 배신자 '폴리네이케스'는 외국의 군대까지 끌여들여 조국을 공격했으니 그의 시체는 그 누구도 장례를 치루지 말 것이며, 들짐승과 날짐승의 먹잇감으로 방치해 둘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명령을 어긴다면 '국법의 이름'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라 함께 공지한다.
그런데 이를 어기는 사람이 등장하고 만다. 바로 폴리네이케스의 살아남은 혈육인 여동생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다. 안티고네는 아무리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친오빠를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하는 국법을 지킬 순 없다면서 오빠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는 '도덕적인 행위'이며 누가 탓할 수도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상식이 '국법'에 위배된다면서 안티고네는 스스로 죽을 운명을 지게 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현명한 임금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할까? 스스로 제정한 '국법'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해 손수 사형을 해야 할까? 아니면, 비록 법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지켜야 마땅할 '도덕적 가치'를 위해 한 발 물러서서 '예외'를 두어야 할까? 허나 꼭 지켜야 할 '국법'에 예외를 둔다면 국법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다. 누구라도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게 뻔하고, 그렇게 흔들린 '사법정의'는 끝내 무너져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정의구현'을 내세운다 한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꼭 지켜져야할 도덕적 윤리'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법으로 금한다 하더라도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지켜야 할 윤리가치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가족 간에 치뤄야 할 '윤리규정'이 있다면 그것마저 금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안티고네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오빠의 장례'를 치룬 것이다. 세상엔 '국법'보다 더 소중히 지키고 따라야 할 '윤리가치'가 있다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 되어야 마땅할까? 나라를 바로 세우는 '사법정의'가 중요할까? 인간답게 살아갈 '윤리가치'가 더 우선해야 할까? 쉽지 않은 결정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듯한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선 꼭 따져보고 현명한 대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소포클레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안티고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엄격한 국법'을 시행한 대가로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한마디로 멋진 나라를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사랑하는 가족은 잃어버린 셈이다. 허나 사랑하는 가족마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만든 '인간'이 만든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계속 남는다.
우리네 인생은 '비극'으로 얼룩져 있다. 한마디로 아름답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비극보다 더한 슬픔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눈물의 정화)'라고 표현하며 슬픔을 겪으며 한바탕 울음과 눈물을 쏟고 난 뒤에 '마음의 찌꺼기'를 걸러내어 슬픔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극'을 예찬했다. 한편의 비극이 우리네 삶보다 더욱 슬픈데도 '비극적 주인공'이 슬픈 운명에 맞서 당당한 모습을 통해서, 현실에서 맛볼 '평범한 비극' 따위는 가볍게 이겨낼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시대가 많이 변한 오늘날에는 '비극'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현실로 펼쳐지고 있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운명에 맞서는 당당한 주인공의 모습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그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막장 현실이 우리네 삶을 시험케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