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읽은 책 중 이처럼이나 상세한 역주가 달려 있는 텍스트는 처음 접했습니다. 고전 아니라 그저 시사 칼럼을 읽어도, 본론으로 접어 들면 독자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나 논리 체계가 많이 눈에 띄게 마련인데요. 어떤 저자, 논자, 작가도 그저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설명을 달아 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텍스트 소통은 그처럼이나 일방적인 것이 많았음이 다시 환기되는 기억입니다. 이번 올림픽도 코치진과 선수 사이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그저 상명하달식으로 훈련이나 기술 수련이 이뤄지다 보니 이처럼이나 나쁜 결과가 나온 것 아니겠나 생각이 들고요.
설명이 상세하지 않고 그저 이런 줄 알아야 한다고 넘어가는 건, 그만큼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론에 확신이 부족하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나이에 천병희 선생님의 저작을 접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죠. 사람이 자신의 머리 속에 정리된 지식이 많을수록 오류(자신의 것도 포함)가 눈에 자주 띄고, 글 한 줄을 설명해도 뭔가 환기되는 연관 지식 사항이 많이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서양 고전(헬라어, 라틴어)을 두고 이 정도 경지에 이르기란 특히 지난 시절 척박한 교육 환경을 고려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되는데요. 언제나 이처럼 예외적 존재는 출현하게 마련이죠. 어느 분야에서나 말입니다.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사실상 주인공인 <아가멤논>에서 제가 처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건, 역자께서 이 이름에 대해 "클뤼타이네스트라"라고 자음 하나가 빠진 채 표기된 판본도 있다고 역주를 통해 가르쳐 주는 대목에서였습니다. 후와, 벌써 바른 텍스트를 확정하는 작업 자체가 어려운 거구나, 그렇다고 이의 진위를 다수결에 기댈 수도 없는 일 아닐까 등등 더운 여름날 고전을 읽는 중학생의 머리 속에 온갖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체험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군요. 전장에서 갓 귀환하여 욕조에 피곤한 몸을 누이던 남편을 살해한 아내, 고귀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한갓 천박한 욕정에 눈이 멀어 남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물에 마음과 몸을 준 이 캐릭터의 속내는 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이름도 없이 주변에서 노래만 부르는 "코러스"들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이처럼 폐부를 찌르는 지적만 골라서 하고 있는지, 처음 접하는 고전 희곡 포맷의 생경함도 어린 독자의 흥미를 구석구석 찔러가며 자극했던 추억이고요.
어린 시절에는 감정적으로 선동이 잘 되죠. 아버지를 비열한 음모에 의해 희생당한 딸이 곧바로 격정에 휩싸이는 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낳아 준 친어머니에 응징하려는 계획까지 바로 독자 입장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코에포로이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을 가리킨다." -oi라는 어미(ending)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역자의 주가 워낙 상세하니 한 문장 한 문장이 통째로 다가와 머리 속에 새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본문보다 역주를 읽는 맛이 이처럼이나 상쾌하고 미약한 정신을 송두리째 일깨우는 체험인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고 이윤기 선생도 <뮈토스>에서 상당히 장렬한(그리고 독창적인) 묘사를 하고 있는 편입니다만, 역시 오이디푸스의 최후에 대해 제대로 비감을 느끼려면 소포클레스의 원전을 접하는 게 정석이죠. 이게 작품의 정확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예컨대 아테네의 황금 시절 누구는 사회의 원로였고 누구는 코러스에서 노래를 부르는 미소년이었다는 등 시대상에 대해 생생한 묘사(비록 정확성에는 의문이 들망정)를 곁들이는 천병희 선생의 서술은, 광범하고도 디테일까지 정확히 통달한 대가의 역량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 자체로 하나의 문예 작품이라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분을 척박한 한국에 내려 준 어떤 섭리(그런 게 혹 있다면)에 감사하고 싶을 뿐입니다(그 수제자분을 대학에 가서 뜻하지 않게 스승으로 맞이하게 될 줄이야 저도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