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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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조선 르네상스를 연 두 군주의 빛과 그림자

리뷰 총점 9.4 (2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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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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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영조와 정조를 통해 18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다! 평점8점 | YES마니아 : 로얄 i*****n | 2020.12.26 리뷰제목
'조선 르네상스를 연 두 군주의 빛과 그림자'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영조와 정조는 당쟁이 난무하던 18세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상을 헤쳐나간 인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자신의 그릇된 판단이라는 약점이 노출되기도 한다. 탕평책을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세워나가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도세자의 죽음은 때로는 영조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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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르네상스를 연 두 군주의 빛과 그림자'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영조와 정조는 당쟁이 난무하던 18세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상을 헤쳐나간 인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자신의 그릇된 판단이라는 약점이 노출되기도 한다. 탕평책을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세워나가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도세자의 죽음은 때로는 영조에 대한 평가를 공과 과가 나란히 언급되도록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정조의 경우 강력한 개혁을 이끈 인물이며, 당시의 권력을 주도했던 노론과의 맞서 왕권을 수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당시의 기록들을 통해 보건대 정조에게 내려진 '개혁군주'라는 평가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에게 어느 정도 상식적인 견해라 하겠다. 다만 정조의 죽음 이후 19세기에 벌어진 노론 핵심가문들의 세도권력으로 인한 폐해가 이어지면서, 정조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심정적인 측면이 그러한 명칭을 붙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책은 이 두 사람의 왕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이들의 리더로서의 행동과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정조에 대한 역사 기록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혁적인 면과 함께 측근정치를 통한 어둠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모두 5장에 걸쳐, 각 장에서는 두 사람의 행동과 정책에 대한 의미를 각각 10개 항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1장에서는 '조선 르네상스 군주의 초상 : 영조와 정조'라는 제목으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노심초사했던 두 사람의 상황과 당시의 정치 상황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등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상황은 소론과 노론이라는 두 당파의 치열한 권력다툼과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그동안 장희빈과 민비와의 알력 정도로만 해석되던 것은 어쩌면 역사를 흥밋거리로 만들었던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 두 사람은 당대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소론이 지지하던 경종의 죽음은 이에 맞서던 노론에게는 권력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였을 수 있겟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배경을 잃은 소론들에게는 엄청난 위기로 다가왔다실제 당시 노론과 소론 사이의 권력 투쟁은 이 시기를 전후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과연 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었던가를 차치하고서라도, 영조가 즉위한 이후 탕평을 내세우면서 당쟁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했던 것은 더 이상 당쟁에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위 기간 내내 교묘하게 당쟁을 활용하여 그들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반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고, 그로 인해 권력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과 맞서면서 지내야만 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들을 양성하고, 장용영이라는 호위부대를 만들었던 것도 따지고보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을 것이라 해석된다.

 

'개혁을 향한 의지 : 저항, 극복 그리고 미완'이라는 제목의 2장에서는, 그들의 개혁에 대해 걸림돌이 되었던 당시의 정치상황과 그를 헤쳐나가는 방법 그리고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개혁의 의미 등을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기록들에 나타난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들이 이론상으로는 타당한 이유를 가졋을 지 모르지만, 당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고려하지 않고 시행되어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그들이 행한 정책들을 '제도적 실험들 : 시대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라는 제목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이들이 시행했던 정책들이 지니는 밝음과 어둠의 양 측면을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4장에서는 그들의 개혁 정책이 지니는 의미를 '공감과 참여의 리더십 : 진심 그리고 한계'라는 제목으로 설명하고, 마지막 5장의 '변혁의 시대 리더의 권위 : 묘수 혹은 악수'에서는 왜 그들의 정책이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가를 소개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18세기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다면, 그저 두 사람의 정책이나 행동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배경은 물론, 다양한 기록들을 토대로 보다 객관적으로 두 사람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특히 각각의 소항목들의 말미에 '영조 그리고 리더' 혹은 '정조 그리고 리더' 등의 키워드로 관련 내용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이 덧붙이고 있다. 저자 스스로 그들의 정책이나 행동들에 대해 어떤 결론을 정해놓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기록과 정치 상황을 보다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과거의 역사를 이해할 때 감정의 측면이 아닌, 냉철한 이성으로 역사를 바라봐야 정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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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두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k******4 | 2020.12.27 리뷰제목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노혜경뜨인들출판/2020/12.7sanbaram   영조와 정조는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두 왕이다. 조손간인 이들은 조선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실정을 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두 왕의 리더로서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로 내 놓은 것이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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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노혜경

뜨인들출판/2020/12.7

sanbaram

 

영조와 정조는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두 왕이다. 조손간인 이들은 조선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실정을 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두 왕의 리더로서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로 내 놓은 것이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라는 책이다. 저자 노혜경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 <영조어제 해제 6>,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등이 있다.

 

리더가 비전을 품었다고 해서 곧장 성과가 발휘되는 건 아니다.(p.13)” 성공을 위해선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장애와 반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진정힌 리더라면 지혜와 용기, 끈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의 주인공 영조와 정조는 새로운 시대를 자각한 리더로 큰 업적을 쌓으며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었다.(p.14)하지만 실제로 행했던 국가 경영 방식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들에게도 그림자가 모두 있었다. 리더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 위기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에 기초해, 내가 해야 할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5가지 주제로 나누어 리더십을 설명한다, 각 주제마다 10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리더로서 두 왕은 어떤 판단과 결정으로 시대를 이끌었는지 분석하고 이 분석 속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성공한 요소와 실패한 요소로 나누어 기술한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리더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조직을 이끌어가야 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장 조선 르네상스 군주의 초상 : 영조와 정조

영조는 미천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후궁의 신분으로 왕을 배출한 후궁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하고 그 제사를 국가 의례로 공식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영조의 조치가 확대되어 탄생한 것이, 국왕의 생모가 된 후궁들의 사당을 모아놓은 칠궁이다.(p.28)” 그 칠궁 자리에 현재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가 사도세자인 것이 콤플렉스였던 정조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영조가 공인했다는 증거인 금등문서를 공개한 이후 사도세자의 신원작업을 본격화 한다. 그리고, 정조는 즉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자신을 두둔하는 시파와 반대하는 벽파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암살 시도도 두 번이나 겪었다. 조선의 왕 중, 암살이 정말로 시도된 경우는 정조가 유일하다.(p.78)” 평생을 따라다닌 위기의식 때문인지 정조가 만든 것이 화성과 장용영이다. 정조 암살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화성건설과 장용영 설치가 낳은 극적 긴장감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아버지 사도제자의 묘를 옮긴 정조는 현릉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니 , 옛날 요임금이 화() 지방을 돌 때 장수, , 다남 이 세 가지를 축원한 고사에 따라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겠다고 하면서 새로운 도시 이름을 화성으로 바꾼다. 이렇게 시작된 화성 건설은 1796832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정조는 다혈질이라 흥분을 잘했다.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에게 나는 태양증이 있어 부딪히면 바로 폭발한다.(p.68)”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훗날 아들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에게는 옳지 못한 짓을 보면 바로 화가 치밀어 얼굴과 말에 나타나며, 아무리 억누르려고 애를 써도 태양증 기질을 고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2장 개혁을 향한 의지 : 저항, 극복 그리고 미완

영조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법전 정리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속대전의 편찬이다. 법이 너무 많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관리가 제멋대로 법을 집행해 왔다. 힘없는 벡성들은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형벌을 받는데 권세가만 빠져나가니 이것이 내가 속대전을 편찬하는 이유다.(p.114)” 속대전경국대전이후 발효된 법을 새로 추가한 것이 아니다. 법과 수교의 충돌 사례, 다양한 조문의 문체, 형식부터 고친 것이었다. 이렇게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속대전에 나오기까지 260년 이상이 걸렸다. 그런데 속대전이 나온 뒤에는 바로 대전통편>, <대전회통같은 통일 법전이 줄줄이 나온다. <속대전이 법전의 체계를 통합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개정판을 내기가 쉬워진 것이다. 정조는 일성록을 작성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왕이 죽은 뒤 자료 편찬과 정리 작업이 시행되지만, “일성록은 가장 최신의 소식을 바로바로 편집하게 했다는 점이다.(p.201)” 신하들의 상소문, 임금의 포고문, 임금의 동정,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죄수의 심리, 진휼, 격쟁 등을 가능한 한 전문을 실어서 인과 관계를 알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국정 전반을 일성록검토만으로 파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3장 제도적 실험들 : 시대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

조선시대라고 해서 아무 범죄에나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사형에는 원칙이 있었다. 반역이나 존속상해와 같은 강상죄에나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p.183)” 살인죄에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내렸지만, 과실치사나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상당히 참작을 해서 형을 낮추었다. 단 이때의 반역에는 왕명을 어기거나 왕을 모욕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래도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조선 시대 사법의 전통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폭증하는 부와 생산의 확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조응해 욕망의 개방, 인간 본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다. 하지만 조선은 반대로 갔다. 사치와 욕망을 억제해서, 즉 분배를 조정해서 기존의 생산 수준에 맞추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조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치 금지령을 시행해 왔다는 점이다.(p.183)” 여기에 더 강한 금지령을 내리니 마른 걸레를 짜내는 식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부자, 형제, 사촌, 처가, 외가 쪽 친척들까지, 이해관계가 걸린 관직에 함께 재직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었다. 서로 피한다는 의미로 상피라고 했다.(p.268)” 과거 시험을 볼 때 아버지나 형이 시험관이면, 아들이나 동생이 그 시험에 응시생이 될 수 없는 식이었다. 이런 상피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사 명령을 내리면 인사 담당자가 탄핵을 당하고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4장 공감과 참여의 리더십 : 진심 그리고 한계

조선의 왕들은 거의 미행을 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비행을 부각하기 위해 신록에 몇 차례 등장하는 하지만, 왕이 시정 감찰을 위해 돌아다닌 기록은 적어도 정사에는 없다.(p.238)” 비밀리에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밤에 돌아다녀도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가로등도 없고 깜깜한 밤에 통금으로 인적 드문 길에서 어떻게 민생을 살피겠는가? 무엇보다도 일단 위험한 일이었다. 대신 낮에 궁 밖으로 행차를 했다. 영조와 정조는 부지런히 밖으로 나갔다. 영조는 총 909, 한 달에 1회 꼴, 정조는 총 607, 한 달에 2회 꼴로 궁 밖 행차를 했다. “화성 건설은 임금제 고용 노동을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시행한 최초의 공사였다. 그로 인해 공사비는 예상보다 3배 많이 지출 됐지만, 10년을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28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p.260)” 합리적인 경영의 힘이었다. 여기에는 임금만이 아니라 척서단(더위먹은 데 치료약) 제공과 같은 복지 정책도 큰 역할을 했다. 척서단은 실제로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인부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5장 변혁의 시대 리더의 권위 : 묘수 혹은 악수

영조시대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는 실제는 암행어사에 임명된 적이 없었으나, 일제 때 소설에서 암행어사로 등장하면서 어사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박문수는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잘 숙이지 않고 막말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는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려고 한다.’ 이 말은 정치적인 의도 없이 순수하고 공정하게 통치하려고 하니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박문수가 이 말을 듣더니 요순은 아무나 됩니까? 보통 사람은 요순의 절반만 가도 성공하는 겁니다.’ (p.305)”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조는 신하들의 이기주의, 당파성, 가족주의를 심하게 미워했지만, 정작 자신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위험을 경시했고, 자신을 과신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으로 편법적인 인사를 시행하는 이상을 나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정조 스스로는 자신의 방식이 본보기라고 간주했다.(p.281)”고 한다. 정조는 북학파를 등용해 규장각을 통한 청 문화의 수입과 문물의 개화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정조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보여준 참신한 문체를 불순한 잡문체라고 비난하고, 순수한 정통 고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문체반정을 주도했다.(p.328)”이렇게 최종적으로는 문체반정이라는 문예운동까지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297통을 보면 뜻밖의 반전이 보인다. 정조의 가감 없는 성력과 언행이 바로 그것이다.(p.68)” 정조의 최대 단점은 신하를 불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피해의식,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늘 조급함이나 망설임으로 나타났다. 일이 잘 안 되면 정조는 늘 주위의 부하를 탓했다. 이런 분위기의 조직은 결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고, 변화에도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하는 영조와 정조는 각각 비천한 후궁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영조와 정조에 대해 좀 더 입체적으로 알 수 있고 리더로서의 덕목을 갖추어 가기를 기대한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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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k******4 | 2023.01.28 리뷰제목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노혜경 뜨인들출판/2020/12.7   영조와 정조는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두 왕이다. 조손간인 이들은 조선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실정을 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두 왕의 리더로서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로 내 놓은 것이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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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노혜경

뜨인들출판/2020/12.7

 

영조와 정조는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두 왕이다. 조손간인 이들은 조선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실정을 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두 왕의 리더로서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로 내 놓은 것이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라는 책이다. 저자 노혜경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 <영조어제 해제 6>,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등이 있다.

 

리더가 비전을 품었다고 해서 곧장 성과가 발휘되는 건 아니다.(p.13)” 성공을 위해선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장애와 반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진정힌 리더라면 지혜와 용기, 끈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의 주인공 영조와 정조는 새로운 시대를 자각한 리더로 큰 업적을 쌓으며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었다.(p.14)하지만 실제로 행했던 국가 경영 방식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들에게도 그림자가 모두 있었다. 리더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 위기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에 기초해, 내가 해야 할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5가지 주제로 나누어 리더십을 설명한다, 각 주제마다 10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리더로서 두 왕은 어떤 판단과 결정으로 시대를 이끌었는지 분석하고 이 분석 속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성공한 요소와 실패한 요소로 나누어 기술한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리더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조직을 이끌어가야 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장 조선 르네상스 군주의 초상 : 영조와 정조

영조는 미천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후궁의 신분으로 왕을 배출한 후궁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하고 그 제사를 국가 의례로 공식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영조의 조치가 확대되어 탄생한 것이, 국왕의 생모가 된 후궁들의 사당을 모아놓은 칠궁이다.(p.28)” 그 칠궁 자리에 현재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가 사도세자인 것이 콤플렉스였던 정조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영조가 공인했다는 증거인 금등문서를 공개한 이후 사도세자의 신원작업을 본격화 한다. 그리고, 정조는 즉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자신을 두둔하는 시파와 반대하는 벽파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암살 시도도 두 번이나 겪었다. 조선의 왕 중, 암살이 정말로 시도된 경우는 정조가 유일하다.(p.78)” 평생을 따라다닌 위기의식 때문인지 정조가 만든 것이 화성과 장용영이다. 정조 암살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화성건설과 장용영 설치가 낳은 극적 긴장감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아버지 사도제자의 묘를 옮긴 정조는 현릉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니 , 옛날 요임금이 화() 지방을 돌 때 장수, , 다남 이 세 가지를 축원한 고사에 따라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겠다고 하면서 새로운 도시 이름을 화성으로 바꾼다. 이렇게 시작된 화성 건설은 1796832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정조는 다혈질이라 흥분을 잘했다.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에게 나는 태양증이 있어 부딪히면 바로 폭발한다.(p.68)”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훗날 아들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에게는 옳지 못한 짓을 보면 바로 화가 치밀어 얼굴과 말에 나타나며, 아무리 억누르려고 애를 써도 태양증 기질을 고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2장 개혁을 향한 의지 : 저항, 극복 그리고 미완

영조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법전 정리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속대전의 편찬이다. 법이 너무 많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관리가 제멋대로 법을 집행해 왔다. 힘없는 벡성들은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형벌을 받는데 권세가만 빠져나가니 이것이 내가 속대전을 편찬하는 이유다.(p.114)” 속대전경국대전이후 발효된 법을 새로 추가한 것이 아니다. 법과 수교의 충돌 사례, 다양한 조문의 문체, 형식부터 고친 것이었다. 이렇게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속대전에 나오기까지 260년 이상이 걸렸다. 그런데 속대전이 나온 뒤에는 바로 대전통편>, <대전회통같은 통일 법전이 줄줄이 나온다. <속대전이 법전의 체계를 통합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개정판을 내기가 쉬워진 것이다. 정조는 일성록을 작성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왕이 죽은 뒤 자료 편찬과 정리 작업이 시행되지만, “일성록은 가장 최신의 소식을 바로바로 편집하게 했다는 점이다.(p.201)” 신하들의 상소문, 임금의 포고문, 임금의 동정,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죄수의 심리, 진휼, 격쟁 등을 가능한 한 전문을 실어서 인과 관계를 알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국정 전반을 일성록검토만으로 파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3장 제도적 실험들 : 시대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

조선시대라고 해서 아무 범죄에나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사형에는 원칙이 있었다. 반역이나 존속상해와 같은 강상죄에나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p.183)” 살인죄에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내렸지만, 과실치사나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상당히 참작을 해서 형을 낮추었다. 단 이때의 반역에는 왕명을 어기거나 왕을 모욕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래도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조선 시대 사법의 전통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폭증하는 부와 생산의 확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조응해 욕망의 개방, 인간 본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다. 하지만 조선은 반대로 갔다. 사치와 욕망을 억제해서, 즉 분배를 조정해서 기존의 생산 수준에 맞추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조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치 금지령을 시행해 왔다는 점이다.(p.183)” 여기에 더 강한 금지령을 내리니 마른 걸레를 짜내는 식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부자, 형제, 사촌, 처가, 외가 쪽 친척들까지, 이해관계가 걸린 관직에 함께 재직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었다. 서로 피한다는 의미로 상피라고 했다.(p.268)” 과거 시험을 볼 때 아버지나 형이 시험관이면, 아들이나 동생이 그 시험에 응시생이 될 수 없는 식이었다. 이런 상피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사 명령을 내리면 인사 담당자가 탄핵을 당하고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4장 공감과 참여의 리더십 : 진심 그리고 한계

조선의 왕들은 거의 미행을 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비행을 부각하기 위해 신록에 몇 차례 등장하는 하지만, 왕이 시정 감찰을 위해 돌아다닌 기록은 적어도 정사에는 없다.(p.238)” 비밀리에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밤에 돌아다녀도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가로등도 없고 깜깜한 밤에 통금으로 인적 드문 길에서 어떻게 민생을 살피겠는가? 무엇보다도 일단 위험한 일이었다. 대신 낮에 궁 밖으로 행차를 했다. 영조와 정조는 부지런히 밖으로 나갔다. 영조는 총 909, 한 달에 1회 꼴, 정조는 총 607, 한 달에 2회 꼴로 궁 밖 행차를 했다. “화성 건설은 임금제 고용 노동을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시행한 최초의 공사였다. 그로 인해 공사비는 예상보다 3배 많이 지출 됐지만, 10년을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28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p.260)” 합리적인 경영의 힘이었다. 여기에는 임금만이 아니라 척서단(더위먹은 데 치료약) 제공과 같은 복지 정책도 큰 역할을 했다. 척서단은 실제로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인부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5장 변혁의 시대 리더의 권위 : 묘수 혹은 악수

영조시대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는 실제는 암행어사에 임명된 적이 없었으나, 일제 때 소설에서 암행어사로 등장하면서 어사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박문수는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잘 숙이지 않고 막말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는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려고 한다.’ 이 말은 정치적인 의도 없이 순수하고 공정하게 통치하려고 하니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박문수가 이 말을 듣더니 요순은 아무나 됩니까? 보통 사람은 요순의 절반만 가도 성공하는 겁니다.’ (p.305)”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조는 신하들의 이기주의, 당파성, 가족주의를 심하게 미워했지만, 정작 자신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위험을 경시했고, 자신을 과신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으로 편법적인 인사를 시행하는 이상을 나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정조 스스로는 자신의 방식이 본보기라고 간주했다.(p.281)”고 한다. 정조는 북학파를 등용해 규장각을 통한 청 문화의 수입과 문물의 개화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정조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보여준 참신한 문체를 불순한 잡문체라고 비난하고, 순수한 정통 고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문체반정을 주도했다.(p.328)”이렇게 최종적으로는 문체반정이라는 문예운동까지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297통을 보면 뜻밖의 반전이 보인다. 정조의 가감 없는 성력과 언행이 바로 그것이다.(p.68)” 정조의 최대 단점은 신하를 불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피해의식,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늘 조급함이나 망설임으로 나타났다. 일이 잘 안 되면 정조는 늘 주위의 부하를 탓했다. 이런 분위기의 조직은 결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고, 변화에도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하는 영조와 정조는 각각 비천한 후궁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영조와 정조에 대해 좀 더 입체적으로 알 수 있고 리더로서의 덕목을 갖추어 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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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평점8점 | YES마니아 : 골드 이달의 사락 s*****7 | 2020.12.20 리뷰제목
요즘처럼 리더의 역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초대 대통령 부터 지금 까지 정말 존경할 만한 리더가 있었나? 리더에게 존경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왕이라는 시스템이었을 때에는 어떨까?가장 많은 업적과 리더쉽을 발휘했다고 하는 영,정조는 어떤 리더였을까?  [두 리더] 책에서는 영조와 정조의 사상,개혁,인사, 업적 등을 케이스별로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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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처럼 리더의 역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초대 대통령 부터 지금 까지 정말 존경할 만한 리더가 있었나?

리더에게 존경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왕이라는 시스템이었을 때에는 어떨까?

가장 많은 업적과 리더쉽을 발휘했다고 하는 영,정조는 어떤 리더였을까?

 

 [두 리더] 책에서는 영조와 정조의 사상,개혁,인사, 업적 등을 케이스별로 쉽게 풀어 이야기처럼 해주고 그 케이스를 현실 정치 혹은 경영과 빗대어서 작가의 입장에서 색다르게 적용 해설하고있다.

 

영조는 말년에 자신이 일평생 좌우명으로 삼아온 '뜻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일을 이룬다(有志者事竟成)'라는 한나라 광무제의 명언을 정조에게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명언을 어릴 때부터 마음에 새겨 노력한 결과, 균역법과 청계천 공사, 여염집 탈취 금지령 등 여러 일들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관계지만 왕으로서 재왕수업을 하는 사부로서  영조는 마냥 자애롭지 만은 않았다.

정조의 아비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영조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영조는 채제공을 통해 금등문서를 쓰게 하고 정조는 공재하면서 그 죽음에 대한 후회를 내포했다.

 

이 책은 대부분의 비중이 영조에 좀더 치중되 있는 경향이 있다.

영조와 정조의 업적들 중에 좋게 평가 받고 있는 일들도 날카롭게 현실에 적용해서 적법성과 타당성을 면밀하게 파헤쳐 현실에 수용할 만한 것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당돌벌이(黨同伐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당이 같으면 동조하고, 당이 다르면 공격한다.'

숙종 때 절정이었던 당쟁정치가 조선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이 당돌벌이가 지금도 판을 치고 있으니 참 안타깝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는 현실이라니 말이다.

 

영정조 시대의 빛도 있지만 그림자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숙제였던 것 같다.

 

 화성을 둘러보며 너무 흥분한 정조는 축성론에 대한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점에 대해 '좋은 군주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얼굴에 쉽게 드러내서 는 안 된다'는 한비자의 구절을 통해 감정 통제의 중요성을 말한다.

속대전을 만든 영조에 대해서는 핵폭탄이 될 수 있는 문제를 그냥 방치하지 않고 귀찮은 문제에 몸소 뛰어들어 해결하려는 리더쉽을 칭찬했다.

 

 워낙 드라마에서 정조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완벽주의자라고 만 생각했는데 , 읽다보니 역사책에 나왔던 치적들이 후하게 평가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정조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현실에 적용해서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내서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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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평점10점 | p*********h | 2021.01.02 리뷰제목
영조와 정조 시대의 특징은 불안한 정치적·사회적 상황 가운데서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고서 변혁을 꿈꿨다는 것이다. 영조는 탕평책 하나만으로도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다. 또한 정조는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왕이 지닌 권력을 통해 하나하나 다 손수 바꾸려고 했다는 점에서 조선판 철인정치의 모범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러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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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 시대의 특징은 불안한 정치적·사회적 상황 가운데서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고서 변혁을 꿈꿨다는 것이다. 영조는 탕평책 하나만으로도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다. 또한 정조는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왕이 지닌 권력을 통해 하나하나 다 손수 바꾸려고 했다는 점에서 조선판 철인정치의 모범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은 언제나 양면성을 갖는 법, 이 책은 조선 역사에서 뛰어난 군주이자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영조와 정조의 양면성을 조명하면서 오늘날 리더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표지나 제목은 영조나 정조를 부각시키는 것 같지만, 이 책의 핵심은 리더십이란 무엇인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조나 정조 모두 갖은 위기와 어려움을 뚫고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되고 나서도 계속 불안한 정치적 입지 때문에 심리적으로 평안한 날이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꿈꾸고 계획했던 일, 해야할 일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영조의 사례를 통해 지도자의 계보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교육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글도 흥미롭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최후와 관련하여 영조의 일그러진 교육관과 고집이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또 세손인 훗날의 정조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아들에게 행했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준 점에서 영조로부터 입체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정조는 최근 미디어에서는 세종이나 성종과 함께 훌륭한 군주로서 많이 비춰지는데, 이 책에서는 그의 알려지지 않은 자기과시적 성향이나 별난 성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부분이 눈에 띈다. 뛰어난 학식과 능력으로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런 개인적 성향이 어느 정도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였다.

 

이 책은 영조와 정조 모두 성장 배경에서 오는 핸디캡과 콤플렉스, 약점을 극복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력으로 리더십이라는 차원에서 오늘날 많은 교훈을 주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신하들과의 관계에서 설득이나, 화합, 조화의 차원에서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에 인간적인 면모를 깊이 느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네이버 문화충전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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