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출판 된 이 책을 40년 기념판 19쇄로 읽었다. 『코스모스』와 이 책을 연이어 읽은 소감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대폭발이 우주를 만들었다. 우주는 지구를 만들었다. 지구는 인간을 만들었다. 그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유전자다." 이과 지식이 거의 없는 내가 살기 위해(^^)과학 도서를 찾아 읽다가 이 분야에 약간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전문 분야의 대중서가 필요한 이유는 동시대인들이 함께 진보하자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두 책을 읽고 난 지금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찰나의 삶을 살고 있는 인류가 서로를 미워하고 다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안타까움이다.
이 책의 핵심 단어는 유전자다. 유전자의 목적은 오직 하나,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이타적일 때 살아남을 확률보다 이기적일 때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크다.
초판 서문에서 저자는 생물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을 고려해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저자의 바람 이상으로 이 책이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구성은 전체 13장으로 되어있다. 처음 출간 되었을 땐 11장이었으나 개정하면서 두 개의 장을 추가했다고 한다. 10장까지 유전자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면 11장은 저자 자신이 만든 신조어 밈(문화의 유전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으로 살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던 사는 이유는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다. 모든 생명은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단백질 합성을 제어하는 것 정도기 때문에 자신을 대신해 업무를 처리할 생존 기계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이 책의 제목만 본 독자들이 오해하기 쉬운 내용 중의 하나는 유전자와 개체의 동일성이다. 저자는 유전자의 이기성과 개체의 이기성은 다르다고 설명한다.'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이것을 위해 개체는 이타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부모가 새끼들에게 이타성을 발휘하는 것을 들고 있다. 우리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동물의 행동들도 이기적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는 답을 정해놓고 보면 해결이 된다. 혈연자에 대한 이타성, 근친상간을 피하는 것, 집단생활을 하는 것 등을 우리는 개체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이 모든 일들이 유전자의 지시를 충실히 지키고자하는 생존 기계의 충성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심 있게 본 것은 '어떤 암컷이 일꾼이 되느냐 여왕이 되느냐는 유전자가 아닌 어떻게 자랐느냐에 따라 결정 된다'는 내용이다. 또 평소 알고 있는 여왕이나 일꾼의 지위를 다르게 해석한 부분도 재미있었다. 자신이 직접 새끼를 낳아 유전자를 퍼트리는 것보다 대리인을 시켜 유전자를 퍼트리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경우 일꾼들은 여왕개미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것이지, 노예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
11장은 밈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인류의 문화 역시 유전자처럼 자신을 복제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문화적 전달은 유전자 전달과 비슷하고, 유전자가 진화하는 것 이상으로 문화도 진화한다. 유전자가 자신을 복제한다면 문화는 모방을 통해 확산된다. 오늘날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밈이기도 하다. 세계인이 갖고 있는 화장실이 숫자보다 휴대폰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이 이것을 증명한다. 세계인은 sns를 통해 서로를 공유,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유전자가 존재하는 이유가 불멸에 있다면 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생존 기계)는 잠시 왔다 사라지는 운명이지만 유전자와 밈은 불멸을 지향한다.
12장은 마음씨 좋아도 1등 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타적인 사람은 이타성으로 인해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라고 알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죄수의 딜레마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소개하면서 어떻게 사는 삶이 가장 좋은 것이지 살펴보고 있다. 독자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자신의 성향을 체크해볼 수도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반복할수록 양상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게임이 복잡 할수록 좋은 몫을 차지한 쪽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덜 교묘해 보이는 전략'을 구사하는 쪽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승리할 수 있는 비결로 '마음씨 좋음과 관대' 두 가지를 들었는데, 얼핏 보면 손해 볼 것 같지만 배려와 관대야말로 잘 사는 비결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배신하는 쪽은 처음엔 번영을 이루며 사는 듯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는 대목에서 이웃의 어떤 나라가 떠올랐다. 선한 행동에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감사는커녕 오히려 바보라는 놀림을 받는다면 얼마나 자괴감이 들것인가. 그러나 증명하는 학문인 과학에서 선하게 사는 행동이 결국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나이진 것이다. 저자는 흡혈박쥐의 관찰을 통해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이 될 수 있다는 따뜻한 생각을 퍼트릴 수 있'다는 말로 인류의 선함을 긍정했다.
마지막 13장은 자신의 다른 저서 인 『확장된 표현형』을 홍보하는 내용으로 읽었다.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이 쓴 최고의 저서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표현형이라는 용어는 하나의 유전자가 신체로 발현된 것'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선 꼭 알아야 될 용어가 몇 개 있었다. '감수 분열'은 '염색체의 수가 반으로 되어 난세포와 정세포를 생성하는 특별한 종류의 세포 분열'로 동전 던지기처럼 공정한 것이라고 한다. 't유전자'는 어떤 유전자가 같은 생물체를 구성하는 다른 유전자를 속이는 것,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유전자'라고 한다. 확장된 표현형에 사용된 사례는 날도래 애벌레의 집, 새 집, 비버 댐 등으로 유전자는 자신이 들어있는 개체를 통과해 바깥 세상에 있는 대상까지 조종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생물이기도 하고 종이 다른 생물이기도 하고 아주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기도 한다.
본문 바로 뒤에는 '40주년 기념판 에필로그'가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만약 이 책의 제목이 '협력적'이나' '불멸'이었다면 오해나 비난에서 덜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관심도 덜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책에서 제목의 중요성이 반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연도를 따지는 대목도 흥미롭다. 우주에서 유일한 집인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 살든지 서로에게 혈연관계가 있다고 한다. 내 가족, 내 사회, 내 나라만 고집하는 것은 얼마나 편협된 사고인가.
나는 이 책이 『코스모스』보다 덜 어려웠는데 책 뒤에 붙어있는 '보주'덕이 컸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 수정을 하기 보다 보충 주석을 다는 쪽을 선택했다. 무려 100쪽에 달하는 주석을 꼼꼼하게 읽다보니 과학에 문외한인 입장에서 내용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책이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는 일은 저자에게 기쁨일 것이다. 덕분에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보편적 내용을 담은 과학책을 40년 후에 읽어도 그 내용에 신선함을 느낀 나 역시 독서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맹신이라는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하여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371)
맹신의 밈은 특유의 잔인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번식해 간다. 애국적 맹신이든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모두 마찬가지다.(374)
우리가 비록 어두운 쪽을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지명,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 실험하는 능력이 맹목적인 자가 복제자들의 이기성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당장 눈앞의 이기적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기적 이익을 따질 정도의 지적능력은 있다.(377)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가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378)
확장된 표현형의 세계에서는 동물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그 유전자에게 이익을 주는가를 묻지 말고 그 행동이 이익을 주는 것은 누구의 유전자인가를 질문해야 한다.(461)
자기 복제자는 자기 고유의 성질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상에 초래하는 결과 덕분에 살아남는다. (480)
우주의 어느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한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481)
“나는 바깥이 22℃나 되는 날씨에도 춥다고 징징대는 너를 사랑해.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데도 한 시간씩이나 걸리는 너를 사랑해. 나를 얼간이처럼 바라볼 때 콧등에 작은 주름이 생기는 너를 사랑해. 하루 종일 너와 지내고 나서도 내 옷에 남은 네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너를 사랑해.”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대사이다. 나는 왜 그를 사랑하게 됐을까? 혹은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할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이상하게 그 사람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짜증 날 정도로 자꾸 생각난다. 내 감정은 분명 내 것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과연 내 선택은 내 것일까
<이기적 유전자>는 말한다. 사랑은 유전자가 만들어낸 도파민 때문이라고. 유전자의 번식을 위해 유전자가 프로그램해 놓은 데로 행동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명체는 유전자가 만든 AI라는 것. 즉, 우리가 다른 누군가와 자고 싶은 이유는, 유전자의 조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에 출판한 책이다. 그의 이론이 완전히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다윈의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다만 다윈은 종이나 개체를 중심으로 설명했다면, 도킨스는 유전자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킨스는 기존의 여러 이론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끄집어냈다. 바로, 유전자의 이기성에 대해. 그리고 그 이론은 먹기 좋은 케이크처럼 우리 앞에 놓인다. 어려운 이론의 패턴을 찾아 대중에게 먹기 좋은 케이크로 내놓는 일, 도킨스가 위대한 이유이다.
도킨스는 어떤 책이 잘 팔리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 유전자에 '이기적'을 붙일 수 있는 창조적 대담함. 그의 비유와 문장력은 놀라울 만큼 쉽고 재밌고 매력적이다. 도킨스는 유전자의 이기성을 무찌르고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데 성공했다. 과학책으로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45년이 넘도록 읽히고 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유시민이나 진중권이 보이기도 한다. '집단 선택 이론'과 같은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론에 대해 그야말로 신나게 밟아준다. 그리고 현란한 문장력으로 '종'이 아닌 '개체(또는 유전자)' 선택을 강조한다. 그가 조금만 젊었거나, 혹은 당시 SNS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 SNS 파이터가 됐을 것이다.
태초에 유전자는 아무런 보호막 없이 원시 스푸를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유전자 수가 많아지면서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백질 벽을 만들었다. 최초의 세포다. 세포는 생물의 몸속에서 보호를 받으며, 각자 환경에 맞는 진화를 했다.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유전자는 자신을 보호할 생존 기계에 탑승해 비교적 안전하게 번식한다.
도킨스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감정과 행동은 유전자의 조정의 결과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허무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책이 철학서가 아닌 과학책이라는 점이다. 과학은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목적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인간이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당연성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한다.
유전자의 명령은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에게 그렇다. 독신이나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선언 등이 바로 그 증거이다. 도킨스는 그런 인간의 문화는 널리 퍼지고 전이된다는 점에서 유전자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문화를 '밈'이라 명명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 행동에 대해 '유전자'라는 단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한다. 세계를 하나의 패턴으로 설명하는 이론은 실로 매력적이다. 그것은 쉽고, 분명해 보이며, 그럴싸하다. 마치 '우리의 일자리가 없는 것은 유색 인종 때문이야'라고 해버리는 것과 같다. <성경>은 '신의 섭리'로 퉁치면서 모든 인류의 문제를 해결했고, <자본론>은 전 세계 노동자들을 단결시켰다.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역사서인 <총, 균, 쇠>나 <사피엔스>도 하나의 패턴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서술 방식으로 쓰였다.
세계를 하나의 패턴으로 설명하는 명쾌함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손으로 움켜쥐면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도 많은 법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신이 아니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논리는 자칫 자기 파괴, 혹은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꼼꼼히 읽었다면 마치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뉘앙스는 도킨스 이론의 본질과 아주 멀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영리한 도킨스는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독자를 자극하고 어느정도는 고의로 논란을 조장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니까 마치 바람둥이에게 성수를 뿌리고 면죄부를 주는 듯하지만, 그건 그저 떡밥에 불과하다.
<이기적 유전자>가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인생의 허무로 치닫게 하는 이론'이라는 기존의 평가는 무척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내린 결론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파괴적 행위에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이해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대비할 수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인간에게 있어, 유전자는 나의 의지를 조정하는 신이 아닌 수많은 환경 중에 하나이다.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경쟁해야만 하는 환경.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고 해서, 인간이 만든 사회의 법칙까지 무너뜨려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폭력 본성을 가졌다고 폭력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이 책을 읽기 전이나 후나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힘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위험으로부터 대비할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다. 유전자가 내 첫사랑의 낭만까지 뺏어가는 것은 아니니까.
<이기적 유전자>는 개체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신비한 동물 세계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여왕벌의 알 중 미수정 란은 수컷이 된다든지, 꿀단지개미는 뱃속에 잔뜩 꿀을 욱여넣어 평생 천장에 매달려 다른 일개미들의 먹이 저장소로 일생을 살아간다든지,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든지, 바다코끼리는 겨우 4%의 수컷만이 교미한다든지 하는 수많은 동물 행동에 대한 신비하고 재밌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현미경으로 동물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재밌다. 물론 바다코끼리로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안도감은 덤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생존 기계를 타고 다니며 자신의 종족을 번식하고 있지만, 유독 인간만은 유전자의 컨트롤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우리가 우주의 신비를 알아가는 것만큼 우리 자신을 알아간다는 게 꼭 허무를 경험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삶의 깊은 통찰을 보여주기도 한다. 게다가 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가끔 힐끔거리는 가에 대한 이해를 높임과 동시에, 그런 행동에는 여전히 도덕적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훈련받아 온 것에 대한 당연함 같은 것도 함께 생각하게 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본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 진화는 이기적이라는 다윈의 정의를 따라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과 주제를 정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설명을 들으며 수긍하려고 해도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의문이 거듭 솟아났다.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이기적 선택을 하며 유전자 분열과 생식을 통한 유전자의 계승을 위해 이기적 선택은 이어지며 세포 내에서의 협력도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판단에 의해서이며 부모, 형제, 자녀를 위한 희생도 유전자 계승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도킨스의 해석은 일견 일리 있어 보이기도 했으나 완전히 납득이나 수긍이 가는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유전자의 이기적 선택이 절대적이었다면 지구 내 모든 생명체가 바닷가재처럼 반영구적으로 탈피만 하며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영생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보다 나은 진화를 위해 자기 존재만을 지속하는 게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진화하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누가 답변한다 해도 그렇다면 왜 자기 존재 내에서는 영생하면서 유전자를 변이시켜가며 진화 가능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는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기적이고자만 한다면 영생과 유전자 변이가 자유로운 한 생에서의 무한 진화가 가능한 생명체로의 진화가 가장 타당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인다.
이기적이라기 보다는 유전자도 세포도 생명체도 집단을 형성하며 협력이 자신에게도 유리하단 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기성 이상의 원칙을 수립하고 지켜나가고 있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 인체 내의 장기와 같은 기관들 그리고 간세포, 심장세포, 골세포, 생식세포 같은 세포 단위도 자기 존속만 절대시하며 무한 증식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는 편이 자기 존속에 유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자기 색깔 곧 자기 경계를 지키며 보다 큰 자신에게 공헌하는 것이 유리를 떠나 공의(공공이 따를 만한 정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체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기도 한다. 늑대도 마멋도 작은 새들도, 개미나 벌도 그렇다. 물론 이 집단들에서는 도킨스의 말대로 유전자의 전승에 있어 이기적이라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기르는 가축인 개의 경우에서 보듯 자기 유전자와 상관이 없는 주인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개들도 있으며 인간의 경우에는 가족이나 민족만이 아닌 국가, 이데올로기 같은 신념, 더 나아가 전혀 다른 민족의 개인을 위해 인류애적 차원이나 생명 존중 사상을 따르며 희생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생물학적인 이기성을 찾아볼 수 없다. 세포 역시도 수정되지 않은 난자와 정자가 유전자 계승을 위해 자기희생을 따른다는 논리도 가능하겠으나 이건 해석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보다 더 큰 순리와 거대한 원리에 순응하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논리에 따라 사회화를 한다거나 공공의 합의를 도출할 때 대중을 설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의 논리에 따라 자기에게도 이로우니 사회에 순응하라거나 대세를 따르라고 강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인간에게 더 큰 의미를 가져올 수 있는 해석이라면 유전자도 세포도 생명체도 결국에는 순리에 따라 자기의 색깔을 지키며 타자와 교류하고 때론 타자의 배려와 때론 타자에 대한 배려로 공존공영한다는 관점이 더 나은 것이지 않은가 싶다. 무한 이기주의는 암세포가 보여주는 전형성이다. 생명체를 유지 시켜주는 유전자와 세포는 이기성만이 아니라 더 커다란 자신을 위해 자기 경계를 지키며 그 경계 속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존재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논리가 유전자와 세포계에서 마저 진리라는 말이다. 각자가 자기 경계에서 자기 색깔을 지키면서 대를 위해 헌신하며 지속되는 것이 인간이 만든 사회만이 아니라 유전자이고 세포이고 생명체이고 자연계이고 세계이고 우주, 모든 차원의 대의라는 말이다. 이기성만을 근간이라고 여기는 서양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문화가 자기 나름으로 대중 포용적 타협의 가능성을 이론으로 풀어낸 것이 [이기적 유전자]일 수도 있겠으나 우주는 그보다 더 큰 순리가 근간이 아닌가 싶다.
짧은 만 12년 인생 동안 이렇게 인상이 깊었던 책은 처음이었다. 이걸 보고 또 하나의 헛소리를 건너뛰시는 분들께는 난 지금 만 12세라는것이 사실임을 밝힌다.
태어나서 12년동안 경험하고 배우는 동안 그 바탕인 세상에게서 세뇌당한(세뇌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은 없어야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가치관이 모두 어느 정도 만큼 이상은 세뇌당한것이 사실이기 때문에)도덕적 가치관에 따라서 처음에는 이 책의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공격적일 수 있는 표현들에 대해서 반발심이 든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에 대해서 자신의 생존과 유전자 복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나.. 하지만 책에서 그런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모두가 전적으로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들과 정언적으로 일치한다. 정확히 말해서 내가 은연 중에 품고 있던 유전자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읽는 동안 나에게 평생 이렇게 명확한 답을 준 작가는 없다 싶었다.
앞서 말했던 내 도덕적 반발심의 예를 다시 보자. 작가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에 대해서 자신의 생존과 유전자 복제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다. 즉, 작가가 예외로 둔 특별한 개체 몇 개를 제외하고는 이타적인 것은 결국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에 '불과하다는 것' 인데, 나는 '불과'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나 된다고 생각하지. 우리는 우리가 유전자에 복종하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전자에 복종하는 기계는 맞지만, 예외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우리는 창조자에게 무기를 들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