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갓 시작한 우리는 정말 주변의 사랑을 모두 잃은 채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뭐니 뭐니 해도 정치권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잃고 극단적인 편가름과 서로에 대한 증오만 키우는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국민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대 '자유주의 세력과 동료 시민'으로 양분하여 내 편이 아닌 자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계나 예술계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박완서 작가는 어쩌면 사랑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스스로를 사랑의 장으로 이끌었던 21세기의 마지막 작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증오와 파멸뿐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서막은 그렇게 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제 현실이 아닌 교과서에서나 배울 수 있을 듯합니다. 단지 한 권의 책을 통하여 말입니다.
내가 사는 도서관에는 박완서 작가 문학관이 별도로 있어 둘러본 적이 있다. 많은 책을 냈음에도 난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얼핏 도서관에서 에세이를 꺼내 읽으면 기존에 읽었던 에세이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꾸밈없는 문장 이면서도 그 안에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느낌이 풍겨나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6.25를 겪고 오빠를 잃고 그리고 아들을 잃었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멍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를 읽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고향이 개성에서 더 들어가는 산골마을로 산봉우리로 마을이 하나씩 있던 작은 마을... 그러나, 그 누구도 그곳을 열악하다고 하지 않았다. 소신껏 자신들의 몫을 하고 나누어 주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마을이다. 책에서 묘사된 고향의 모습은 몇 페이지를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리워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후 고향을 떠나 인왕산 근처에 터를 잡았는데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이니 그 시절 여인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산다는 건 큰 용기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친모는 그렇게 했고 자녀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쏟았다. 비록, 전쟁으로 대학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말이다. 가정주부가 되고 나서 우연히 기고한 작품이 상을 받으면서 시작된 작가의 길... 그러나 왠지 푸근한 것은 살아왔던 그 삶이 누구에게나 공감이 되었기 때문일까? 지금은 대중교통이나 기차가 잘 발달되어 어디든 쉽게 여행을 가지만 80년 대만 해도 이동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인과 같이 새마을호를 타고 떠난 여행 이야기는 고되면서도 그 속에서 즐거움을 볼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 생각 역시 그 시대를 따라간다 단어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듯이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때면 지금과 전혀 다른 배경이 생소하면서도 더 인간적인 면을 느낄 때도 있었다. 저자는 여행 외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되면 굳이 지인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조용히 다녀온다고 한다. 왜 그럴까? 보통 그 지역의 지인에게 부탁하곤 하는 데 오히려 자신 정성스럽게 대해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불편해도 숙박하는 게 편한다는 건 누구에게도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혼자만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동안 답답해서 어디로 갈지 헤맬 때 이해인 수녀님을 알게 되어 수녀원에 묵었던 이야기 등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삶이 이토록 공감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동시에 간접적으로 타인의 삶을 보면서 내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을 하게 된 에세이였다.
40세란 좀 늦은 나이에 시작한 소설 쓰기도 6ㆍ25의 악몽을
배설해 내려는 몸부림과 무관하지 않다.
-본문 중-
책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맺혔다. 엄마를 보는 듯이 책을 손에 곱게 들고 살포시 넘겨 본다. 가장 뒤에 있는 사진부터 찬찬히 본다. 작가님이 쓰시던 소품부터 친필편지까지. 나도 엄마의 메모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 다시 써 줄 사람이 없기에 그냥 막 휘갈긴 낙서라도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박완서 작가님은 엄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작가였다. 엄마가 떠나고 한동안 작가님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이제쯤이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먹먹함으로 읽어간다. 작가님의 위트있는 글솜씨가 사람의 마음을 담담하게 만들어 준다.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평안함을 주는 글이다.
당신이 살아온 일들을 생각을 적었기에 그때 당시의 생활상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나에게는 향수를 주는 그런 글들이고 젊은 세대들이 본다면 신선함미저 느낄 그런 글들이다. 미도파와 시대백화점(175p)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그랬다. 미도파라는 말을 요즘 사람들이 알까. 미도파가 알아주는 백화점이었는데. 하지만 그런 나도 시대백화점은 처음 들어서 나 또한 낯섦도 존재했다. 그런 낯섦음은 미팅문화에서도 드러났는데 작가가 적어 놓은 춘향이와 이도령 이수일과 심순애(207p)를 써놓고 짝을 맞추는 방법은 진짜 옛날 영화에서나 보았을뿐 해보지 못한 방법이라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풍기면서도 조금은 유치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 했던 일들은 시간이 지나가면 뭐든 유치하기 마련이 아닌가.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그 프로그램이 촬영되는 장소의 시장이 나온 걸 봤다. 무슨 시장님 행차하듯이 그렇게 온 것이 아니라 수행원 하나 없이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왔더라. 한 도시의 시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와서 혼자 호빵을 먹으면서 시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합석을 하고 그러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전 시장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부인과 함께 와서는 소탈하니 음식을 먹고 지역 사람들와 이야기를 하고. 정치인들이라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좋다. 자기네가 뭐라도 된냥 뻐기고 다니는 사람들 말고 말이다. 인도 수상이 마차를 타고 귀가하는 모습(264p)을 언급한 글을 보면서 작가님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정치인을 이야기했고 그 글을 보면서 나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던 걸 떠올렸다.
전반적으로 에세이라는 장르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솔직히 드러낸다. 그래서 글을 통해서 작가라는 사람을 조금은 더 인간적으로 접할 수가 있다. 드러나는 것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글에서는 조곤조곤 조용함을 풍기지만 실제 성격은 우악스럽다거나 화통한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님은 왠지 모르게 글과 똑닮으셨을 것 같다. 사회적인 비판도 논리정연하게 따박따박 증거를 들어가면서 말씀하셨을 것 같고 그런 것은 글에서도 드러나있다. 작가님의 책을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읽어와서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내용들도 더러 있다. 그래서 나는 작가님께 이 책을 통해서 또 한발짝 더 다가갔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