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몇 달 전에 구입한 책이다. 그동안 독서가 부진하기도 했지만, 읽어야 할 서평단 책이 밀려 있으므로 이 책을 펼칠 여유가 없었다. 지난달에 독서에 박차를 가한 결과 모처럼 밀린 책이 없었기에 이 책을 펼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드물게 부담 없이 읽었던 이 책에서 느낀 점을 몇 가지만 적어 보겠다.
첫째, 이 책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아쉬웠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널리 알려진 책이 아니던가? 1980년대 초에 번역된 이래 한 세대가 지났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고, 각급학교의 권장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제야 만난 것일까? 나의 독서에 대한 욕구는 1970년대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 얽매이다 보니 책을 펼칠 여유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1980년대 이후에 발간된 책에 대한 정보가 약했다. 2000년대 이후 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1980년대에 나온 책은 내게 있어서 고전도 아니고 신간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그저 생각만 하다가 인연을 맺지 못했던 것이다.
주인공 제제는 6살의 소년이다. 작가는 48세 때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나는 작가의 나이보다도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았다. 제제와의 호흡은 물론이고, 작가와 소통하기에도 너무 늦은 나이가 된 것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30년 전에, 아니 3년 전에라도 이 책을 만났다면 나는 더 큰 감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다.
둘째, 평범한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가난하고 아이 많은 집의 다섯 살짜리 아이인 제제의 성장소설이다. 가족이나 이웃과의 갈등과 사랑,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던 시절의 추억담 정도이다. 남녀간의 격렬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각한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제제가 느낀 가장 큰 사랑의 대상은 뽀르뚜까이며, 갈등의 대상은 아버지와의 관계일 것이다.
뽀르뚜까는 이웃에 홀로 살고 있는 남자이다. 제제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더 많다고 했으니 50대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다섯 살 꼬마와 50대 내외의 어른 사이의 사랑이나 우정이 크다면 얼마나 크겠는가?
제제와 가장 큰 갈등을 보인 아버지도 못된 아빠는 아니었다. 실직으로 인한 가난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은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제제에 대한 폭력도 오해로 인한 것이었고, 곧 후회를 하곤 한다.
즉 이 작품 속의 사랑이나 갈등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놀라운 관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는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평범함 속에서 큰 사랑과 갈등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한 작가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셋째, 작품속에서 한국적인 정서의 공통점을 느꼈다. 제제네 집은 3남 3녀의 대가족이다. 그중에 딸 하나는 남의 집에 양녀로 보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어머니와 누나들은 갖가지 일을 해야 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 사회가 그렇게 살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너나없이 가난의 질곡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아들 선호 사상 때문일까? 아이들은 왜 그리 많이 낳았는지…….
그런 와중에서도 가부장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던 아버지들은 어느 정도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에서 딸들은 도시의 식모살이로 보냈다.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큰누나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세대는 크건 작건 간에 가난과 엄한 아버지와의 갈등을 경험했을 것이다. 제제는 자신일 수도 있고, 형제 중에 누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공감대가 있었기에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지금의 어린 세대는 예전의 독자들처럼 뜨거운 호응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환경에서 많은 형제들과 애증을 겪으면서 자라는 아이는 많지 않을 테니까…….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그때는 힘겨웠지만 지나고 나니 그리운 추억이다. 이렇게 제제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 주는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어릴때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었는데
언제쯤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든 아들이 읽으면 좋을거 같아서구입하게 되었어요
읽을 때 마다 조금씩 다른느낌이 있었는데 아들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며 사주었는데 ㅋㅋ 엄마의 욕심이었던건지 만날 역사만화만 보는 아들은 큰 감흥이 없는지 읽었다고는 하는데 별말이 없네요
조만간 다시 또 읽으라고 해야겠어요
엄마는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었는데...ㅎㅎ
가난한 가정, 많은 가족들.. 그리고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 '제제'가 있습니다. 오래 전 브라질이라는 곳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한테 배우지 않고도 글을 깨우치고, 어른들이 쓰는 어려운 말에 관심이 많은 아이... 하지만, 어린아이의 삶이 어른의 것들을 닮았다면.. 그건 삶의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는 반증일 듯합니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것은, 말썽을 부린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행이었습니다. 아무리 폭력이 일상이 된 사회였다고 해도 다섯 살 난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기엔 너무 무자비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커간다는 것은 아무 꺼리낌없이 자유롭게 하던 것들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왕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던 것처럼..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철이 들어서 어른이 되고서 삶이 고단한 이유는, 어른들 마음 속에 '그 순수함'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혹, 그 순수함이 남아서 자유분방한 어른들을 보면 괜시리 질투가 샘솟아서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핀잔을 하거나 비난을 하게 되는 건 아닐런지...
이사간 집 뒷마당에 있던 라임오렌지 나무는 제제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제가 힘이 들 때마다 가서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던 나무도 제제가 철이 들면서 말을 멈추고, 꽃을 피움으로써 제제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가슴에서 '상상력'이 사라져 버린 제제에게 예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다가섰을 듯합니다. 어른들은 나무가 꽃을 피웠으니 이제 열매를 맺겠다고 좋아하지만, 제제에게 그건 '이별'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음 속 새장에서 '작은 새'를 날려보내고 어른이 되기 위해 '생각'을 키우는 제제...
어른이 되는 게 좋은 것인지.. 아이의 순수함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게 좋은 것인지 저로서도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제에게 너무 큰 슬픔을 안겨주면서 모든 '어린 것'들로부터 이별을 하게 만든 친구의 죽음은, 읽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슬픔으로 전해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의지가 되어 주던 사람의 부재가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까요? 왜 힘들었을 때 '뽀르뚜까' 외에는 제제의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을까요?
성장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마음이 아프게 읽었습니다.
기억 저편에 오렌지나무랑 이야기를 나누는 제제만 있다.
도무지 어떤 이야기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4학년 둘째 딸의 방학 숙제 중 책 6권을 읽고 독서골든벨 문제 권당 30개를 내오는 숙제가 있다.
그 중 한 권이 이 책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다.
지나치게 어려운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 내는게 절대 쉬운 게 아니질 않는가.
아이는 25문제를 만들었는데 5문제를 못만들겠다면 내게 도움을 청한다.
이 정도 도움을 줘야 하지 싶어 읽기 시작했는데.... 완전 반해서 3시간 못미쳐 다 읽었다.
브라질의 가난한 마을에 사는 다섯살 아이 제제.
혼자서 글을 읽은 제제는 영리하고 예민하고 장난기가 아주 많은 아이다.
제제는 10살 쯤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장난을 특유의 영리함으로 어린 나이에 한다.
검정스타킹으로 뱀을 만들어 놀래키거나, 성당에서 초를 얻어 도로에 칠한 후 사람들이 넘어지길 기다리거나, 구아바나무 열매를 훔치거나 한다.
제제가 이런 장난을 치기에는 지나치게 어리기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제제를 천하의 못된 장난꾸러기로 기억한다.
가난한 제제는 다섯살에 학교에 가고, 꽃을 훔쳐서 선생님 꽃병에 꽂아준다. 선생님이 예쁘지 않아 꽃을 못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어리고 영리한 제제가 점심을 못싸오는 걸 알고 돈을 주는데 제제는 형제가 11명이나 되는 흑인 아이가 자기 대신 돈을 받게 하고 싶어 피하기도 하고, 선생님이 주신 돈으로 빵을 사 그 아이랑 나눠먹는다. 가난하지만 나눠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제제는 또한 자존심도 강하다. 아무런 선물도 못받은 크리스마스날, 제제는 아빠가 실업자라서 정말 싫다고 했는데 아빠가 그 말을 들었다. 아빠의 눈은 영화스크린처럼 튀어나왔는데 슬픔에 가득차 있었다. 제제는 아빠에게 너무 죄송해 구두닦이 통을 들고 돈을 벌려 길을 나선다. 다시 말하지만 그 아이는 다섯살이다. 아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담배를 사주는 아이.
뽀루뚜가 아저씨는 차에 매달린 제제와 우연히 만난 며칠 뒤, 유리조각에 발이 베인 제제를 병원에 데려간다. 몇마디 말을 나누면서 아저씨는 제제가 가진 예민한 감수성과 영리함을 발견한다. 이젠 제제에게 뽀루뚜가 아저씨가 최고의 친구다.
제제는 누나와 형, 아빠에게 죽도록 매를 맞는다. 제제가 나쁜 말을 입에 담았다 해도 어린 다섯살에겐 심한 매질이었다. 뽀루뚜가 아저씨는 마음이 아프다. 아저씨는 제제와 낚시여행을 다녀온다. 아저씨는 심한 매질로 상처입은 제제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여행으로 아저씨와 제제는 아빠와 아들 사이가 된다.
하지만 아저씨는 기차에 치인다. 제제가 상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즈음이다. 아저씨가 있어 현실도 살만하다고 생각하여 돌아왔는데 아저씨가 돌아가신 것이다. 제제는 아프다. 진짜 아픈 건 맞아서 아픈 게 아니었다. 온 몸이 삶을 거부한다.
제제는 아마 뽀루뚜가 아저씨처럼 멋진 어른으로 자랐을 것이다. 유일하게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었던 사람을 어린 시절에 가졌으니까.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 울 아이들은 '마당을 나온 암탉'보다 덜 슬프다고 한다. 아이들에겐 동물 쪽이 감정이입이 더 쉬운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가혹한 현실이 있다는게 싫어서 거부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