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에 대한 서평을 쓰려니 오히려 마음이 갑갑해져 온다. 내 스타일대로 독후감을 진솔하게 쓰는 것이 나의 독서의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출간된 지 아홉 달, 뱃속에 아이를 품듯이 열 달을 품고 이제야 읽은 책이다. 굳이 변명을 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읽을 때가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의 관심은 사회복지학도였던 학부생 때부터 고령자, 노인, 노후의 삶이었다. 그 중에서도 경제와 심리 면이었다. 국제학대학원에서 일본지역을 전공하면서 쓴 석사 논문도 '일본의 고령자 재고용 정책(소득보장과 삶의 보람 측면에서)'에 관한 것이었다. 즉, '삶'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죽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삶에 관한 관심은 죽음에 관심일 수도 있건만 죽음은 역시나 무거운 주제였다.
이 책은 1969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스위스 출신인 저자는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62년에 콜로라도 주립대학으로 적을 옮겼고 1963년에 정신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5년에 시카고 대학 의대로 옮기면서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충격을 받는다. 500명 이상의 말기 환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로스 박사는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책을 써냈고 유명한 죽음의 5단계 모델을 소개하고 있다. '죽음의 5단계 모델'이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접할 때 사람들은 '부정과 고립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이라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터뷰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삶의 종말로 향해 달려가는 환자들의 육성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분노, 고독, 절실함과 절망, 그리고 반면에 그들의 희망과 구원에 대해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인간의 존엄이란?
이성과 지성, 또한 집합체로서의 지식의 축적과 계승, 발전이라는 거대한 인류의 업적이 인간의 존엄이 아니었다.
배변의 문제를 제때, 또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것.
등이 가려울 때 긁을 수 있는 것.
이런 것이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검사의 일정, 치료의 일정에 맞춰 순조롭게 굴러가야 하는 병원의 시스템이라는 톱니바퀴의 일개 톱니로서 취급받으며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도 못 가고 실수할까 봐 노심초사 방광을 조이며 비참함과 자괴감을 느끼는 환자의 모습에 감정이입이 됐다.
정보의 전달과 공감
종말기를 맞이하는 환자라고 해서, 혹은 아주 어린 환자라고 해서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이 아닌데, 환자를 소외하고 의료진과 가족이 의사소통을 하며 앞으로의 진료 방향과 죽음의 형태(연명치료, 호스피스 및 존엄사)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고, 심리, 정서적인 두려움과 막막함에 공감해 주고 동행해 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공인지도 모르겠다.
초판 발간이 1969년이니 50년이 지난 지금, 그나마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2018년 2월부터 법적으로 존엄사가 허용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개별적인 의료 현장에서 얼마나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료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굳이 말하면 시스템의 문제랄까? 첫째, 의료인들은 너무 바쁘다. 둘째, 소송 등의 위험을 떠안고 있다. 셋째, 실제로 괴물 같은 환자 보호자도 있다. 그렇기에 심리적 거리를 두고 최대한 보신(保身)을 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 아니겠나? 무조건 사명과 도의만을 강조한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설명은 좀 잘 해 주면 좋겠다. 그건 환자의 기본 권리이다. 병의 예후,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치료의 종류, 앞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몇 가지 치료의 방침과 그 장단점, 부작용 등등... 난 가끔 생각했다. 의료인이 문과가 아니어서 말을 잘 못 하나? 자꾸 말을 반복해야 해서 귀찮아서 그러나? 등등...
난임치료로 몇 년을 고생한 지인이 난임치료로 유명한 서울의 한 클리닉을 찾아갔을 때,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바로 시험관 하실 거죠?"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했다. 여러 경로로 고생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찾는 곳이라 당연히 그럴 거라고 '닫힌 질문'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은지 상의도 없이 다짜고짜 그런 질문에 얼마나 위축이 될까?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지라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일천한 병원 경험 속에서도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휩쓸리는 경험도 많았다. 평생 무척이나 건강하게 살아 오다가 큰 아이를 임신하고 병원의 세계를 아주 폭넓고 깊게 경험하게 되었다. 유산 위험으로 입원해서 링겔을 맞고 있으면서도 뭘 맞고 있는지, 왜 맞고 있는지 등등 모르고 그런가 보다 하면서 지나갔었다. 바쁜 의료진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진상 환자로 찍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 등 나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질문하기도 좀 힘들었다. 한 나흘 지나니 링겔 꽂은 자리가 너무나 아픈데 괜한 엄살인가 싶어서 버티다 버티다 간호사에게 말했더니 한 사흘 지나면 아픈 게 맞아서 보통 바늘을 바꿔 다른 곳에 꽂는다고 했다. (괜히 참고 있었다. 이런 성격이라...)
반면, 큰 아이가 결국 미숙아로 태어나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았을 때의 경험은 정말 좋았다. 큰 아이가 소아 탈장으로 간단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의 담당 교수님, 이젠 칠순도 훨씬 넘으셨을 소아 외과의 대모라고도 불리던 선생님은 세세한 설명을 해 주시고 질문이 있냐고 물어봐 주셨다. 그리고 수술 당일, 40분쯤 지나자 직접 나오셔서 걱정할 것 같아서 나오셨다며 아주 잘됐으니 걱정 말라고 하고 다시 들어가셨다. 그리고 미숙아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인 시력 때문에 검진 다니던 소아 안과의 선생님과 전공의 선생님들은 정말 감동의 연속이었다. 15분 간격에 4~5명의 환자가 예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환자에 대해 공부를 해 두시는지 친밀하게 말을 걸어 주시고 상태에 대해 예를 들면서까지 설명해 주셨다. 소아 안과의 젊은 대가로 알려져 있는 분인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다른 병원에서 거의 실명 선고를 받은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괜찮아 질 거라는 말을 듣고 울었다는 부모도 있었다. 물론 일방적으로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얻었던 도움이었기 때문에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종교와 영성의 역할
인생에 있어 어떤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대처하는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영성' 혹은 '종교'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5단계가 영성에 의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이지만 큰 아이가 막 7개월차에 접어든 시점에, 태어나 버렸을 때 온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말 그대로 풍전등화 같은 어린 생명 앞에 모든 어른들이 할말을 잃었다. 남편과 나는 굳이 분류를 하자면 스무 살 대학시절부터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다.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이자 삶을 끌어가는 동력이다. 아이가 인큐베이터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믿지 않으시는 시아버님께서 약주를 한잔하시고, "너희는 그렇게 잘 믿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냐."라고 한숨과 눈물섞인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죽음의 5단계라고 하지만 어떤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사건에든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5단계에서 3단계인 협상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불행'이라 여겨지는 것이 사람을 골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뭐 특별한 사람이라고 나를 피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고루 햇빛을 비춰주신다고 하셨기에 죽음의 1단계 고립과 2단계 분노는 존재하지 않았다. 3단계 협상을 치열하게 했다. '아이를 살려 주시기만 한다면...'이라는 협상 카드를 얼마나 많이 들이밀었던가? 그러고 나서 아이가 그렇게 된 원인을 마구 찾아 4단계인 우울에 빠졌다. 의사도 모르고 아무고 모른다는데, 보는 사람마다 왜 그렇게 된 거냐고 물었고, 나도 그게 제일 궁금했다. 임신 6~7주 되는 시점에서 미국에서부터 10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던 것이 무리가 되었던 걸까, 의사 선생님이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해서 시댁에 잠시 인사 다녀오느라 몇 시간씩 차에 앉아 있던 게 무리가 되었을까 등등 자책에 빠졌었다. 그러고 나서는 5단계 수용에 이르렀다고 해야 하나, 이르지는 못했었나,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아이가 어떤 상태가 되든 아이와 함께 그 짐을 나눠지고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던 것은 사실이다. 그게 사람들 보기에는 가시밭길이더라도 그게 내 삶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면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나 나름의 정리였다. 내 인생의 평가 또한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루어질 것이기에 내려놓게 되었었다. 그게 수용이라면 수용이랄까?
로스 박사가 만난 인터뷰 대상자들 중에서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태도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결국 종말을 얘기할 때 종교와 영성을 배제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
누구나 그렇겠지만 밝은 듯, 어두운 듯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스무 살쯤에는 염세적인 성향이 더 강했던 것 같다. 함께 기독교 동아리를 했던 언니들,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죽으면 어떻겠냐?
나는 조금도 미련이 없다 했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기왕 태어났으니 열심히 보람있게 세상에 유익이 되게 살고자 했지만 죽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던 20대 후반 언니의 대답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결혼을 앞두고 보니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오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금 내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죽어도 못 죽을 것 같다. 가치관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상황이 바뀌었다. 책임져야 할 어린 아이들이 두 명이나 있다. 남편이야 슬퍼해 주겠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로스 박사님의 인터뷰에도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와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자아낸다. 우리나라에 군대가 없었다면 고교만 마치면 사실상 성인으로 슬프긴 하겠지만 미련 없이 떠날 수는 있을 것 간다. 그런데 군대가 있으니 군대를 마칠 때까지는 있어주고 싶다는 나 혼자 아무 의미없는 계산을 해 보게 된다.
50년 전, 로스 박사님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는 거센 반발과 비난도 받고 연구의 진척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연구의 필요성을 알고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연구해 온 소수의 연구자들 덕분에 이렇게 가치 있는 인류의 지적 유산이 이룩됐다. 50년이 지나서 이 책을 읽는 나 같은 독자들도 빚을 진 기분이다.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성찰을 얻게 되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더 가치있는 것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의 후속편인 <죽음과 죽어감에 답하다>도 깊어가는 가을에 읽어봐야겠다.
죽음과 죽어감
10년 가까이 암으로 투병하는 제가 평소에 느끼고 체험한 모든 이야기가 갈피마다 살아 있는 이 책을 얼마나 깊은 고마음 속에 공유하며 읽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가 좋아 한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구를 자구 인용하는 당신에게 더 깊은 애정과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죽어감은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해인 수녀)
죽음과 죽어감 제목부터 숙연해진다. 이 책은 1969년 출간되어 50년이 지났다. 인생 수업을 펴낸 저자이기도 한 로스는 뉴욕, 시카고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한 기록을 책으로 냈다. 나는 죽음은 무서운게 아니라 죽어감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죽어감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통증이라는 고통을 겪어봐서 더 그렇다. 이 책은 죽어가는 사람이 의사, 간호사, 성직자 그리고 가족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이라고 하였다. 인문학 책이면서 철학도 담겨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죽음과 죽어감을 거쳐야 한다. 죽음과 동시에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세상을 잘못 읽고서 세상이 우릴 속였다고 말한다
타고르 [길 잃은 새들]
200여 명을 인터뷰 하였는데 죽음을 앞둔 환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불치병에 결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어. 사실이 아닐 거야." 라는 반응를 보였다. 죽음의 5단계 중 부정과 고립단계이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쳤을 때보다는 '저만치 멀리' 있을 때 죽음이 덜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족의 입장에서도 가장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비교적 건강하고 편안한 상태일 때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들을 위한 재정적인 대책을 논의하는 편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그런 논의를 미루는 것은 종종 환자를 위한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방어 심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슬픔을 편안하게 표현하는 것이 허용될 때, 환자는 마지막 수용의 단계로 훨씬 더 수월하게 접어들고,끊임없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고 우울의 단계에 그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것이다. 첫 번째 단계인 반응성 우울의 경우 환자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고 많은 언어적 교류를 원하며 종종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반면, 두 번째 단계인 준비성 우울은 비교적 조용하다. 말보다는 말 없는 감정의 교류가 더 중요하고 때로는 그저 손을 잡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병원에 가면 진료도 너무 간단한 것에 화가 난다. 환자나 가족 입장에서는 같은 내용이라도 자꾸 확인하고 싶고 자세히 알고 싶은데 4시간을 달려서 진료는 5분도 안 걸린다. 입원 했을때 나에게 자세히 알려주지 않아화를 낸 적이 있다. 환자된 입장에서 불만이 없는 사람은 없다. 죽을 병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관절이 낫지 않는 거 보면 그때 화를 더 내고 자세히 물어볼 것을 후회가 된다. 덕분에 교수님 명함도 받았지만 문자 몇 통으로 끝났다. 이번 기회에 환자는 병원도 의사도 잘 만나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환자들이 분노의 단계를 겪는 것처럼, 직계 가족 또한 똑같은 감정 상태를 겪는다. 그들은 처음 환자를 검진했던 의사와.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했던 의사와, 서글픈 진실을 알려준 의사에게 차례로 분노를 표출할 것이다. 실제로 의료진이 환자를 얼마나 잘 돌보았는지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분노를 그들에게 표출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예외일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죽음이 곁에 오면 '왜 하필 나만 이런 고통을 겪지'라고 묻는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한다. 죽음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오면 우리는 예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저자는 현대의 '죽음학'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를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기까지의 임상 기록이다.
의사는 자신의 환자의 죽음을 말하기를 꺼려한다. 자신의 무능을 상징한다고 받아들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죽음이 가까운 환자 본인에게도 잘 얘기하지 않는다. 환자 가족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병으로 허약한 환자가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되어서이다. 그러다, 어떤 환자는 자신이 왜 죽는 지 정확히 알 지도 못 하고 죽는다. 죽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치료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생체 시험 도구가 된 것 같다.
이런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현대 의학이 발전하며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도 깔려 있다. 문제는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죽음은 막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런 근본적인 두려움이든 의학적 자신감이든, 발생하는 회피는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회피나 공포가 고통스럽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충분히 생각해야 된다고 말한다. 의사도, 환자도, 보호자도, 관계된 다른 사람도. 또는 관계없는 사람들도. 왜냐하면 우리 모두 죽기 때문이다. 환자와 환자를 둘러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충분히 공부한다면 우리 죽음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닐 수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죽음은 공포가 되고, 그런 공포에서 의사도 환자도 보호자도 예외일 수 없다.
공부의 끝은 '죽음'이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의사와 환자, 그리고 보호자가 환자의 병과 죽음에 대해 충분히 대화하게 되고, 환자는 공포속에서 죽어 원한 품은 귀신으로 구천을 떠돌지 않을 수 있다. 이 대화는 한 번의 대화로도 엄청난 효가를 거둘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환자의 죽음과 연관된 의사, 성직자 등은 훨씬 더 깊은 통찰과 풍부한 경험이(대화를 위한) 필요함은 당연하다.
좋은 책이다. 이와 함께, 죽음에 대한 지속적이고 깊은 숙고는 우리 삶을 조금 더 '갈애'와 '갈등'으로 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