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스펙쌓기와 함께 끝없는 무한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세계는 어떠할까요. 최고가 되기 위해 사교육에 열광하고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내로라하는 명문이라 이름 붙은 곳으로 발을 뻗어 나가기 바쁩니다. 이 현상이 현시대에만 국한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교육이라는 배움의 지식을 습득할 때부터 인간은 경쟁의 순환 속에 내던져져 있었습니다. 선의의 경쟁에서 차츰 독보적인 나로 거듭나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가 되기 위해 과열 경쟁의 악순환이 거듭됐습니다. 누구나 최고가 되길 바라고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 수순을 아직 자아 형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 어린 청소년들에게 강요하기란 너무 가혹하다 생각지 않으십니까?
저의 10대 시절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주저함이 없이 이 책을 선택하겠습니다. 원작은 영화이지만 저는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접했기에 버킷리스트에 '책' 으로 선정하기로 했어요. 세월의 무게에 따라 남다르게 다가오는 책이 있습니다. 10대와 20대 그리고 현재... '버킷 리스트'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저의 뇌리에 스치고 간 책은 고전문학도 아니고 위인전도 아닌, 이 작품밖에 없었습니다. 어려도 감동은 알 수 있기 마련입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웰튼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또래 아이들에게 공감하고 그 아이들을 이끌어가는 키팅 선생님을 보면서 저런 선생님께서 현실, 내 가까이에도 존재했으면 하고 무척이나 바랐던 기억이 있네요.
10대 시절에는 주입식 교육에 힘입어(?) 독서 또한 어른들이 권하는 책, 위인전, 전기 등을 주로 읽었습니다. 아마 이 책은 10대 중반 또는 후반 즈음에 저 스스로 찾아서 읽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느냐고 묻는다면 학생의 신분에서 오는 압박감에 의한 동질감, 그로부터 해방감을 원하는 처지에 있던 게 『죽은 시인의 사회』를 공감하며 읽게 한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10대 시절 아무리 반항했다고 한들, 저는 어른들의 울타리 안에 있는 미성년에 불과했습니다. 부모님, 선생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기는 싫어하면서 억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거죠.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존 키팅이라는 인물은 제게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님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니, 조금 많이 달랐다고 해야 하는 게 맞으려나요. 미래를 위해 공부하라는 어른들은 많았지만 내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즐겨야 한다는 말을 해주는 어른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엇나가면 화살같이 귀에 박히는 말이 있죠.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아이들은 좀 엇나가도 되고 반항해도 되고 사고도 치고 적당히 놀기도 하고 그렇게 자라야 하는 것 같은데요.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의자에 파묻혀 공부하는 것만이 커서 '뭐라도' 될 것처럼,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을 살 것처럼 지레 겁을 주는 어른들 속에서 살았었고 요즘 아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작품이 빛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학생을 공부만 해야 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물론 학생은 공부해야죠^^) 한 인격체로서 바라보고 삶을 뜨겁게 살아가야 한다 말해주는 어른이 거기 있었으니까요. 감동이 큰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최고가 되기를 갈망하는 어른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 선생들의 욕망을 대신 실현해줄 기계적이고 인형 같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원하는 건 자신의 자식들이 오로지 최고의 성적을 거둬 최고의 명문대학에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거들떠도 보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을 혹독하게도 공부시킵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스파르타식 교육의 강행군이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재미있느냐 하면 그도 아니에요. 과거의 교육방식이 그렇듯 오로지 주입, 암기, 세뇌식 수업시간이 지겹도록 아이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그런 웰튼-헬튼- 아카데미에 구원자가 찾아옵니다. 우리의 인생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한 척의 표류하는 배입니다. 어른들의 의무는 이제 막 돛단배를 띄운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좋은 나침반을 쥐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의 목적지까지는 스스로 찾아가야 하지요. 가끔 조타수 역할을 해주는 정도가 어른들이 할 몫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선장과 조타수의 역할, 나침반까지 꼬옥 쥐고 멋대로 목적지로 이끌려는 어른들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존 키팅이라는 선장이 이 아이들을 찾아온 것이지요. 스스로 자신을 선장이라 일컫는 그는 교육 이전에 아이들의 인성을 먼저 닦으려 합니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최고라는 목표보다는 자신의 삶을 먼저 바라보라고 소리칩니다. 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할 게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라고 외칩니다.
웰튼 아카데미에는 어른들의 욕심에 세뇌당한 아이들이 저마다의 꿈을 잃고 있었습니다. 주체적인 의지는 잃어버린 채 의존적이고 의타적인 아이들로 자랄 뿐이었지요. 아이들이 원하는 꿈이 아닌 어른들의 꿈을 주입하고 이루도록 채찍질을 해댔습니다. 아이비리그에 진학해 의사가 되기를 강요하는 닐의 아버지, 형과 같은 수재가 되기를 갈망하며 본인의 의사는 묵살된 채 웰튼으로 전학 오게 된 토드와 그 밖의 꿈을 잃고 날개를 꺾여버린 아이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비상하게끔 유도해주는 키팅 선생의 교육관은 지금 현재 우리 시대에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 시절 소년이 그렇듯 이성에 눈떠가는 낙스의 사랑앓이는 약방에 감초같이 청소년 시절에 꼭 있을법한 에피소드기도 했고요.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키팅 선생이 웰튼 재학시절 몸담았던 서클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시를 읊고 낭독하고 그들을 기리며 새로운 자아로 거듭납니다. 용기를 잃은 아이는 자신감을 되찾고 꿈을 실현하고 싶었던 아이는 꿈을 이루려고 발돋움합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언제쯤 입시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언제쯤 여기에서처럼 가슴에 불을 지핀듯한 여운을, 스스로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의지를 만끽할 수 있을까요. 너무도 먼 이야기인가요?
Carpe diem!
영화의 명대사이기도 한 이 문장은 고대 로마의 유명한 시인 퀸투르 호라티우스 플라쿠스의 시 Odes의 마지막 문장인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원문은 '오늘을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헛된 기대보다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살아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은 후부터 제 삶의 신조가 되어버린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이 문장을 소리쳐 말하는 존 키팅 선생이 작품 안에 존재하기에 책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온몸으로 찌릿 전율이 일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10년이 더 훌쩍 지난 시간 속에서도 저의 감각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사춘기 소녀의 감동이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원작이 영화이기에 영상으로 봐야 더 절절한 감동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책과 마찬가지로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를 보며 눈물을 쏟기도 했었고요. 작가 톰 슐만의 경험담을 녹여낸 영화의 시나리오를 낸시 클라인바움이 각색한 것이 이 책입니다. 10대 때는 톰 슐만의 시나리오를 책으로 펴낸 작품을 읽었기에 기억의 망각과 함께 감동의 여운은 여전하나, 새로운 마음으로 이 책을 조우했습니다. 키팅 선생님의 유쾌하면서 자유분방한 유머에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교육 시스템의 폐단에 분노하고 눈물 흘리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따라오기도 했습니다. 과연 세상을 바꾸려 하는 자는 승리하는 걸까요?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키팅 선생님을 영원히 캡틴으로 기억할 제자들과의 눈물 젖은 작별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깨어나고 보아야겠지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요. 참 단순하나 꼭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성공과 명예를 향한 미래지향적인 삶도 나쁠 건 없지만 그에 앞서 참교육의 의미와 자신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까? 오늘이 지나면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일 웃을 게 아니라 지금, 내일 행복할 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아름답게 내 삶을 즐겨야 합니다. Carpe diem!
"내가 왜 이 위에 섰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 이 위에서 보면 세상이 무척 다르게 보이지. 믿기지 않는다면 너희들도 한 번 해봐. 어서, 어서!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 해. 틀리고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 봐야 해."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中-
죽은 시인의 사회 하면 카르페 디엠과 함께 명대사가 있죠.(아주 많죠.) 영화도 그렇고 책에서 역시 이 마지막 장면에서 폭풍눈물을 쏟았네요. "Oh captin, my captin!" "Thank You Boys, Thank You."
*제 기억에 있던 그 시절의 책은 1990년도에 출판된 모아 출판사의 책인데 이미지 구하기도 쉽지 않네요. 표지 이미지를 보니, 그때의 감동이 다시 한 번 밀려오는 것 같아요.
가장 논란이 되는 점부터 말해보련다. 닐이라는 학생이 자살을 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한창 꽃피울 고등학생 청년이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한밤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닐은 웰튼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학업성적도 우수했으며 교우관계도 원만했고 여러 동아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범생으로 미국의 명문대인 하버드 의대에 입학할 것으로 점쳐질 정도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웰튼고에 존 키팅이라는 국어선생이 새로 부임하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조직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고, 부모님 몰래 연극 오디션을 보고 연극무대의 초연을 펼친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를 받으며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던 관계로 아버지의 꾸중을 들었던 그날밤에 자살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유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이미 보았기에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 정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닐의 죽음'은 강압적인 아버지의 교육관이 문제의 발단이었고, '지옥고(Hellton)'라고 불리는 '웰튼고'의 엄격한 교육시스템이 한 몫 단단히 한 사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에게 '존 키팅'이라는 한 줄기 희망이 등장했던 것이다. 딱딱하기만 한 수업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깨닫음'을 추구하는 키팅의 교육관이 '성적지상주의'로 일관하는 웰튼고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조직이 생겨나면서 일부 학생들이 키팅의 교육관을 몸소 실행에 옮기게 되었고, 그 조직원 가운데 리더였던 닐은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최대 걸림돌이었던 '아버지의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닐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 욕망이란 하나 뿐인 자식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끔 전폭적인 뒷바라지는 마다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뒷바라지가 닐에겐 '끔찍할 정도의 억압'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닐의 의견이나 생각 따위는 듣지도 않은채 아버지가 이미 정해놓은 '닐의 미래(성공)'를 강제적으로 밀어붙였다는 말이다. 닐은 이런 아버지의 강압에 늘 불만이었지만 '자식의 성공이 보장된 삶'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 앞에서 한마디 의견도 내놓지 못한채 그저 묵묵히 따르고만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직 어린 학생에 불과하니 어른들이 말하는 '성공비결'에 반박할 다른 의견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닐 자신도 훗날 의대를 졸업한 뒤에 '역대 연봉'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는 삶이 싫지 않았기에 그저 부모님의 뜻에 따랐을 뿐이다. 정작 닐 자신은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것이 '성공지름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일'이라 말하는 부모님의 말씀과 명문고 임직원의 조언 때문에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을 억누르며 공부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이런 차에 '키팅 선생님'이 웰튼고에 부임했다. 키팅도 웰튼고 졸업생이었으며 명문대인 옥스포드 수석장학생으로 명예로운 졸업한 뒤에 다시 모교에 부임했던 것이다. 그래서 웰튼고교의 교장선생도 키팅 선생님에 대해 기대가 컸다. 워낙 '전통'과 '명예', '규율', '최고'를 추구하는 학교였으니 그런 쪽으로 스팩이 빵빵한 키팅 선생님이 모교에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명문고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팅의 생각은 달랐다. 오직 명문대 진학율만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전통'이라 내세우며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즐거움' 대신 지옥과 같은 '입시교육'만을 강요하는 웰튼의 교육방식과는 정반대의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키팅은 첫 수업에서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라는 라틴어 격언을 수업했다.
'오늘을 즐겨라', '현재에 충실하라'라는 뜻을 가진 '카르페 디엠'에는 사실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다. 이어서 말하면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뿐이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고 오늘을 즐기라는 뜻이다. 이 두 문장을 줄이면 '바로 지금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수업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뜻과는 달리 학업만을 강요하던 학교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맹목적인 공부만 하던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영감'을 선사하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래야 행복할 수 있고, 나중에 후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 닥친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 '어떤 삶'을 살든 후회할 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닐이 무사히(?) 하버드 의대를 마치고 '억대 연봉의 의사선생'이 되어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남이 시키는대로'만 하다가 어른이 되었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 닐의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의대에 진학했으나 더는 적성에도 맞지 않고 '학업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중도포기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뒤에 어른이 되었다면, 학창시절에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분노만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닐이 학업에 충실하면서도 '하고팠던' 연극무대에 마음껏 올랐더라면 무사히 의사선생이 된 뒤에도 그때를 추억하며 행복했을 것이고, 반대로 나락으로 떨어진 삶으로 전락했을지라도 행복했던 추억 때문에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한 삶(카르페 디엠)'은 중요한 것이다. 아직 미성숙한 학생의 '선택'일지라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닐을 죽음으로 내몰고 키팅선생을 사건의 주동자(?)로 떠넘겨 학교에서 쫓아내려는 교장과 닐의 아버지는 나쁘기만 할까? 닐이 불쌍하니 닐의 아빠는 나쁘고, 키팅 선생이 훌륭하니 교장의 낡은 신념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닐의 아빠도 웰튼고의 교장도 나쁘지 않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문고-명문대-상류사회'라는 성공의 지름길을 설계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간은 '욕망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보장된 성공시스템'을 만들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적극적인 '관리'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기회제공', '적극관리'를 전통이랍시고 모든 학생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밀어붙인 점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일망정 수많은 학생들을 '아이비리그'라는 명문대학에 비중있게 진학시킨 '검증된 방식'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하면, 많은 독자들이 키팅선생님을 존경어린 시선으로 추종함에 따라 '웰튼고'와 같은 맹목적인 교육시스템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허나 인간은 욕망덩어리이고 '웰튼고'가 많은 이들에게 성공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면 '비난'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비판을 하고 시정을 요구한들 '키팅의 제자들'이 대성공을 거두어 사회의 지배구조를 싹 바꾸어놓지 않은 이상 욕망덩어리들을 배출하는 '웰튼고'와 같은 시스템은 꾸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어느 한 쪽이 무한하게 나쁘다는 비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적확한 비판의식을 키워 교육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웰튼의 장단점'과 '키팅의 장단점'이 서로 공정하게 경쟁하며 학생들의 본연에 맞게 각자의 꿈을 성장발전시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형성하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우리의 교육시스템도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말았다. 허구헌 날 '대입제도'만 바꿔온 터라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걸고 한 판 도박을 걸게 만들었고, 이런 문제점을 바꿔보겠다고 '외국의 시스템'을 아무런 성찰없이 '우리의 현실'에 끼워맞추는 통에 정작 '우리 교육'은 설곳을 잃고 휘청거릴 뿐이었기 때문이다. 말로는 '백년대계'라면서 흔들리지 않는 교육정책을 추진하겠다고 곧잘 말한다. 허나 대한민국 입시정책은 해마다 바뀌었다. 윤석열의 '킬링문항 삭제' 지침은 희대의 촌극이었고 말이다. 변별력을 무색하게 만들면 학생들의 실력검증은 무엇으로 하란 말인가? 만일 '킬러문항'이 정말 문제였다면, '대입시험'을 없애고 무시험제도로 입학허가를 한 뒤에 대학자체적으로 무한경쟁을 시키는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 또한 문제점이 많은 방식이지만 말이다.
한편, 우리에겐 여전히 '키팅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우리 학생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학생의 희망찬 미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불철주야 교육에 매진하는, 그런 선생님들 말이다. 그리고 제발 그런 선생님들이 소신껏 교육을 펼칠 수 있도록 '갑질하는 학부모들'은 좀 꺼져줬으면 좋겠다. 선생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느냔 말이다. 몰지각한 학부모들 밑에서 커온 어린 학생들이 선생을 우습게 만드는 현실이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그렇다. 제발 우리 선생님들이 '검은 리본'을 거둘 수 있도록 관심을 모았으면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꼭 멋진 선생님이 되시길 간곡히 바란다.
그래요. 세상 모든 부모님의 마음은 같을 거에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그 마음.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그 마음. 그런데 말이죠.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대화해 보신 적은 있나요? 어른들의 잣대로 사회의 잣대로 아이의 행복을 정의해버린 것은 아닐까요? 저희 부모님 역시 그러했었죠.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고, 공부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었죠. 반장 선거를 위해 연설문을 써서 외우도록 시키시고, 방학숙제나 글 쓰기는 도맡아 대신 해 주셨죠. 극성 어머니. 딱 한 마디로 정의가 됩니다. 안 다녀본 학원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얼핏 들으면 복 받은 것 같기도 하네요. 누군가는 하고 싶어도 못 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것 역시도 공부를 위한 기초 소양 쌓기를 위함이었답니다. 저는 단 한 개의 학원도 3개월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재미가 없었거든요. 시험이 끝나면 노력의 정도보다는 성적으로 평가되던 그 시절. 제 마음 속에 반항심리가 이미 싹트고 있던 것 같네요.
전 반항기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부모님의 통제가 심할 수록 반항도 심해졌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야 할 상황이 되자마자 전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와 사춘기가 맞물리며 비뚤어지기 시작한 거죠. 아. 오해는 마세요. ^^ 제가 그리 된 것이 부모님 탓은 절대 아닙니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인생이지요. 어쨌든 제 학업성적은 계속 떨어지고 성격은 폐쇄적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웃는 것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까지 했었으니까요. 그 무렵의 아이들이 그렇듯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러 다니고 나쁜 짓(?)도 하고, 모임 이름도 만들고 했었습니다. 모임 이름이요? '우새짱'이었답니다. '우리가 새마을 짱이다'. 새마을은 잠실에 있는 동네 시장의 이름입니다. 엄청 유치하죠? ^^ 네. 그 유치한 이름을 지금까지도 쓰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여전히 제 절친으로서 인생의 동반자들로 남아있고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책을 보면서 문득 제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아마, 대다수 분들이 제가 떠올렸던 학창 시절의 기억처럼 모습과 형태는 다를지 모르지만, 친구들과의 추억들을 가지고 있으실 거에요. 정도는 다르지만 반항심리도 있었을테구요. 저희 세대는 두발단속, 교복 착용, 야간 자율 학습이 거의 의무처럼 생각되던 시기입니다. 선생님들의 체벌은 일상이었고요. 선생님의 권위가 강했던 시절이죠. 학교의 평가는 좋은 대학을 몇 명 보내느냐로 결정되었고, 모두가 획일화 된 주입식 교육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돌출행동을 하는 학생들은 문제아로 낙인 찍혀 관리 대상이 되었었죠. 학교는 자연스레 숨막히는 공간이 됩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장소임에도 답답함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다녀야 된다니...... 참 슬픈 현실입니다.
이 책은 미국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과학고등학교쯤 되겠네요. 학생의 대부분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합니다. 그를 위해 기숙사에서 통제된 생활을 하고 종일 책과 씨름해야 하죠. 학교의 목표는 학생들의 대학 진학. 교육 방식은 살인적인 일정의 주입식 교육. 어떻게든 이 학교에 자식을 입학시키기 원하는 부모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짜인 일정 내에서 기계처럼 공부만 해야 하던 아이들은 새로이 부임된 '존 키팅'이라는 국어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독특한 교육방식과 진솔한 그의 말로 인해 자아의 변화를 겪게 되지요.
여기서 그 유명한 말이 등장합니다. 'Carpe Diem'. 오늘을 즐기라는 이 말은 아이들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그들을 움직입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6명의 소년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과거 키팅 선생님이 재학시절 소속되어 있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을 발견하고, 그것을 재 결성하게 되지요. 이 모임은 힘든 일상의 탈출구이자 삶을 반추하고 변화를 꿈꾸는 희망의 장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하고 싶던 일인 연극배우를 꿈꾸던 닐이 아버지와의 극심한 대립으로 자살 후, 학교 측의 진상조사와 압력으로 모임은 해체되고 키팅 선생님이 해당 사건의 직접적인 책임자로 몰려 학교를 떠나게 되며 이야기는 끝납니다.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찾아서 보았습니다. 과거에 마지막 장면만을 우연히 보게 되었었는데,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거든요. 영화의 장점은 내가 상상으로 그려내 던 머리 속 이미지를 시각화 할 수 있다는 점이겠죠.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복잡한 문학 이론들이 쓰여져 있는 책장을 찢어버리라고 지시하며 시 자체를 느끼라던 장면, 책상 위에 학생들을 올라서게 하고 세상을 다양한 각도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은 제게도 가르침을 주었죠. 키팅 선생님이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들이 책상에 올라서서 '오 마이 캡틴'을 외치는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로빈 윌리암스의 눈빛은 진한 감동과 함께 소름까지 끼치게 만들더군요.
어른들의 기준에서 제 어린 시절은 반항적인 문제아일지도 모릅니다. 사회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는 공부 안하고 일탈을 반복하는 학생이었으니까요. 대다수의 어른들은 진지하고 진실되게 제 생각을 묻고 이해하려 애쓰기 보다는 자신만의 잣대로 저를 평가했었죠. 처음 보는 날부터 눈빛이 반항적이라며 주시하겠다고 말하던 선생님들이, 별 것 아닌 일로도 심한 말을 쏟아내던 그들이, 억울한 마음에 성적을 올려놨더니 다시는 건드리지 않더군요. 심지어,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용서를 하더군요. 성적만 좋으면 술을 마시든 담배를 피우든 폭력을 행사하든 크게 개의치 않던 그 분들의 행동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크나큰 복입니다. 키팅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있다면 소설 속 아이들이 변화했듯 인생을 보다 좋은 방향으로 조타할 수 있겠지요.
제 어린 시절이 그리 모범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부모님 뜻대로 살았다면 더 여유 있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네요. 저는 제 학창시절이 무척이나 즐거웠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누구나 자신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고 스스로 자각하고 변화하는 시기가 옵니다. 말썽만 피우던 제 친구들도 시기는 다르지만 각자 자리를 잡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성적이라는 획일화 된 잣대로만 평가를 한다는 것은, 성공의 기준이 돈, 권력, 명예이고 그를 조금 더 쉽게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좋은 학벌이며, 그것이 너희가 목표해야 할 행복의 기준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들은 뒤늦게야 이루지 못한 꿈을 추억하며 후회하게 되겠죠. 혹은 똑같은 어른이 되어 아이들에게 같은 인생을 강요하고 있던가요.
가면 갈 수록 물질지상주의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게 옳지 못함을 인지하던 사람들조차도 삶에 허덕이다가 물들어 가지요. 그 풍조에 맞춰서 사회구조와 의식이 또 교육방식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책과 영화를 통해 전하는 이야기 속의 메시지들은 선생님들이...... 부모님들이...... 학생들이...... 꼭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떠나는 키팅 선생님을 보며 책상 위에 올라서서 '오 마이 캡틴'을 외치던 학생들이 얻은 깨달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얻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Carpe Diem"
삶의 이유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O Captain, My Captain'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머리속을 맴도는 말이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이것은 사실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말로 시를 사랑하는 국어선생님 키딩이 자신을 부를 때 쓰라고 학생들에게 일러준 말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말도 키딩 선생님이 학창 시절 만들어 활동하던 모임의 이름이다. 그 모임은 다함께 시를 읽고, 읽어주던 모임인데 키딩선생님이 학교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아이들이 다시 결성해낸다. 모임도, 키딩선생님도 슬픈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시사하는 내용의 울림은 더욱 크다.
우선 키딩선생님의 수업이다. 학생들을 학교 운동장으로 불러서 3명의 친구들에게만 운동장을 걷게 한다. 제 각기 걸어가던 친구들은 점점 한 사람이 걷는 것 처럼 비슷하게 걷기 시작하고 그 모습을 통해 키딩 선생님은 획일화와 합일화를 설명한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책 속에는 경쟁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면서 단순히 개성을 독선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도 함께 언급된다.
그리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토드에게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내면속에 갇힌 말들을 내뱉게 함으로써 토드의 잠재력도 일깨워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토드는 자신에 대한 자작시를 발표함으로써 키딩선생님이 얼마나 그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토드와는 반대로 닐이라는 소년은 자신의 재능과 열정에 집어 삼켜져 버리고 만다. 연극이라는 열정을 품었지만 아버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명령하는대로 살고 싶지도 않았던 그는 결국 자살이라는 길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도망일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키딩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고, 달튼이라는 친구가 퇴학을 당함으로써 마무리 된다.
키딩선생님은 끊임없이 학생들의 내면속에 있는 목소리를 들으라고 가르친다. 지금 이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사회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또한 사회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이 비밀리에 유지되었어야 하는 상황을 만든 웰튼의 학교처럼 말이다.
수십년 전의 소설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우리는 아직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수능에 관한 문제는 매일 같이 뉴스를 장식하며 고등학생들을 애타게 하고, 대학생들은 취업이 안되서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하고 유보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촛불로 대한민국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의 부당한 일들에 대해 미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오늘을 살고 있는 청춘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상을 파괴해야 한다'고. 어쩌면 대한민국의 청춘들은 지금 태어나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너무 힘들고 괴로워도 속으로 주문처럼 한번 외쳐 보고싶다. 'O Captain, My Captain'
수학에도 시가 있습니까
-N.H.클라인바움,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삶을 독특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특하다는 것은 평소에 한 번도 볼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커다란 사건입니다. 독특함으로부터 어떤 신선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우리는 결코 독특함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N.H.클라인바움의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을 만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카르페 디엠”을 거침없이 외치면서 예전에 없던 수업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을 즐겨라.”는 말이 너무나 유명해졌습니다.
학교 공부를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고 제 아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공부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학교에서 연례행사로 치르는 시험을 보기 위해 아들은 공부를 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쨍한 마음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험 점수가 상위권이길 바랍니다. 점수는 아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의 주사위 같습니다. 만약에 점수가 기대 이하로 나오면 저는 분명 어른답게(?) 잔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아들에게 오늘을 즐겨라, 고 한다면 아마도 공부가 아닌 딴 짓을 하게 되겠지요.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보고 싶은 영상을 볼 것입니다. 공부에 별다른 재미가 없는 아들이라 교과서가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현재의 즐거움을 대신할 것입니다. 아들에게 입시는 지옥이요, 게임은 천국입니다. 오늘의 즐거움이 서로 달라 계속해서 불협화음이 멈추지 않는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모순을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결국 아들은 처음으로 돌아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공부만 하면 오늘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통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가르치고 학생들은 가르치는 내용을 정신없이 노트에 적습니다. 내용이 중요하고 시험에 나올 것 같으면 별도로 표시하고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어야만 합니다. 이런 제도권 교육에서 학생은 시험밖에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행동하는 자기 주도 학습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현재를 즐길 수 있을까요? 섣불리 그랬다가는 학교에서 문제아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퇴학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독특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독특하게 살아야만 오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독특하게 사는 충분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존 키팅은 국어 선생님입니다. 그가 시를 가르치는 방식은 교과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시의 주제, 내용, 소재를 주입식으로 하는 수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왜 시를 공부해야만 하며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시를 가슴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인즉, 시는 삶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되돌아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가 있어야 합니다. 시는 한 사람의 고백이며 사랑입니다. 시는 고난의 바다를 헤쳐 갈 수 있는 아름다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고 있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의 훼방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돈이 최고인 세상입니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오늘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냅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히는 시험을 보기 위해 시를 공부하는 것은 즐겁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셰익스피어, 월트 휘트먼 같은 위대한 시인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그들을 죽은 시인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들의 감수성을 가지고 별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위대한 시인의 시 속에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는 영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행복, 아름다움, 진리, 정의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시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위대한 시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담은 시를 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살면서 부대끼는 고통 받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시는 이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시를 읽거나 써보게 되면 시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자음과 모음으로 말을 만드는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문학의 특별한 장르이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공식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지만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말은 아주 일상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어떠한 공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마음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는 당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마음의 편지를 쓰는 방법에 있어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키팅 선생님에 따르면 시는 언어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영화, 사진은 물론 음식을 차리는 방법에도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면 하늘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웃음이나 눈물에도 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모든 것에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농담 삼아 “수학에도 시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할 때 키팅 선생님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수학은 시와 성격이 너무 다른 공부이다 보니 수학이 시라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이제껏 수학이 시라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키팅 선생님은 우리의 정답에서 벗어나 수학에도 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수학의 우아함 때문입니다. 수학의 우아함을 달리 수학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었던 지긋지긋한 경험을 떠올리면 수학이 아름답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저절로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데 수학 앞에서는 망설이게 됩니다. 계산만 하는 수학을 보고 있으면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학의 우아함은 역설적으로 수학 문제를 눈으로 푸는 것은 아니라 마음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제까지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마음의 방정식은 숫자 너머의 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숫자로 사람을 계산합니다. 이 소설을 보더라도 자신의 아들을 “5달러 95센트”라고 부르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시험점수가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없는 아들의 몸값을 계산해보니 겨우 5달러 95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의 몸값을 올려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듣고 보면 아들에게 공부할 용기를 일으키는 최고의 독설 같습니다.
이러한 괴민은 인생의 절반을 넘어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몸값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몸값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하지만 몸값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최고일까요? 독특한 것도 아니며, 아무런 우아함도 없는 몸값. 그러니 오늘을 독특하게 즐겨야 합니다. 삶을 몸값으로 계산하지 마세요.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지옥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