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서 살다보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도 그런 인연과 닿아있다. 책을 만들고 기획한 분은 나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한 출판사에 청춘을 바친(?) 그의 인생 2막을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 이렇게 능력을 통합 증명해보이다니 반갑고 기쁘다. 책은 모두 각자의 색깔과 방식으로 쓰는 삶과 마음을 전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쓰기 곤란한 글이 에세이(어원: 시도, 실험)다. 흔한 가운데 자기 삶을 녹여내고 ‘자연스러운’ 풍미를 전달해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주목을 받는 일을 힘들어하는 성격이다. 그렇다고 남이 쓴 산문에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편도 아니다. 소설이나 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데 수필에는 은근히 까다롭게 군다.
산문집을 여는 전고운의 글은 쫄깃쫄깃하다. 그가 허둥대고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데도 읽는 나는 낄낄거리며 창작자의 비애를 진솔하게 받아들인다. 요즘 사워크림어니언맛 나쵸를 연신 씹는 “나를 부숴버릴 순 없고, 현실적으로 부숴버릴 수 있는 게” 필요했다고 대신 설명해준다. 그러니 조금의 거부감 없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축복하게 된다. 그는 숨어 있는 ‘작은 존재’를 구하는 쓰는 일을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사소한 순간을 누군가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 나를 외롭지 않게 했다.
신문에 쏟아지는 거대 담론들 속에서도
어느 누군가는 이런 사소한 것도 보고 있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46)
다음으로 이석원의 글은 작가의 자의식 과잉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읽는 내내 아프고 찔렸다. 우리가 선택한 적 없는 조건과 환경에 노출되어 좁은 반경 안에서 선택하고 아등바등하다가 가는gone 삶을, 멀찍이 바라보게 하는 까닭이다. 누군가는 음악에, 또 누군가는 문학에, 또 누군가는 물질적인 가치에 기대어 살게 되는 분절된 상황들이 그려지기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을 스스로 끊는 사람이 과연 많을까. 먼저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 “사랑했던 일을 밥벌이로 삼은 죄”라면 거의 모두가 수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음악과 헤어진 그가 글과는 이별하는 일이 없기를. 다른 연결점으로 건너가는 거라면 또 모를까.
이어 이다혜의 글은 쓰는 사람의 삶은 몹시 바쁘고 부단不斷할 수밖에 없음을 있는 힘껏 외친다. 그의 글은 ‘방대하면서도 자유로운’ 자신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곱씹다보면 수능 보던 날, 부모를 뒤로하고 혼자 마주했던 하루가 떠오르고... 그나마 찐 외로움을 느낀 건 박사논문 심사를 받던 시기였다. 석 박사논문, 이렇게 두 딸을 낳았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몸에서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빠져나가 도무지 다시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남고 말았다. 그리고 영어영문학에 속한 과목과 범주들은 왜 이리 많은지, 배워보지 못한 채로 소화해 가르쳐야 함이 냉정하게 내던져진thrown 느낌이었다.
모든 글을 읽었다.
그러고도 뭐라도 써야 할지를 몰라서 밤을 거의 새웠다.
미쳤지 싶다.
시간 대비 효율로 따지면 비효율의 끝판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더 읽어야 했다. 영화를 더 봐야 했다. (83-84)
멋모르고 딴 박사학위는 ‘한국문학도 모르면서 외국문학을!’ ‘활자만 보지 말고 시각과 음성의 세계로까지 풍부하게 관심을 확장하란 말야!’ 등의 시끄러운 요구와 자기학대를 불렀다. “뭐든 써야 뭐든 된다(92)”는 강박. 글을 쓰는 사람이 마주해야 하는 번아웃과 우울을 비롯해 피하기 힘든 분투를 보면서, 정신과 약을 복용하지 않는 환자라고 나를 규정하던 시절이 겹친다. 결론은 철저히 그냥 나로 지내는 지금 이 시간이 나쁘지 않다..
이 책을 읽게 된 연결고리가 멀티 아티스트 이랑이다. 일부분 시대적인 흐름이 살아가고 공부하는 방식과 방향을 결정한다. 2000년에나 복수전공과 어학연수 등의 다양한 학습이 활성화되었지 그 전에는 학제간 연계 연구는 뜬구름 같은 거였다. 영미소설 전공자로 지냈지만 만약 희곡과 비평이 주는 부전공의 해방감이 없었다면 퍽퍽해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언제나 의무감으로부터 틀어막힌 숨통을 환기 시킬 창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랑의 영화, 음악, 글쓰기의 “자아를 삼등분”하는 전략은 부럽고 흥미롭다. 말은 이리 하지만 내가 소설에 푹 빠져 지금까지 그 사랑을 멈추지 않는 데는, 그나마 삶이 균형을 잃거나 붕괴되지 않은 데는 그것을 빼고의 삶이 지극한 자기 통제로 고요히 흐르고 미니멀 했기 때문이다. 취향도 베이직과 오리지널파라 탐닉이나 소유에 집착하지도, 딱히 싫증을 내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다른 여러 곳으로 눈 돌리지 못하는 성격이 지금의 삶을 여기로 이끌었다. 사랑하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할 거라는 섬뜩한 사주를 무시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키보드는 내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가 없으면 내 춤은 완성되지 않는다. (110)
무대 체질인 시원시원한 이랑 작가와 달리 나는 입을 떼는 데(예열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고 매사 조심스럽다. 나비랄까. 아주 가끔 이거 다 싶으면 날아가 날개를 포개 오래 머무는^^. 한글도 제법 틀을 잡아 구사하기 전까지 말을 하지 않아 부모의 속을 끓였다고 한다. 그런 내가 언어를 전공했으니 비효율적일 수밖에. 이랑의 글을 읽다가 attraction라는 단어 안의 action을 본다. 이끌리면 움직이게 되어 있구나..
♥ [시선집중] "앞으로 만들 이야기들도 '하지마'라고 한다면...자기검열 하게 돼" - 이랑 가수 , MBC 221125 방송 - YouTube
다음으로 박정민의 글은 ‘쓸만한 인간’을 오디오북으로 읽어서 음성지원이 되어 큭큭 거리며 읽었다.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까다가 어떻게 건드려야 그를 쓰게 만드는지까지 비결을 털어놓는다. “쓰지 마. 쓰기만 해. 아주 했다 봐” 반골 기질 자극 ㅎㅎ 배꼽 빠질 뻔. 독자 만족을 위해 ‘연기’를 해야 해 피곤하지만 씀으로써 ‘봉인’되기에 “산뜻해지기 위해서는 쓸 수밖에 없다”는 그가 무척 귀엽다. 마찬가지로 게으르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히스터리한’ 스타일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고백도 으이그, 머리를 쓸어주고 싶다. “(상대가)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그런데) 마음은 내가 다친다”는 표현은 또 어떻고. 그렇다면 더 골려 먹어야지 “아주 작가 났네, 작가 났어” ㅎㅎㅎㅎㅎ
그리고 김종관의 글은 홍상수의 시나리오 같이 일상을 스케치한다(홍 감독의 영화에 빠져 지낸 적 있다!ㅎ). 전개 방식이 스몰토크와 ‘참새방앗간’의 쏠쏠한 재미를 묻어 나른다. 그가 굿모닝 팝스를 말할 때 이번 가을, 음악을 다시 듣게 되면서 드는 생각들이 쏟아졌다. 내가 얼마나 소심한지 행여 예전에 좋아했던 노래가 다른 것들과 같이 몰려 올까봐, 혹은 그때 같지 않고 변심했을까봐 두려워 못 듣겠다는 거다. 대신 남이 선곡한 노래 속에 과거와 다른 내 반응을 훔쳐보곤 한다. 과거 같으면 Skylark의 Wild Flower에 눈길도 주지 않고 도리어 오필리아 환상이냐고, 시체 애호냐며 짜증냈을 거다.
이어서 백세희 작가의 글을 소개하겠다. 그의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것 같다(당신도 ㅎ). 떡볶이는 나의 최애 음식이자 주식인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먹지 않는다. 맨 떡볶이떡이라면 모를까. 식성도 취향도 이렇게 변한다. 변한 나를 여전한 생성 중의 나로 받아들이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어른이 되는 과정일 테다. 사실 나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가끔 술을 먹는 척 꾸미지만^^). 진한 커피는 중독이고. 그래서 대부분 각성 상태로 맨 정신으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이 어지럽고 엿 같은 세상에 맞서.
“가루가 될 정도로 까이”는 셀럽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악성 댓글 벌레 하나 상대하고는 날밤을 새며 끙끙 앓는 하루살이 멘탈인 나는. 자기홍보 시대에 인정과 각광은 받아야 하고 욕먹기는 싫음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백 작가는 유려한 글솜씨보다는 솔직하고 재미난 글로 독자를 만나고 싶단다. 잘 나가던 작가들의 슬럼프와 소프모어 신드롬과 붕괴는 너무나 흔하다. 그래서 더 크게 응원하고 싶다, 힘내요!
그리고 한은형의 글은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고, 반대로 그래서 과하게 피하기도 한다. 오래 전 스치듯 만났던 그가 필립 로스(의 구원 환상)에 대해 자기 확신과 단정의 말을 했었다.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발끈해 오픈마이크 타임에 반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 글에서 그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수련형이 아닌 “실전형”으로 살아온 그가 바라본 특정 작가는 남다를 것이며 자기세계관이 확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래 인용에도 그 신념이 굳건히 발광한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나고, 가장 큰 지지자도 나고,
나를 죽이는 것도 나고, 나를 살리는 것은 나라서 나를 잘 돌봐야겠다고,
나를 잘 돌보면 나머지는 저절로 굴러가게 되어 있다고. (214-215)
마지막으로 임대형의 글은 좋은 의미에서 난감하다. 아주 일부가 복사한 듯 나와 같으나 여러 부분에서 참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의 혼란이 나를 감싼다. 주제 파악의 ‘선량함’으로 말을 아끼고 사회공포증으로 은둔하는 그의 습관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할 말은 또 다 한다.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이 음악이라고 정의한다.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큰 수성처럼 집착과 괴벽과 모순과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성향도 차분히 객관화할 줄 안다. 쉴 새 없이 다가오는 무례와 몰이해를 견디느라, 냉소와 염세주의 ‘방패’를 꺼내들 수밖에 없다며 자기 위치를 정확히 밝힌다.
적당한 도덕적 무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