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행위 그 자체, 삶에는 오직 한 가지 의미
신프로이트학파의 인간중심 정신분석을 연구했던 사회심리학자이자 <자유로부터 도피>을 쓴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이다. 삶의 의미는 사는 행위 그 자체라고,
이 책의 지은이 프랭크 텔리스는 임상심리학자이자 작가다. 그는 코로나 19의 대유행으로 부쩍 늘어난 심리학 관련 서적들, 찾는 사람들이 많이 진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명쾌한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누구도 제대로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심리치료의 유형을 정신분석학, 인본주의적 실존주의, 인지적 행동주의 등 세 가지로 나뉘지만,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을 제외하고는 심리치료의 지적 유산은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인터넷이나 대중적인 심리학 서적 등은 많이 나오지만, 심리학자들의 핵심 아이디어는 외전, 왜곡, 지나친 단순화 추세와 경향이 보인다. 지금처럼 정신적 고통을 받는 이들이 늘어나 심리학이나 정신 건강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 때인데도 말이다.
심리치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삶에 관한 많은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지은이는 주장한다. 이 책의 감수자 심리학자 김정택 신부도 심리치료에 관한 더 많은 아이디어와 잠재적인 치료법이 제안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14장으로 구성됐으며 대화를 비롯하여 안전과 통찰, 왜곡, 정체성, 이야기, 나르시시즘 그리고 섹스, 열등감, 욕망, 역경과 의미, 수용 등을 심리치료의 열쇳말별로 현상과 연구자들의 논의를 심리치료의 유형이나 특정 학파 등 이론의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을 찾아 절충해나가면서 심리치료의 주요 인물과 그들의 공과도 톺아본다. 지은이는 이 책의 부제를 "마음을 치유할 심리치료사의 핵심 아이디어"라고 붙였다.
산다는 것, 사는 그 자체
인간의 본능인 무리 활동에서는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활동은 상호의사소통이다. 신생아는 어머니 품에 안기는 순간에 소통은 시작된다(존 볼 비의 애착이론 등). 눈을 마주치고, 표정을 읽는 비언어적 직접적인 대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지만, 소통이 드물어지고, 엄마들은 자녀들보다 전자 기기와 상호작용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2014년 소아청소년과 저널에서 실린 연구결과). 사람들은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노력이 필요하고, 부담이 크고, 심지어는 혐오스럽다고 말할 정도다. 일본에서는 정보기술 발달이 개인 간의 친밀도와 국가 출생률에 급격한 하락을 초래했다고….
결국, 대화의 부재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점, 이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개인의 고립, 외로움 등은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진다. 모든 대화가 같지는 않다. 어떤 대화 형태는 다른 형태의 대화보다 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심리치료가 최적의 대화 특징이 무엇인지 유용한 지표를 제공할 수 있을까?
안전은 원초적 본능, 최적의 삶은 특정한 과업의 완수에 따른 결과
다른 동물보다 상대적으로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 늘 불안한 외부환경에서 벗어나 ‘안전’을 찾는 것이 원초적인 본능이다. 안전을 찾는 무의식, 태아기의 공생적 의존 상태는 안전지향이자 사람 간의 유대다. 안전함을 우리 일상과 가정을 연관시켜볼 때 다소 무미건조하다. 우리가 너무 안전하다고 느낀다면, 우리의 관계는 잠재적으로 지루하고 예측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과 공기처럼.
통찰력 또한 그렇다. 프로이트의 인간에 대한 설명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된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통찰력이 부족하므로 우리는 자주 자기 패배적인 행동 패턴을 반복한다. 인간에는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인간은 이성적이라고 본다)와 반대로 전혀 그렇지 않다는 프로이트, 실제 통찰력은 큰 노력이 필요하다. 콤플렉스(실은 융이 먼저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무의식적 지식과 관련된 감정의 집합이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리의 세계, 인간의 뇌, 신경의 조화인가, 마치 우주의 신비처럼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비유일 듯하다. 나르시시즘, 이른바 자기애는 사람을 어떻게 조정하고, 다루는지를, 섹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성욕이란 기제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본능적인 것, 이외의 또 다른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열등감은 우월감에서 비롯된 거울에 비친 반대편의 모습인지, 대척점인지, 아울러 욕망과 역경, 의미, 수용, 이 모든 것들이 인간 내면의 감정을 이루는 요소인지 아니면 제각각의 따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지, 바로 마음을 치유할 심리치료사의 핵심 아이디어를 다시 톺아봐야 할 이유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종교를 찾고, 심리상담사를 찾고, 심리치료에 관한 사회적 평가, 자본주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불평의 해로운 영향에서 관심을 돌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게 함으로써 급진적이고 계몽된 사회 정책의 실행을 무기한 연기시킨다고. 고통의 더 중요한 사회적 원인인 부족한 주택, 빈곤, 기회의 부족에 대해 고려를 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정신병에 걸리는 이유는 다양하다. 진화적, 생물학적, 정신역동적, 인지적, 대인관계적 원인이 있다. 부의 재분배의 왜곡과 불평등이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라고 보고 이를 해소하면 정신 건강이 회복된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부자들 역시 우울하다.
더 평등한 사회는 더 행복한 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문화에 내재한 불안을 경험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빅터 프랭클의 말, 개인은 개별적인 의미가 아닌, 자기 삶의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위대한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할 수 있도록 성찰하라고 조언한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