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저자가 1935년에서 1945년까지 프랑스의 비바레리뇽 고원에서 ‘평화’를 연구하고자 고원의 주민들과 망명 신청자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며 남긴 기록이자 에세이다. ‘폭력’은 연구하기 쉬우나 ‘평화’는 왜 연구하기 어려울까라는 것이 질문의 시작이다.
평범해 보이는 고원에서 평화에 대한 연구 여정은 길고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의미하고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선함의 뿌리’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많은 난민이 이곳 비바레리뇽 고원으로 찾아왔다. 그곳에 가면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곳 주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개신교도, 가톨릭 신부들, 가난한 이들과 정치적 난민,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왔다. 저자의 먼 친척이기도 한 ‘다니엘 트로크메’는 이곳에서 난민 아이들에게 전쟁 중 임에도 일상과 같이 학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자신의 삶을 바쳐 이들을 보호했다. 아이들에게 ‘집-추위 속의 온기’를 주기 위한 그의 선함을 따라가는 여정에서 저자는 ‘선함의 뿌리’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한다.
그에게 집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집은 꼭 장소가 아닐지도 몰랐다.
집은 추위 속의 온기였다.
(p.115)
지금도 고원에는 망명자신청환영센터CADA가 있어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의 만남과 교류 속에서 저자는 학자로서의 시선에서 그냥 사람의 시선으로 변화하게 된다.
“하지만 그게 아쾨유accueil(수용)예요. 알겠어요? 그게 바로 사람을 수용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예요. 누군가가 문간에 나타나고 그 사람을 집안에 들이면 가끔은 나쁜 일도 일어나요. 원래 그런거예요. 그러니, 믿음을 가져야 해요. 하지만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결국에는 올바른 일이 벌어지리라는 믿음이 필요해요. 상황이 마땅하게 흘러가리라는 믿음이요.”(p.275)
“기도하고 나면, 쓰인 대로 하고 나면 삶이 다르게 보여요. 어떤 사람이 웃고 미소 짓는다고 해서 그 사람한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요? 우리는 희망을 품어야 해요.” (p.413)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기꺼이 나를 희생하고 다른 이를 돕는 이들의 마음이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한 이들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저자의 선함의 뿌리를 찾는 여정에서 본 것은 결국 믿음과 희망, 그리고 끝없이 행해지는 사랑이다. 올바르게 흘러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품고, 매 순간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갖춤으로써 우리는 당연하게 선함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느끼게 된다.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선함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더 의미있는 책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 시도해야 하는 것, 매 순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 습관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품성의 날줄과 씨줄이 되어서 언젠가 바람이 불고 경보가 울릴 때 그 품성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p.510)
√독서모임을 하기에는 다소 두껍지만 다양한 토론이 가능할 듯하다. 난민 문제, 홀로코스트, 역사적으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현재 전쟁 중이라 더 날카로운, 종교적인 것에 대한 것들, 개인의 선함, 그 확장성 등등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전쟁의 역사'다. 야만의 역사는 기록하기 쉽다. 생명은 숫자로 치환되고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록 들이 많아. '선'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한 연구는 눈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리고 변함없는 선을 얘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작가는 인간에게서 순수한 선의 덩어리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연구가 필요함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의 악함은 그만 얘기해도 될 정도로 많으니까.
2차 대전, 홀로코스트와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집단적 선행'이라는 낯선 행위로부터 선의 결정을 찾으려 했던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 책은 생각의 힘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인간의 본색을 드러낸다라고 한다. 생존의 문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음을 우리는 고고한 사람 혹은 성인이라고 얘기한다. 작가는 그 모든 것에 사랑이 있음을 얘기한다.
2차 대전 나치를 피해온 수천 난민을 품은 마을 비바레리뇽 르 상봉 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이를 지킨 귀족 청년 다니엘 트로트메. 전쟁의 역사를 더 이상 연구하고 싶지 않았던 인류학자가 좇았던 '선의 역사'. 아무리 종교적이라고 해도 아무리 과학적이라고 해도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우리에겐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모든 것을 바꾼다. 어린 왕자가 행성에 두고 온 장미처럼 어딘가에 있을 아름다움은 세상을 눈부시게 한다. 작은 것은 무한의 힘을 가진다.
집단은 함께 기억한다. 오늘을 위해 함께 기억한다. 내가 그러고 싶거나 다른 사람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종종 전체주의에 악용되는 것처럼 타락되기도 하지만 사회의 기억은 중요하다. 신경 쓰이는 것이 많을수록 과학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집단적 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의 입장에서는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우린 너무 싶게 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선을 행한 사람들은 상대를 인간이라는 사실 이외에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다. 사회는 똑똑한 어른들이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 편견 없는,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이다. 그들이 없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꿈꿀까?
종족이나 인종. 그리고 국가. 그리고 문화.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테두리에 의해 만들어진다. AI가 순식간에 번역을 해내는 시대가 되더라도. 한 문화의 언어는 다른 문화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짧은 단어로 번역을 하면 오해가 생긴다. 말이 많아진다는 건 서로가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는 거다. 자기의 것을 완벽하게 설명해 내기 위함이다. 열린 마음이다. 그것은 변화의 시작이다.
모두가 합리적인 것만을 얘기하는 동안 비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그건 꽤나 신선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많은 이야기는 가까이 보면 비합리적인 행동들이다. 작가가 찾아 떠나는 다니엘의 이야기도 그런 이해할 수 없음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행동은 그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표현했기에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해할 수 없을 행동에는 그를 만든 언어가 존재했을 것이다.
비바레리뇽 고원은 현재도 유럽 전역의 난민들을 품고 있다. 고원은 지금도 많은 아이들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지워내고 있다. 전쟁을 숫자놀음으로 바꾸는 것이 과학이라면 과학을 신뢰하더라도 신뢰하지 못한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어느 순간에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랑이 주는 진실을 믿어야 한다.
인류학자인지 인문학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의 서정적인 문체와 어느 소중한 것을 찾아 나서는 저자의 간절함이 묻어난다. 여행을 하는 동안 새로운 생각이 덮치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감동을 받는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감동적인 장면을 만나길 기대하는 동물이니까. 인간에게는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장면전환과 생각이 파고드는 문장이 많아 쉽게 잃히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에 그리움이 녹아 있는 느낌이다. 뭐라고 딱 정리할 수 없지만 머릿속에 잔상이 남아 있다. 이 또한 비합리적인 경험일까. 책 속의 메시지가 뚜렷하게 남지 않지만 어떤 아름다움을 만났었던 희미한 추억이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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