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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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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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 사회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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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의 기아 현장 리포트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c******4 | 2023.01.31 리뷰제목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기아현장 구호 업무를 담당했던 장 지글러의 기아현장 리포트이다. 인류의 식량 생산량은 연간 120억명이 먹을 수 있는 정도인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하루에 10만명의 어린아이가 기아로 죽어가야 하는지 원초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기아 현장의 모습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들려준다.   2007년에 처음 쓰였고 2016년도에 개정판
리뷰제목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기아현장 구호 업무를 담당했던 장 지글러의 기아현장 리포트이다. 인류의 식량 생산량은 연간 120억명이 먹을 수 있는 정도인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하루에 10만명의 어린아이가 기아로 죽어가야 하는지 원초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기아 현장의 모습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들려준다.

 

2007년에 처음 쓰였고 2016년도에 개정판이 나왔다. 통계 숫자의 업데이트 필요성을 있지만 큰 흐름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부의 분배는 플랫폼 경제의 등장과 세계화의 진전으로 더 불평등해졌다. 상위 1%가 전 세계 부의 99%를 차지하는 사실에 분노한 미국시민이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시위를 한 걸 잘 기억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아프리카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아 사태의 양상과 본질을 추적해 고발한다. 사막화와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량 격감과 같은 경제적 요인에 의한 기아문제도 중요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하에서 이해관계자들의 역학관계에 의해 악화되고 있는 구조적 기아문제에 촛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먼저 저개발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권력의 부패, 부족간 전쟁, 인프라의 부족 등 인도적 지원의 효과를 갉아먹는 요소들을 고발한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식량지원 때에도 문제가 되는 점이지만, 인도적 지원이 원래 목적대로 사람들 구호에 직접 투명하게 사용된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 결과는 뻔하기 때문이다. 원조보다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이 중점적으로 고발하는 것은 더 큰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이다. 자유시장주의로 개변되는 세계경제질서 속에서 이윤추구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자본가들의 행동은 기아라는 원초적 문제조차 눈을 돌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남반구 농경지 약탈, 식량 투기꾼들의 주식을 대상으로 한 투기,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을 태워 만드는 농업 연료, 유럽 연합의 농업 덤핑 정책 등을 고발한다.

 

기아 현장의 문제를 쉽고 생생하게 전해주기 위해 저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망인 먹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체계적인 대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인류는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하루 3끼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지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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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기아의 진실을 대면하고.. 평점10점 | g******1 | 2016.04.11 리뷰제목
얼마전 영화 헝거를 보았다. 아일랜드 단식투쟁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는 단식투쟁의 역사적 의의보다는 단식이 불러오는 죽음의 과정 그 자체에 집중했다. 굶어죽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큼 평화롭지 않았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는 폭력적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기암 환자의 비참한 모습과 닮았다. 몸속의 세포들의 활동에 동력이 되는 모든 양분이 소진되면 이제
리뷰제목

얼마전 영화 헝거를 보았다. 아일랜드 단식투쟁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는 단식투쟁의 역사적 의의보다는 단식이 불러오는 죽음의 과정 그 자체에 집중했다. 굶어죽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큼 평화롭지 않았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는 폭력적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기암 환자의 비참한 모습과 닮았다. 몸속의 세포들의 활동에 동력이 되는 모든 양분이 소진되면 이제 더이상 기력을 잃은 세포들로 구성된 몸의 기관들이 기능을 잃는다. 조금씩 기력을 잃은 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음과의 경계를 끔찍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소화기관은 천공으로 내출혈을 일으키고, 궤양으로 가득한 피부는 썩어들어 가고, 뼈와 근육은 몸을 움직일만한 구동을 잃어 움직이지 못하며, 망가진 피부들은 이불이 피부를 건드릴 수도 없는 상태가 되고, 면역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면 간, 신장, 허파, 심장, 뇌 등의 필수 기관됴 염증으로 차차 기능을 잃고 죽어간다. 그러한 고통은 신체에 남아 흐르는 당을 소비하는 최초의 72시간이 지난 후부터 발생하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점점 심해져간다. 이것이 굶어죽는 것의 실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굶어 죽는 일은 단순히 그냥 배가 고픈 상태로 기운이 없는 상태로 고요히 죽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남아 돌아가는 먹거리가 없어서,  이렇게 끔찍한 상태로 내몰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일까? 현재 지구 인구의 6~7명당 1명 꼴인 10억명 이상이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영양실조와 그에 따른 불구 상태에 놓여져있다. 매일 지구상 3만 7천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죽어가고 있고, 3분에 1명 꼴로 비타민 A 부족으로 실명한다. 아프리카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서 전체 인구의 36퍼센트가 기아에 노출되어 있다고 한다. 인류는 힘을 합쳐서 더 잘 사는 방향으로 나가려고 할까? 과거에 비해 기아는 조금씩 더 해결되어 가고 있는중일까? 천만의 말씀이시다. 기아로 인한 사망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인구증가율에 따른 비율은 감소). 사라하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1972년과 2010년 사이의 심각한 기아 상태의 숫자는 8천2백만명에서 2억 2백만명으로 급증했다. 전쟁 난민과 긴급 구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WFP(World Food Programme)의 1년 예산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평균 60억달러에서 36억 달러로 줄었다.  책이 처음 출간된 1999년 이후 오늘날까지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는 늘었다. 


왜, 무엇때문일까. 식량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엉터리 주장으로 밝혀진 멜서스의 이론이 옳았던 것일까. 실리콘밸리의 눈부신 과학 기술이 우리의 문화를 송두리채 흔들어 놓는 동안, 반대로 우리는 늘어나는 인구를 먹일 수 있을만큼의 식량증산에 실패한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73억명의 지구의 인구는 

정상적이라면 120억명을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농업생산량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主食) 가격은 최근 10년새 두 배 상승했다. 파키스탄에서 예방 캠페인을 통해 사라졌던 소아마비는 5년 만에 영양실조로 면역력 결핍 상태에 놓은 아이들을 강타해 수천명의 아이들을 불구로 만들었다. 만일 이렇게 지구상의 인구 1/7을 아사로 몰아가고 있는 기아가 식량 부족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대량 학살이다. 그 대량학살은 주식을 대상으로 한 투기, 남반구 농경지 약탈, 농업 연료, 농업 덤핑 등으로 나타나는 무지막지한 금융자본의 횡포로 모아진다. 


굶주림에 가장 처참하게 노출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최빈국들 농민들이 3천년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을 기다리던 농업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트랙터와 비료와 가축 종자 등의 도움 없이 오로지 인간의 노동력에만 의지한채 농사를 짓는 동안, 유럽연합과 OECD 국가들은 농민들에게 수출지원금을 지불하고 잉여농산물을 덤핑 가격으로 풀어놓음으로써, 그마저도 그렇게 어렵게 지은 농산물을 가져다가 팔 수 없게 만든다. 거대한 다국적 민간 기업 및 헤지펀드와 국가 펀드들은 앞다투어 이들 농민들의 경작지를 대대적으로 사들인다. 2010년 한 해동안만 4,100만 헥타르의 비옥한 농지가 이들 손에 넘어갔다. 이들 남아프리카 비옥한 토지에서 외국 투기자본에 의해 대량으로 매입된 토지에서 생산된 농작물들은 자국 시장에 독점 공급되거나 바이오디젤, 바이오에탄올등의 농업연료를 생산한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만성적 실업, 질병, 아동 성매매, 절망만이 남아있는 참혹한 도시의 빈민가로 내몰린다.


친환경이라고 알고 있는 바이오에탄올의 실체 역시 기아를 부추기는 대량학살자다. 바이오에탄올로 굴러가는 자동차의 50리터 연료탱크를 채우려면 어린이 한 명을 1년동안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옥수수 358킬로그램을 태워야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은행과 헤지펀드 등의 대규모 투기세력은 농업 원자재거래소로 몰려들어, 선물거래 등의 '합법적 수단'을 통해 천문학적 이득을 얻으며, 그 이득은 주식 가격 상승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스위스의 앙드레 S.A,  미국의 컨티넨털 그레인, 미국의 카길 인터네셔널, 프랑스의 루이 드레퓌스 등의 세계 거물급 곡물거래상들의 상업함대가 전세계 바다를 누비며 전세계 곡물의 매매가를 결정하는 화이트컬러 강도들이다.  전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1/4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은 과잉 영양이 만연된 질병으로 퍼질만큼 고기를 먹어치운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의 한 거대 시설에서 사육되는 소들이 먹는 옥수수의 양이 만성 기아로 허덕이는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많다.  이것들이 먹을 것이 넘쳐나는 지구상에서 기아라는 이름의 대량학살이 종식되기는 커녕 더욱 심화되고 있는 이유다. 내전과 자국의 이익에 따라 유엔이나 '경찰국가'조차 방관하는 군부의 약탈 등 군부와 독재와 같은 정치적으로 취약한 나라에서 특히 기아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동안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대략 감으로 알고 있었지만 책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접하면서 약탈적 금융 자본의 세계화의 실체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 거대 자본의 성격과 약탈적 구조에서 부당한 혜택을 얻고 있는 선진국의 사람들이 이 불행을 함께 나누어가져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잘사는 서구인들의 머리속을 물들인 생각, 기아를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로 여기는 끔찍한 생각이 나선다. 지금 중년의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이론중 가장 잘못된 것 중 하나가 멜서스의 인구론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멜서스는 그 엉터리 인구론에 따라 기아가 인류의 지속적 삶에 필수적 기능을 한다는 단순히 엉터리이기만 한 주장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발전이라는 시각으로 채색하는 위험한 이론을 퍼뜨린 인류사의 원흉이다.  기근으로 인구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는 생각은 고매한 중산층들의 양심에서 가책을 제거하고 탐욕을 정당화한다. 기아를 자연적으로 지구의 과잉인구 조절의 수단으로 인식함으로써 이제 한쪽으로 치우친 자본의 부가 주는 아늑함을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가난과 기근을 부추기는 여러 요인들은 앞서 말한 탐욕적 거대 자본과 약탈적 세계화와 함께 각국의 개별적인 사회 구조적이고도 정치적인 원인들과 맞물려 있기에 기근이 심한 여러 지역들은 기근에 앞서 숱한 사연들을 품고 있다. 종교와 민족국제 정세를 뉴스로만 접해 간간히 전쟁과 학살, 자연재해 혹은 테러 등과 같이 단일 사건으로만 알고 있는 지역들이 가진 수십 수백년에 걸친 반목과 갈등의 역사적 이야기들은 세계와 기아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소말리아, 르완다, 시에라리온 등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에 얽혀있는 인종간의 갈등, 자원 전쟁, 국제적 금융그룹과 국제적 기업등의 외국세렵과의 결탁 등은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에 따른 실향민과 난민의 발생에 평화로운 선진국들이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말하는 의식주 중 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먹는 것이다. 너덜너덜한 거지꼴의 옷을 입더라도,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오는 허술한 집에서 여러 식구가 한방에 모여 자더라도, 먹을 것만 충분하다면 최소한 죽지는 않는다. 영양실조에 따른 장님이 되지도 않는다. 면역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배가 불룩해지고 걷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일은 모면할 수가 있다. 무슨 상황에 처하더라도 최소한의 생명 연장과 건강 유지에 필요한 영양이 공급된다면 말이다. 그 공급이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의 속성에 따른 한 쪽의 혜택에서 분배될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이제 어쩔 수 없는 그 약탈적 자본의 재순환의 늪에 빠진 현대 사회에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는 힘없는 독자 입장에서는 힘들어보이므로, 단순 원조가 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기아에 빠진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이를 통해 전세계 기아의 실상을 알리고,,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에게 작은 변화들을 이끌어 낼 화력을 제공하고, 또 그 작은 힘들이 모이고 또 모여 그 희망의 불씨가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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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평점9점 | g*******7 | 2020.11.01 리뷰제목
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TV를 보면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 아이의 모습과 함께 기부를 요청하는 광고를 자주 보게 된다. 사내 식당에서는 잔반 줄이기를 독려하는 캠페인이 진행중인데, 다른 곳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으니 나로서는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여러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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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TV를 보면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 아이의 모습과 함께 기부를 요청하는 광고를 자주 보게 된다. 사내 식당에서는 잔반 줄이기를 독려하는 캠페인이 진행중인데, 다른 곳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으니 나로서는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여러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각국에서 남는 식량을 굶주리는 지역에 공급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그리고, 기부금은 과연 TV에 나오는 아이들과 같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것일까? 불쌍한 그들의 모습을 비춤으로써 사람들의 인식의 전환과 동정심을 유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부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정확히 기부금의 얼마가 원래 목표인 그들을 돕는 데 쓰여지는지 밝힌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의문이 꼬리를 물면서 정작 왜 이 세계에는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많은 지에 대한 본질에서 멀어진다. 단순히 그들을 도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만, 기아의 원인은 고사하고 실제 그들을 돕는 프로세스는 물론 현황조차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장 지글러가 자신의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을 다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관심을 가져볼만한 책이다. 특히 기아가 특정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점점 심각해지는 세계의 불균형과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변화된 의식과 함께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노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천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수억 명이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런 일로,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는 그 주범이 살인적이고 불합리한 세계경제질서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 p. 22 中에서 -

 장 지글러의 말처럼 그동안 기아는 식량이 부족한 곳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비극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은 자발적인 선택의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의 근본적인 원인이 세계경제질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세계의 구조적인 문제가 기아에 영향을 끼친 것이기 때문에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러한 문제점은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져야 하며 기아를 해결하는 과정에 적극 참여를 해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기아로 인한 떼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라는 저자의 말을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소말리아의 사례를 보면 왜 저자가 기아의 문제를 제도 또는 구조에서 찾는지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소말리아의 군벌의 세력 다툼으로 식량이 무기화 되었으며, 해외의 원조 물품을 실은 배를 수용할 수 있는 메르카 항은 그 시설이 빈약하여 극소수의 식량 지원 물품만을 확보할 수 있으며, 더욱 큰 모가디슈 항은 아예 그 지역 군벌에 의하여 폐쇄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소말리아가 겪는 기아가 단순히 자연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군벌 난립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소말리아의 기아 사태는 더욱 장기화될 것이며, 또한 그들에 대한 지원 역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굶주림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더 심해지고 있어.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 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 죽고 있는 거야.

 - p. 37 中에서 -

 지구의 식량은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한쪽에서는 식량이 남아돌고, 다른 곳에서는 기아가 허덕이는 이유는 바로 식량 분배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애초 식량이 모자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아와는 관련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하여 일정 부분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점점 높아지는 지구의 인구밀도를 기근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고 보는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기아를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로 주장하고 있으니 장 지글러가 왜 이 글을 쓰면서 사람들의 기아에 대한 의식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지 깨닫게 된다. 기아를 산아 제한의 수단으로 여기면서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은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마저 내포하고 있으니 기아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을 돕는 것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장 지글러는 기아를 '경제적 기아''구조적 기아'로 분류한다. 먼저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를 말하며,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라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를 통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아를 그 성격에 맞게 나눔으로써 그에 맞는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장 지글러가 보다 주목하는 것은 '구조적 기아'이다. '경제적 기아'는 자연적인 재해 또는 전쟁과 같은 원인으로 발생되기 때문에 그러한 돌발적인 위기가 지나간 이후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구조적 기아'는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 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에서 그러한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기아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구조적 기아'는 비윤리적인 것들, 이를테면 난민 캠프에서 한정된 구호 물품을 감안하여 어린 아기들 중 생존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버젓이 행해지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단순히 외부의 구호와 지원만 있다면 기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러한 지원 자체는 면밀한 검토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장 지글러의 설명은 구호와 지원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단이나 아프가니스탄에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수많은 물품을 떨어뜨리면서 "드디어 구호의 손길이 닿다!"라고 외치는 언론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구호가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방법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은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방법은 그것을 수거하려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전문 의료지식을 바탕으로 대단히 면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구호는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다.

 

 더불어 장 지글러는 기아를 초래한 식량 분배의 본질을 다룸으로써 점점 불균형이 심화되는 상황도 다루고 있다.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는 사실, 세계시장에서 비축된 식량의 가격이 종종 인위적으로 부풀려진다는 사실, 자국의 농민들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농산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거나 폐기하는 정책을 수행하는 선진국들의 행태는 기아의 원인이자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장 지글러는 곡물 메이져 회사들을 '화이트칼라 강도들'이라고 비판하는데, 정작 이들은 자신들의 이윤 추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신자유주의'와 기아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것의 대가가 한 세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배고픔의 저주가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된다는 거야.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수백만의 엄마들이 매년 지구 곳곳에서 수백만의 건강하지 않은 아이들을 낳고 있어.

 - p. 63 中에서 -

 가난의 대물림처럼 기아마저도 대물림이 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태어나자마자 곧 죽는 아이들을 위한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라든지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는 표현들이 그곳에서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닌 것이다. 한국에서는 가난의 대물림으로 흙수저가 금수저가 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한탄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성공이 아닌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인데,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것에 따른 문제라는 점이다.

 

 더구나 기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기아를 아예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 사례까지 등장하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르완다에서 대량학살을 주도한 후투족에게 유엔이 식량을 지원하면서 그들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며, 북한의 경우에는 기아원조 물품 중 3분의 1 또는 절반 정도가 군부와 비밀경찰이 가로채고 있어서 이는 기아 해결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으로도 비춰질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는 북한의 난민들을 돕자는 말이 나와도 그것이 결국 북한 군대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반대한다는 입장이 팽배한 상황이니 기아를 해결하는 선한 의도가 의심을 받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 정책은 아예 기아를 일으켜 주도권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스위스의 대형 이유식 업체는 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칠레 아옌대 정권의 요청을 무시하며 역시 식량을 무기화하였으니 기아를 극복하는 대상이 아닌 수단으로 활용한 예로 볼 수 있다. 심지어 가나와 북한은 수용소 생활을 통하여 기아를 강요함으로써 체제 유지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굶주림을 국가 테러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자주관리 정책'을 채택한 탈중앙집권화, 인두세 폐지, 토지의 효율적인 활용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했던 부르키나파소의 토마스 상카라의 개혁은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 점을 들어서 기아 극복의 성공적인 예로 삼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토마스 상카라의 성공이 주위 아프리카의 독재 정권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점과 선진국들의 그들 나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토마스 상카라를 죽이고 다시 기아에 허덕이는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내용은 기아를 해결하는 것마저도 정치적인 논리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평등이라는 부당한 역동성이 현재의 세계질서를 결정하고 있다. 한쪽에는 민족을 초월한 소수의 과두체제에 지배되는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학문적, 군사적 힘의 집중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미래가 불투명한 삶, 몇억 인구의 절망과 기아가 있다.

 - p. 162 中에서 -

 현재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아는 단순히 식량의 문제가 아니다. 분명 식량은 전세계 모든 사람을 수용하고도 남는다. 다만 그것의 배분이 오늘날 인간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이념과 제도로 인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발생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며 또 부끄러운 일이다. 기아에 방치되어 먹는 습관을 잃어버린 아기가 울음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을 스스로 멈추고 죽는 이 현실이 과연 옳은 것인가?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걸식 아동과 심지어 굶어죽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이 과연 그들 개인만의 문제일까?

 

 1. 인도적 지원의 효율화

 2. 원조보다 개혁이 먼저

 3. 인프라 정비

 4. 시장원리주의의 폐해

 5.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

 장 지글러는 이 책을 통하여 기아에 의한 생명 파괴에 대처하는 방법을 위와같이 제시하고 있다.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기아의 원인과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 그리고 현실적인 구호와 관련된 것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식량에 대한 접근이 지불능력에 달려 있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배불리 먹을 수 없다. 기아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맡길 수는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우리로서는 저자가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아는 부드러운 죽음이다. 점차 쇠약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없이 죽는 것이다."

 장 지글러가 기아에 의한 죽음을 보면서 스스로를 세뇌시킨 말이라고 한다. 물론 이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반성하면서 기아를 해결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혹시 기아를 직접 느낄 수 없기에 그저 방관하거나 위와같은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서 이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면서 기아가 갖는 진정한 의미와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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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n****o | 2020.11.01 리뷰제목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장 지글러(Jeon Ziegler) 지음 | 유영미 옮김 | [갈라파고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를 읽고 올 가을에 발표된 노벨평화상은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에게 주어졌다. 이
리뷰제목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지글러(Jeon Ziegler) 지음 | 유영미 옮김 | [갈라파고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를 읽고



가을에 발표된 노벨평화상은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에게 주어졌다. 조직은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 관련조직으로, 1963년에 창설되어 기아와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인도주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수상은 굶주림을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분쟁지역에서 평화의 조건을 마련 공로로 결정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제조직의 존재와 활동은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배고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배고픔이란 단어를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대체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가져보았을지 모른다. 이런 의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일까 자문해본다. 역사 속에서 찬란했던 문명을 일군 아프리카와 남미의 고대 왕국이 오늘날 굶주린 아이들로 넘쳐나는 곳이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약속한 물질적 풍요는 지금도 10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1 굶어 죽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지글러의 저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나에게 던졌주었고, 책을 읽으며 나만의 답을 찾고자 했다.    


     지글러는 스위스 출생의 제네바 교수로 사회학자이자 기아문제 전문가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유엔의 WFP(세계식량계획)에서 조사 자문 활동을 하며 기아로 고통받는 세계의 아이들과 만나고 현장을 목격했다. 책을 이후에는 유엔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도 활동했다.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에는 사막화 방지 협약에 소속되어 지구의 사막화 방지 활동에도 참여하는 중이었다.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유엔 기구에서 일하는 아빠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결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독자가 접근하기 쉬우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들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저자는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대를 이어 고착화된 불평등에 의문을 품었을 같다. 소들에게 주는 곡물 사료는 남아도는데 인간은 굶주려야 할까? 무고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생존의 위기에 처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현실이 과연 정의로운 세계일까? 저자는 스위스인이면서 스위스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문제를 곧바로 비판하기도하고, 유럽인이면서도 유럽을 식민지 약탈자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 세계 현장을 누비며 목격한 인류의 삶의 단면 고스란히 저자의 문제의식을 통해 책에 진지하게 때로는 도발적일 정도로 솔직하게 담겨있다.


     책의 원저가 출판된 해는 1999년이고,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이 2007년이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기아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계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단서나, 끊이지 않는 테러와 난민의 증가는 인간에만 주목해봐도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특히 저자의 언급에 따르면, 2005 기준으로 세계인구의 7분의 1 달하는 8 5 명이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분명히 지구의 일정 인구는 더욱 가혹한 생존조건 속에 처해있다. 올해 전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것은 기본적인 생존 여건 속에서 살지 못했던 이들이 팬데믹 이후, 보다 어려운 생존 여건으로 밀려났음을 암시한다. 많은 이들이 관심과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지글러의 책은 우리가 회피하고 외면하며 추상으로만 머물던 기아문제를 독자의 안에서 느낄 있는 구체적인 모습과 질감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얼마나 심각한 부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지구에서 그토록 많은 (인간에 의한) 비극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의 얼굴이 담긴 표지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책에 담긴 진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가 저항감을 느꼈던 점이 바로 질문이었다. 지금 당장 나와 무관해보이는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 지글러의 책을 읽으며 줄곧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인간은 배양접시의 미생물이 아니다


     지글러는 기아가 순수하게 문제 자체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북한의 사례처럼 기아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국가 테러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네슬레의 사례처럼 일개 국제 기업이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어, 굶주리는 아이들을 담보로 기업의 경제적 이윤을 보호하는데 기아를 이용하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CIA 같은 권력기관이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쿠데타를 유도하고 내정 간섭을 하도록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기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가야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주체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토마스 맬서스를 지목한다.


     18세기 영국의 성직자인 맬서스는 단순한 수학을 분별없이 적용하여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맬서스는 인구수가 가난과 기아같은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조절될 있다는 자연도태설 주장했다.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25 마다 수가 두배로 성장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적으로 증가할 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가 생존 환경의 여러 조건에 의해 자연스럽게조절된다는 것을 말했다. 질병과 배고픔, 그밖의 환경적인 제약에 의해 인구수가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고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크게 공감을 얻었다. 맬서스가 주장의 이면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주장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생존하는 인구집단에 속한 관점에서 도태되는 인구 집단의 고통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론은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으로 기능했다. 유럽의 백인우월주의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담긴 이론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이론이 보여준 영향력은 실제로 엄청났다. 이론의 기저를 이루는 시각은 인간을 마치 시험실에서 배양하는 미생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의도로 배양접시 속에서 수가 조절되는 미생물이 결코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던 1789년에 영국에서는 성직자였던 맬서스가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맬서스의 이론은 인류가 인간다움을 지킬 기회에서 한층 멀어지는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론에 동의하는 자본가 권력자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에 정당성을 인정해준 셈이었다. 인간을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게 현실을 외면하고, 이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게 계기가 것이다. 여기에서 맬서스의 자연도태설 자본가와 권력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준 이론적 근거가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북미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금욕적인 도덕관에 기반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업인들의 제한없는 부의 창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심리적인 불편함을 덜어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데에 주목했다. 기업가들이 신의 소명과 섭리 개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결과 근면 성실한신자이자 자본가들이 기업활동을 통한 부의 창출과 축적 행위를 신의 축복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이것은 북미의 기업인들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 획득한 부는 신의 섭리에 의해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부유해진 자본가들은 수익의 10분의 1 혹은 이상을 기꺼이 교회에 내놓았을 것이다. 칭찬과 존경을 몸에 받으면서 말이다.


      맬서스의 이론 역시 자본 증식에만 눈이 거대기업가들의 책임과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적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역할과도 일면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볼만한 점은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적 해석의 실질적인 수혜자들이 시대를 넘어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 권력과 정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에게 가지 이론은 매우 유리하게 활용될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고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분명히 지구에는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있는 식량이 충분히 있다고 한다. 심지어 120 명까지도 먹여 살릴 있는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남는 식량을 공평하고 고르게 나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에 있었다. 소말리아의 사례처럼 소수의 군벌 세력이 사람들의 식량과 부를 가로채어 독점하거나, 브라질의 금융과두제에 속한 이들은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알면서도 무감각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생존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자본 정치 권력의 무감증은 맬서스와 동조자들이 지니고 있던 인종차별적,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있는 이들에게 당장 내일의 삶을 기약하기 힘든 10 여명의 운명은 추상에 불과했다. 지금도 선진국의 소들은 넘쳐나는 곡물로 배를 채우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당연하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책을 읽고나서 생각은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이 언제나 피지배층의 삶을 손안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팽창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만 보아도 이름과 모습을 달리 왔을 여전히 피지배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 권력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구도를 만들어 세계를 장악했고,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이윤을 얻기 위한 자유시장의 자유 지키기 위해 지구환경 생명의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이용했다. 결과 생태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해왔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양산해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를 이어 물려주는 빈곤과 기아, 테러리즘과 환경 난민을 포함한 제반 문제는 결국 자본과 권력을 지닌 세력이 만들어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들은 결코 신의 결정이나 신탁에 의해 주어진 운명도, 혹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힘을 가진 소수 혹은 집단이 기획한 일들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혹은 국제통화기금, 시카고 곡물거래소나 월가의 금융자본가들 같이 시대와 지역별로 다른 이름과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집단에 결탁하여 이들의 손발이 되고 이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소말리아의 군벌과 같은 정치 권력이 이들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기관들 자체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다. 기관들의 권력자들이 보여주는 판단, 그리고 이들의 행보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으면 해결할 있는 자들이다. 자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존중과 관심 없이 이윤극대화라는 가지 원칙에만 충실한 이들의 처신을 문제삼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에서 개별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은 이렇게 거미줄처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세계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인간성의 위기에 도전을 받는 모든 현안들이 서로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건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글로벌화, 공기업 민영화, 불평등,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난민 발생, 도시와 농촌 사회의 격차 증가, 도시인구 빈민화, 그리고 우리가 매일 관찰하는 도시의 젠트리피케에션 마저도 모두가 누군가의 이윤극대화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의 패키지 기획의 결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으로 세계 은행 총재의 자리에서 사임한 김용 총재의 사례를 보아도, 기관들이 자본 권력의 이익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있다. 전체에서 빛을 발하는 지글러의 통찰은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은 이해하기 쉽고 가벼운 대화체 형식으로 쓰여 있지만 저자가 전달하는 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기 전에 나에게 물었던 질문은 우리가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 였다. 나름의 이유를 찾아본다면, 우선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학교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날마다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관한 진실은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은 인류가 처해있는 인간의 조건 생태계 모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은 결코 무관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유로, 그리고 우리의 무지로 인한 책임 회피를 당연시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굶주림과 관련한 문제는 복합적인 문제의 가지 단면일 뿐이다. 조금만 따저보면 많은 사람들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기아문제는 우리가 빈곤의 문제, 보건 위생 문제, 그리고 인권 문제 그리고 생태계 환경문제 등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단계를 넘어 다양한 현상들을 보다 시각에서, 하나의 복합적인 양상으로 바라보아야 같다. 영양섭취, 기아 문제는 결국 일상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이고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지구적인 규모의 사회정치적 권력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제대로 안다는 , 또는 최소한 알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은 자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켜내기 위한 출발점이며, 결국 나를 돌보고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린 불편한 진실들을 알아야 한다. 알고자 노력하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저자인 지글러는 세계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목격한 진실을 간결하게 책에 담았다. 당장 다음날의 생존을 기약하기 힘든 아이들을 수없이 보았겠지만, 저자는 마지막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최근에 카뮈의 소설페스트 읽었는데, 소설 속의 주요 인물이 나눈 대화 구절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의사에게 당신에게 페스트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의사는 그건 끝없는 패배라고 답했다. 불가항력의 페스트 앞에 인간은 어김없이 패배하는 존재다. 의사는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실로 투쟁을 중단할 이유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뿐만 아니라 인간의 , 우리의 존엄을 위협하는 빈곤과 기아 문제 역시 소설 속의 페스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라는 페스트 자본가 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여전히 수많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좌절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글러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23) 그리고 희망을 위한 출발점은 바로 공감(진실을 아는 ) 연대(손을 내미는 )로부터 시작할 같다. 지글러의 마디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자에게 외치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23면)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 

(37면)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 시장 가격의 본질에 대해 (75면)

"지금 전 세계는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 와중에 있단다."
-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빈민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며 (125면)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152면)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153면)

"이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 저자는 이 ‘자유‘를 ‘자본을 위한 자유‘, ‘자유시장을 위한 자유‘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163면)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서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다.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기아 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방치할 수는 없다." (169면)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169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171면)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다." (176면)

"소리 없이 매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또한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18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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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서평_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평점10점 | a*****8 | 2016.06.05 리뷰제목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목차까지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단어는 굶주림이다. 굶주림은 밥 맛이 없어서 혹은 몸이 잠시 아파서 한끼 정도 먹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굶주림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위협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하는 한편 그 굶주림이 결코 그들만의 잘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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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목차까지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단어는 굶주림이다. 굶주림은 밥 맛이 없어서 혹은 몸이 잠시 아파서 한끼 정도 먹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굶주림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위협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하는 한편 그 굶주림이 결코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 해 주고 있다.

 

인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난 세기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비약적인 생산력의 증가는 맬서스 트랩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했지만 그것이 결국 모든 인류를 번영으로 이끌어 가지는 못했다.

 

동남아와 아프리카의 수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굶주림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과연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아프리카의 케냐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커피가 생산되고 있으며 토지와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하지만 그것을 활용하여 부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왜 일까? 커피를 그렇게 생산하면서 나도 커피를 적게 마시는 편은 아니다 그들은 더 잘 살지 못하는 것일까?

 

결론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서구의 자본들이 적은 인건비와 생산비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 하기에는 아프리카가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구성원(국민)들의 절대적으로 미미한 교육 수준과 적은 자본 등이 그들을 스스로 발전하는 저해 요소이다. 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자본과 기술력을 통해 아프리카의 자원을 개발하자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그 자원을 저가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원주민이나 해당 국가 국민들이 자립하게 지원하는 수준까지는 사업으로 이끌어 가지 않는다. 그들이 계몽되고 기술을 확보하게 되면 자신들의 이익이 그만큼 줄어들거나 없어지기 때문이다.

 

탐욕.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은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 결실은 모두가 아닌 자본가들에게로 집중된다. 굶주림의 구조적 해결을 위해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교육과 생산시설 그리고 자본을 제공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선진국들이나 국제기구에서는 단순한 원조에 그치고 있고, 선진국들은 그들이 현지에 투자를 통해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현지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뿐이지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거나 자본을 현지인들에게 직접 투자하여 삶의 기반을 만드는 것에는 인색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통계도 궁금해 졌다. 국가지표체계에서 제공하는 아동급식 제공현황을 보면 우리나라는 2005년에 약 21만명 수준에서 2010년 약 485,000명을 정점으로 하여 2014년에는 약 38만명이 급식을 지원 받고 있다. 이들은 복지차원에서 급식을 제공 받는다고 하더라도 방학이나 주말에는 역시 굶주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소득이 3만불에 육박하는 2016년도의 대한민국에서도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니 답답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책가들이 없는 것도, 재원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정책과 함께 윤리적인 접근도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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