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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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위기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리뷰 총점 9.2 (5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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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 사회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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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주간우수작 스토리 중독은 어떻게 서사의 위기를 초래했나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s****b | 2023.10.17 리뷰제목
한병철 교수의 신간이 소개되었을 때,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렵긴 해도 읽어봐야할 것 같다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의무감과 읽어봐야 또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될 것 같다는 당혹감. 카트에 넣어두고 몇번 고민을 하다 서점을 들러 내용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의 책이 늘 그렇듯 책이 두껍지는 않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인건지 그의 성향인지. 열장 정도 읽어
리뷰제목

한병철 교수의 신간이 소개되었을 때,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렵긴 해도 읽어봐야할 것 같다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의무감과

읽어봐야 또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될 것 같다는 당혹감.

카트에 넣어두고 몇번 고민을 하다 서점을 들러 내용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의 책이 늘 그렇듯 책이 두껍지는 않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인건지 그의 성향인지.

열장 정도 읽어보고 그래도 한번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서서 읽어보기로 했다.

뒤로 갈수록 어려워졌다는 후기가. ㅎㅎㅎ

 

제목에서부터 의아함을 자아낸다.

서사의 위기라니. "스토리텔링"의 시대가 아닌가.

오히려 이러한 스토리 중독 사회가 서사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 한병철 교수의 화두이다.

 

정보 과잉 사회는 그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외친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찰나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공유하고 공감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그 안에 의미는 없다. 사라져 버릴 정보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끝없이 공유하고 타인과 교류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셀링'이라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세상으로부터 충격받고 저항하고 간극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올릴 기회를 빼앗고 그저 '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이것은 이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역자 서문의 일부이다.

역자 서문만 읽어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 책과 함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있었던 터라 개인적으로 수많은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나에게 서사는 있는가. 스토리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비교적 최근에 '스토리텔링' 관련해서 업무지시를 받고 열심히 알아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홍보 관련 업무를 전혀 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놀랍게도 한 기업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주는 회사들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한줄, 또는 한 페이지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그에 따라 홍보컨셉과 방법을 정해서 일관성 있게 홍보를 진행한다는 것인데 꽤 그럴듯해 보였다.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것 역시 스토리텔링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보니 오히려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 것도 없었다면 창작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텐데, 우리는 역사도 오래되었고 꾸준히 내놓았던 스토리텔링 기조가 있었다.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듯.

하겠다는 업체가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업체에 맡기는 것은 포기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단발적으로 스토리텔링을 남발하며 제각각의 홍보를 하고 있다.

하나하나 보면 그럴듯하지만 뭔가 연결고리가 없는 이런 상태가 답답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해결책도 보이질 않는다.

스토리텔링만이 답이라며 많은 기업들이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내놨지만 사실 눈에 띄는 곳은 몇 없다.

<성심당>과 같은 스토리텔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탈진한 후기 근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강조된 '초심자의 기분'이 낯설다. 후기 근대인은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편히 쉴 곳만 찾는다. 어떠한 서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편안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된다. 후기 근대에는 어떠한 갈망도, 비전도, 먼 것도 빠져 있다. 따라서 후기 근대는 아우라가 없는 상태, 즉 미래가 없는 상태이다.

 

한병철 교수의 진단은 꽤 뼈아프다. 스토리텔링이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하는 스토리셀링으로 규정하며 결국은 미래가 없는 상태로까지 발전한다. 시간과 폭이 없는 좁은 궤도로 단축된 우리의 삶은 업데이트 강박을 불러오고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했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은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태,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소비로 환원되는 스토리셀링의 시대에서 새 시작의 힘이 있는 서사의 시대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한병철 교수가 진단한 새로운 화두 , <서사의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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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이야기가 사라지면 우리는 사라진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c****o | 2024.03.15 리뷰제목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사고로 머리에 충격을 받은 후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 푸네스라는 소년이 나온다. 그 기억력은 가히 천재적이어서 82년 4월 30일 동틀 무렵의 남쪽 하늘 구름 모양, 특정한 날 네그로 강에서 노가 일으키는 물보라의 모양까지 기억할 정도이다. 문제는 그 엄청난 기억력 덕분에 사물을 범주화 시키지 못하는 데에 있다.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본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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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사고로 머리에 충격을 받은 후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 푸네스라는 소년이 나온다. 그 기억력은 가히 천재적이어서 82년 4월 30일 동틀 무렵의 남쪽 하늘 구름 모양, 특정한 날 네그로 강에서 노가 일으키는 물보라의 모양까지 기억할 정도이다. 문제는 그 엄청난 기억력 덕분에 사물을 범주화 시키지 못하는 데에 있다.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본 개의 모습과 15분에 정면에서 본 모습이 너무 다르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이 둘이 하나의 존재라고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수 백만개의 정보는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사실일 뿐이다. 모든 순간에 새로 시작되는 사물과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병철 교수의 '서사의 위기'를 읽으면서 그 책이 떠오르는 건 너무 당연했다. 책의 중간에 데이터와 기억의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데이터는 모든 것을 죄다 기록하기만 하지만, 기억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큰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파편화 되어서 어떤 서사도 이루지 못하는 정보의 과잉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서사의 위기는 그 쓰레기 더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어떤 책에서 핵심을 끄집어 내는 작업은 녹록치 않다. 잘 읽히지 않는 부분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음미하고 나서야 희미한 윤곽이나마 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가면 어떤가. '이 작가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이 작가의 이 말을 기억하세요.' 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답만 적어서 건네준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정보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서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원격성은 우리가 그 이야기에 스스로 빠져들도록 유도했지만, 이제는 손에 직접 쥐어지는 정보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우리는 객관식 문제지의 답안지를 훔쳐보면서 답이 뭔지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야기에서 느끼던 서사적 긴장은 사라지고 무간격성의 정보가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무의미한 행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제 무엇을 보든 우리는 '그래서 답이 뭐라고 하셨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라고?' 되묻는 수준까지 오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서사의 위기이다. 

 

저자는 벤야민이 예찬한 헤로도토스의 예시를 든다. 이집트의 사메니투스 왕이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에게 붙잡혔을 때 이야기다. 사메니투스 왕은 페르시아의 개선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굴욕적으로 지켜봐야 했다.  자기 딸이 하녀가 되고 아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도 미동도 않던 그는, 자기 수하에 있던 늙고 허약한 하인을 알아보고 깊은 슬픔을 표출한다. 헤로도토스는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 서사의 본질을 파헤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야기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을 벤야민은 근대 초기 소설의 등장으로 본다. 심리분석을 통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만으로 근대는 화자와 독자 사이의 간격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를 무너뜨리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이다. 끊임없이 제공되는 정보는 이전의 정보를 순간 순간에 바로 대체하고 있다. 거리가 유지 되지 못한체 무간격적으로 제공되는 정보 덕분에 우리는 서사를 파악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다. 

 

이야기와 정보를 가장 잘 비유하는 말은 바로 '씨앗'이다. 벤야민의 말을 빌려 서사는 바로 '피라미드 안에 밀폐된 채 수천 년 보관된 발아력이 보전된 씨앗'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반해 정보는 '발아력이 결여된 티끌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야기와 정보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 문장이다. 이야기는 적당한 간격과 생각의 여지를 주면서 어떤 형태의 식물이 태어날 지 모르는 씨앗이지만, 정보는 주어지고 나면 그 의미를 더 곱씹어 볼 일 없는 티끌일 뿐이다. 서사는 계속 우리 주변에 머무르면서 상황과 생각에 따라 달라지지만, 정보는 그저 그 자체로 끝나고 아무런 결과물도 주지 못한다. 결국 이런 사회는 과거의 시스템을 전복시키려는 발전적인 생각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혁명적 파토스도 없다. 그저 '계속 그렇게 하기'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시간은 과거에서 이어져서 현재로, 현재부터 미래로 이어지지 않고 그저 현재, 현재, 그리고 다음 현재만 존재한다.

 

나에 대한 글을 쓴다면 그 책에 내 키가 몇 센티 였는지, 학교 성적은 몇 등급이었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 지에 대해 쓰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 떨어졌을 때 어떤 좌절감을 느꼈는지, 첫 사랑에 실패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 지에 대해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삶은 특정한 수치와 알고리즘으로 설명될 수 없다. 유튜브에서 뜨는 추천 영상이 내 취향을 말해줄 수 있지만 내가 왜 그런 영상을 많이 보게 됐는지에 대한 서사는 설명해 줄 수없다. 저자가 '서사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무한대로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더 명료한 답을 찾고, 더 정확한 수치를 제공받는 중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표면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숨겨진 의미를 되살리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실존의 장력을 확보하는 것이 위축되고 단편화 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서사의 긴장도 사라지고,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여백조차 존재하지 않는 스마트한 세상에서 우리가 정작 되찾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책을 읽고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 다만, 이 책의 띠지와 머리말에서 역자 서문에 좀 의문이 있다. 띠지에는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이다. 역자 서문에는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도식으로 하자면 [서사, 이야기] : [정보, 스토리]가 된다. 이야기와 스토리가 반대편에 있다고? 그러면 애초 원문은 스토리라는 단어를 어떻게 썼지? 책을 다 읽고 내가 추정하기로는 역자가 스토리라는 단어를 오용했다고 본다. 책 내에서 스토리라는 단어는 스토리텔링, 스토리셀링 그리고 인스타그램 '스토리' 이 세가지만 등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스토리가 이야기의 반대가 아니라, 일시적인 감상만 나열하는 인스타의 '스토리' 카테고리만이 이야기의 반대인 것이다. 책의 어디에도 스토리가 서사와 반대의 개념이라는 말은 없는데 역자가 처음에 이런 말을 써 놓아서 독자를 헤깔리게 한다. 역자 서문의 스토리는 그 범주를 축소시켜서 글 전체에서 말하는 이야기와 다른 개념으로 헤깔리지 않게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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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서사의 위기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c******l | 2023.12.31 리뷰제목
한병철 선생님의 책은 이전에도 여러 권 읽어보았다. 완전히 이해하고 내것으로 만드는것까진 바라지 않고, 그냥 도전해보는 정도...  이번에도 신간이 나왔다 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분이 서사, 이야기를 주제로 어떤 의견을 펼칠까 하는 궁금증이 너무 커 바로 도전하게 되었다. 그저 감탄만 나왔다. 한병철의 책은 절대 쉬운 편은 아니지만, 서사의 위기는 2023년
리뷰제목

한병철 선생님의 책은 이전에도 여러 권 읽어보았다. 완전히 이해하고 내것으로 만드는것까진 바라지 않고, 그냥 도전해보는 정도... 

이번에도 신간이 나왔다 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분이 서사, 이야기를 주제로 어떤 의견을 펼칠까 하는 궁금증이 너무 커 바로 도전하게 되었다.

그저 감탄만 나왔다.

한병철의 책은 절대 쉬운 편은 아니지만, 서사의 위기는 2023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햘 책인 것 같다. 사유하지 않는 삶, 이야기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도록 정신줄 꽉 잡고 살아보겠다. SNS는 서서히 줄여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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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삶은 이야기다.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평점6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d********9 | 2023.11.21 리뷰제목
발터 베냐민(1892-1940)은 말한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P.13)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 역사와 같은 옛 것은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현대사회는 정보로 가득 차 삶과 공동체의 의미를 잃어가는 서사의 위기에 놓여있다.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 놓여있는 사회를 비판하며 삶은 이야기임을 피력한다.
리뷰제목

발터 베냐민(1892-1940)은 말한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P.13)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 역사와 같은 옛 것은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현대사회는 정보로 가득 차 삶과 공동체의 의미를 잃어가는 서사의 위기에 놓여있다.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 놓여있는 사회를 비판하며 삶은 이야기임을 피력한다.


서사(이야기)와 대비되는 정보란 무엇이며 저자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먼저 정보의 사전적 정의는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한 지식. 또는 그 자료"지만,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보의 특징'이다. 저자는 정보는 이야기의 짜임이 없으며 정보만이 자극의 형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고 말한다.


"정보사회는 정신적 고도 긴장의 시대를 열고 있다. 정보의 본질이 다름 아닌 놀라움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기에 정보로 꽉꽉 채운다. 자극적인 정신적 고도 긴장의 상태가 지속되는 과잉활동성을 띤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는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사건들을 잇는 하나의 이야기다.


"정보는 단지 세상을 앞에 전시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손에 잡히도록 한다. 그와 달리 먼 곳을 가리키는 '기록'은 암시하는 바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이야기로 이어진다." 현실의 정보화는 직접적인 현존 경험들을 약화시킨다고 말하는데, 이는 현실의 정보화 자체가 애초에 완벽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경험이라는 것은 따로 떼어내어 정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을 "경험의 빈곤"이라는 도구를 통해 진단한다. 경험이 부재한 이들을 야만인이라 말하는데, 이 신 야만인은 경험의 빈곤을 해방으로 여기고 즐거워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또한 "내부적인 빈곤이 순수하고도 거침없이 통용되어 자기들에게 적당한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갈망한다."

 

야만인의 특징은 근대와 후기근대 둘로 나뉜다.

 

"미래와 진보의 서사를 가지고 다른 삶의 형식을 향한 갈망을 품었던 근대와 달리, 후기 근대는 새로운 것 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해당하는 혁명적 파토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후기 근대에는 출발 직전의 분위기가 없다. '계속 그렇게 하기'와 대안 상실로 힘이 빠져 있다. 이야기할 용기, 세상을 바꾸는 서사를 향한 용기를 상실했다. (P.36)

 

과거를 밀어내고 새로운 이념, 갈망을 가진 근대였지만, 후기근대는 어떤 희망조차 갖지 않으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로 들린다. 이는 현대에도 적용되는 굉장한 통찰이기도 하다. 이젠 청년들마저 끓어오르는 어떤 정의감이나 연대감조차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벤야민의 이론을 통해 그저 쉴 곳을 찾으며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되는, 미래를 잃은 현대사회를 비판한다.

 

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를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P.37


저자는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언급한다. 그에게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 실존한다는 것은 세계 내부적 이야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 즉 근원적이고 상실되지 않는, 맨 아래 바닥에서 계속되는 존재의 확인이다. 이와 달리 스스로 '순간적 실제'에 내맡기는 사람, 정보로 그때그때 자신을 채우는 사람에겐 이러한 운명이 없고 고유한 역사성이 없음을 비판한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P.64)

 

우리는 다른사람(타자)를 시선을 통해 인식한다. 타자는 시선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대상이 나를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물리적 의미를 포함한 철학적 의미의 시선을 모두 차단한다. 이런 시선의 차단은 소통의 불가뿐만 아니라 나르시시즘화의 증가로까지 이어진다. "나르시시즘은 허구의 이미지를 위해 시선, 즉 타자를 제거한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에 더더욱. "라캉의 시대에는 세계는 여전히 시선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현대에는 시선의 소멸은 늘어가는 지각의 나르시시즘화로 이어진다."

 

인간에게 이야기란 그저 대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치료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 자체가 치료이며 의사와 이야기하기가 치료 행위에 포함됨을 말한다. 환자가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되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에 치유되는 힘이 있다. 그러나 현대의 병원에서는 환자의 이야기보단 의사의 처방이나 일방 사고가 퍼져간다. 이야기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더더욱 병이 깊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위해선 상대가 있어야 하고, 시선이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할 대상의 존재다. 우리는 이 대상을 어떻게 만나는가? 또 이야기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접촉'이다. 여기서의 접촉은 그저 물리적 접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접촉은 줄고, 접촉의 시도조차 사라진다. 접촉의 상실이 곧 바른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현실의 접촉이 곧 현실의 완전한 접촉인데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접촉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접촉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가용성을 박탈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한다. 우리는 소비 가능한 대상을 어루만질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쥐거나 소유할 뿐이다. (...) 커져가는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P.120

 

저자는 이런 서사의 위기가 곧 공동체의 위기임을 말한다.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공통의 서사와 역사가 내려오고 그것을 답습하며 공통점으로 묶이는 사회. 미래까지 함께 나아가는 사회였지만 신자유주의 체계의 목표는 완전히 달랐다. 신자유주의 체계의 기초가 되는 세상, 즉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성과 서사가 '우리'를 만들지 않으며 연대뿐 아니라 공감까지 해체하며 사람들을 고립시킨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우선이며, 자기 숭배적이며 스스로 지도자이자 스스로를 생산하고 공연하는 곳에서 안정을 찾는 곳엔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이제 서사조차 상업에 의해 독점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스토리 셀링(STORY SELLING)이라 말한다. 서사를 공동체와 연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자아와 연결하는 것이다. 공정무역은 나를 드러내는 것, 선하 이미지의 소비와 연결되지만 말이다. 이야기 또한 나를 드러내는, 전시하는 방식이 된다. 관건은 단순히 서사를 찾는 것을 넘어 이것을 공동체와 연결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과 삶은 정보의 나열이 아니다. 이야기다.
하나로 연결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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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보고 싶지 않은 수많은 타자들의 찰나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s*****8 | 2024.04.24 리뷰제목
’지금 우리는 스마트한 지배에 예속되어 있다. 억압도, 저항도 없이 삶을 게시하고 공유하고 좋아하도록 지배당한다.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이슈에서 이슈로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보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가운데서 부유한다.‘ -역자 서문-늘 그렇듯 그의 책은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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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스마트한 지배에 예속되어 있다. 억압도, 저항도 없이 삶을 게시하고 공유하고 좋아하도록 지배당한다.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이슈에서 이슈로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보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가운데서 부유한다.‘ -역자 서문-

늘 그렇듯 그의 책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150쪽도 되지 않은 얇고 작은 책에 담긴 글은 어렵지만 돌이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스마트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소셜 네트워크에 찰나의 장면을 끊임없이 공유하는 벌거벗은 포르노적 삶에 대한 그의 지적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최백호는 ’나의 빛나던 찰나, 이미 지나버린 찰나, 나의 영원한 찰나‘라고 노래하지만, 지나온 먼 과거와 연결되지 않는 찰나는 서사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리는 끊임없이 다음 스토리로 잠시 대체되었다가 사라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스토리에 집착하는 것은 진정한 접촉이 두렵기 때문이다.
접촉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고, 원하지 않는 갈등을 만든다.
갈등 해결을 위해 또 다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잖아도 과잉 정보로 인한 번아웃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접촉에 의한 에너지의 과잉 소모는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다.
진정한 접촉과의 간격을 두면서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공유와 링크와 좋아요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삶,
보고 싶지 않은 수많은 타자들의 찰나,
오늘도 나는 그 찰나를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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