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열한 계단’의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저자의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다.
‘만남’의 의미가 주는 깊이
시나 수필코너에 꽃여 있어야 할 것 같은 제목.
이 책에서의 '만남'은 詩적인 문학적인,혹은 현실적인 이별과 만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우리, 그리고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과 사색.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살아가는 우리들.
죽음이란 것은 소멸과 끝이 아닌, 영원한 시간에서 시간으로 우주에서 우주로 이어지는 발생과 소멸의 반복이고,
우리 모두는 개인의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여행자이며,
희미한 관계의 끈을 이어가며 현실을 같이 살아가는 우리는,
무한의 시간이 흘러 먼 훗날 어느 곳에선가 반가이 얼굴을 마주하며 운명처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초반, 타인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저자의 실제 삶을 끄집어 내어 수필을 쓰듯이 들려준다.
그러나,
책의 이야기가 이어져 가며
저자의 깊은 인문학적 사고의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나와 세계, 존재, 삶과 죽음 전반에 걸친 깊은 철학적 질문과 삶과 죽음의 의미에 빠져간다.
이책은 가볍게 읽는 수필이 아니다.
책을 덮고 나서 나의 내면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 나와 타인, 나아가 세계의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는 어려운 숙제들을 던져준다.
어느덧 나이가 이만큼 들어 ‘先체험’이 쌓여있어, 저자가 던져주는 질문의 의미가 쏙쏙 빨려들어와 때론 서글품과 허무함을, 때론 자각과 성찰에 대한 기쁨을 준다.
언뜻 보면 책은 평범해 보이고 가벼워 보임에 비해, 그안의 내용은 가볍게 손에 들수 없는 무거움을 준다.
첫 번째 주제 ‘타인’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인. 그 실체에 대한 의심과 관계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그것에 대한 탐구결과를 소년병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그녀의 오두막을 찾았던 소년병이 그녀가 사랑하지 않기에 떠난다며, 전장으로 가서 죽음을 앞두고 그녀를 그리워하다 검고 깊은 그림자와 거래를 한다.
그녀에게 가지 못하지만 그녀를 데려오되, 그녀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꿈은 깨어지고 영혼을 거두겠다고...
소년병은 그녀의 오두막이 있던 흔적없는 언덕에서 오두막을 짓고, 무수히 많은 세월이 지나 한 소녀의 방문을 맞이한다.
시간이 흘러 예전의 그와 같이 사랑하지 않기에 떠나겠다는 소녀를 끌어안은 그날밤 그녀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 소녀는 그녀가 되고 그녀는 잠이깨어 지난밤 꿈을 기분좋게 떠올린다.
이꿈은 소년병의 꿈인가? 그녀의 꿈인가?
소년병이야기는 타인과의 관계, 연애, 이별, 그 흔적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언젠간 만나’게 될거라는 것!
두 번째 주제 ‘세계’
내 존재 외부의 타인에서 나아가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생, 노력, 우리가 사는 세계,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에서 녹이고 버무려서 들려준다.
“자아의 내면세계에서 시간은 우리의 상식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이는 현재에 살지만 다른이는 과거에 살고, 또 다른 이는 미래에 산다“
“삶을 움켜쥐고 싶을 때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만다라를 생각한다”
세 번째 주제 ‘도구’
‘나’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인’, ‘세계’와 이어주는 도구로서의 ‘통증’
통증은 직접성과 간접성에 따라 그 관계의 거리가 정해진다.
그러나 거리가 멀다고 관계가 단절된 것은 아니다.
나의 ‘통증’과 저만치 멀리 있는 세계의 ‘통증’은 통증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엮어지고 다듬어져 서로에게 전달된다.
통증은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도구가 된다.
막연히 따르는 ‘믿음’에 대한 진실을 보고자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의심’의 당위성
이유도 모른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관례와 관습을 답습하며 심리적 위안을 얻기보다 이면의 진실을 보고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삶속에 무수히 섞여있는 진리안의 거짓 또는 거짓 속의 진리에 대해 ‘의심’해야 하는 이유를 ‘낡은 벤치를 지키는 두명의 군인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의심하지 않고 들춰보지 않을 때 세상은 조용하고 평온한 듯 보이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내재한 가능성을 끝내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될 권리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도구로서의 ‘언어’의 두가지 방향
언어의 양적증가는 '책'이되고, 양적감소는 '시'가 된다.
언어의 불완전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온전한 전달은 불가능 하지만,
저자의 생각이 그대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이 생각에 개입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각자의 생각과 의미부여 그것이 열린장이 되어 대화는 나누는 것이 된다.
그렇게 ‘언어’는 관계를 이어주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네 번째 마지막 주제 ‘의미’
여기서는 ‘죽음’과 ‘영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불편해 하는, 그래서 애써 필연적 도래를 망각하고 외면하고자 하는 죽음은
단순한 끝과 소멸이 아닌, 무한한 발생과 소멸의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와 타자, 나와 세계가 어떻게 관계 맺고 의미를 갖는지 드러내주는 의미를 갖는다.
“밤이 저무는건 괜찮으나 날이 저무는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시간이 쓸쓸할까 걱정될 뿐”이라며 속삭이다가
“날이 저무는 것도, 노을이 지는 것도, 강물이 손가락 사이를 힘없이 빠져나가는 것도......모든 것을 하나둘 잃어가는 것도 생각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과정일지 모른다”라고
저자의 깊은 사고는 두려운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에 가치와 의미가 있을거라는 기대를 제시하지만,
저자 표현에 따른 삶의 ‘先체험’이 어느덧 꽤 쌓여 이제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내가 받아 들일 수 있는건 쓸쓸함과 허탈감 까지인가 보다.
한편, 삶의 지향하는 바를 팔라우의 해파리로 환생하길 원하는 이유로 들려준다.
“누구도 공격하지 않고 누구도 위협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찬란한 내면세계 속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격정적으로 살아내고 싶었기에” 라며...
다시 ‘나’로 돌아와
마무리는 다시 ‘나’로 돌아와 ‘나는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던진다.
자아의 세계는 물리적 대상에 한정되지 않고, ‘나’의 세계는 물리적 대상을 한참이나 뛰어 넘는다.
모든 존재는 충분하고 완벽한 세계를 내면에 담고 있다.
그런 우리는 발생과 소멸, 즉 삶과 죽음을 영원의 시공간에 반복하며 먼 훗날 어느 곳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의식의 심연 저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울림이 전해온다.
가벼워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내용의 무게감이 더해진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가 어렵다. 나는 내가 외부의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의심한다” 처음에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다루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작가의 이야기는 나와 타인, 나와 세계와의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주제로 이어진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맺는다. 출생하는 순간 바로 타인과 나, 세계와 나와의 관계가 자동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더 본질적으로는 나와의 내면적 관계라는 숙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작가는 이런 관계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나라는 존재, 나아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고 관계를 맺는다. 세상과의 관계 맺기가 주관적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외부세계가 비록 객관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없고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재구성된 하나의 이야기로서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 내가 세상과 맺는 관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 거기에 비친 자아의 진정한 모습을 올바로 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모든 관계는 내 안에서 별을 이룬다고 이야기한다.
세상과 타인과 관계 맺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로서의 스토리, 언어, 시, 책 등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궁금적 지향점은 삶의 의미로서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에 있다고 본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연애, 이별, 시간, 여행, 통증, 꿈, 의식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결국 거대한 관계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작가가 존재의 유한성 문제를 의식의 차원으로 연결시켜 답을 주고 있다. 우리 의식은 죽더라도 무한이라는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의 내면세계는 죽음도, 소멸도, 단절도 경험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자기 안에 우주를 담고 있는 존재이다. 영원한 여행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와 당신은 언젠가는 만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설날 연휴를 앞둔 화요일 뇌출혈로 쓰러진 친구가 뇌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23일 입원해 있다 영면하였다. 어린 아들 셋과 큰딸을 두고 이승을 뜨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혈육과 친구들을 더 없이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상가에 들러 영정 사진을 보니 헛헛함과 무상감에 눈물이 밀려들어 목이 메었다. 아내를 멀리 보낸 남편은 무덤덤한 채로 문상객을 맞았지만 참척의 슬픔은 커 보인다. 타인으로 만나 부부 인연을 맺고 살다 어느 한쪽이 먼저 이승을 뜨고 말았을 때 상실의 아픔과 고통은 헤아리기 힘들 듯하다. 나와 관계를 맺은 타인이 하나의 지평과 우주로 들어오는 경험은 새로운 범주로 나아가는 길로 향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 숙명 아래 놓이지만 쉽지 않은 관계 속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고독에 시달리는 경우가 흔하다. 설 연휴에 친척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광경을 보다 어머니의 언행에서 닮고 싶지 않은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고는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자각하지 못한 채 부모의 언행을 그대로 답습하면 문제가 될 때가 있겠지만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며 스스로 위로한다. 안정적인 경제활동으로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던 아버지가 경험도 없는 사업을 시작해 재산을 탕진하고 술에 빠져 가족들을 힘들게 한 일들을 고백하는 작가의 삶은 내면의 울림을 전한다.
내적 방황으로 힘들 때면 언어적 사유를 극대화해 둔 책을 읽으며 글을 쓰고 내면을 정리하는 습관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물리적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는 대중들은 현상 이면에 숨은 본질을 통찰하는 일이 쉽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현상에 매몰되어 판단하고 가늠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흔하다. 게다가 한 사람이 삶의 주체로 사유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생산적인 주체로 사는 길은 쉽지 않다. 자본주의의 재화인 기성의 상품을 소비하는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한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은 문명의 이기에 사유하는 삶을 빼앗긴 채 생산적인 주체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농촌 노인들은 목숨만 부지한 채 하루하루 외로움에 시달리며 시간을 죽이는 훈련을 지속한다. 부유하는 언어의 잔상들을 붙잡고 말을 건네고 싶어도 노인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사나흘에 한 번씩 일하러 오는 요양보호사뿐이라는 사실에 길어진 수명은 죄악과도 같다. 혹독한 추위에 면역력이 떨어진 노인들이 하나 둘 이승을 뜨자 골목마다 통곡 소리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살아남은 자들 역시 다음에는 자신이 죽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혼자 지내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해당하는 죽음이 언제 자신을 찾아올는지 알 길은 없기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실행하는 생활을 이어야 할뿐이다. 지금까지 이어졌던 인연의 끈이 죽음으로 끊어지더라도 망자가 남긴 소중한 시간 속 이야기는 내면에 있어 공명한다.
찰나에 지나지 않는 삶을 돌아보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균형 있는 생활을 잇기 힘들다고 한탄하기보다는 경험 속에 체득한 삶의 의미가 새로운 힘을 줄 것이라 여기는 삶의 태도가 중요해 보인다. 서로 맞지 않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이들도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만나 협력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극단적인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사이를 수용하여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지평으로 확대하여 갈 때 공생적 삶을 이을 수 있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하나의 범주에 묶이는 과정이 원만하면 좋겠지만 조화로운 조직으로 나아가기 위해 통증은 수반된다. 고통을 피할 길 없는 관계 형성에서 통각은 상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비상구로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