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명찰을 걸고 출근한 내 자리에 매일 신청해둔 건강 음료가 놓여 있으면 근사하겠다.
어느 시절 직장에 대한 로망이었다. 현실은 건강 음료 한 달 비용도 고정지출이 되면 은근 부담이더라는 거다.
김현진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은 얼핏 보면 청소년 소설처럼 보인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가벼운 성장소설처럼 보이지만 읽다 보면 능숙하고 짜릿한 소맥(소주+맥주) 같다.
알코올중독자 강정민이다.
스스로 외래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다니지만 자신을 속인다. '노력은 하고 있어.'
의사는 나를 파악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파악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봤자 좋은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끊고 싶으면서도 끊고 싶지 않다.
끊고 싶다. 그렇지만 끊고 싶지 않다.
41p
젊은 나이의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 많은 말을 듣는다.
나 역시 20대 초반 아무 소속 없이 알바의 신으로 일을 할 때 듣던 말이 있다.
'아직 젊은데 뭘 좀 제대로 배우지'
그 말이 거슬렸던 이유는 나 역시 현재 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서였다. 열심히는 하고 있으나 내 업으로 삼지는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말들은 자존심을 건들곤 했다.
자존심이 건드려지고 그것을 달래기 가장 쉬운 방식이 강정민에게는 술이었다.
오직 술이라는 친구만이 곁을 떠나지 않고 달랜다.
하물며 그 술이라는 친구들은 성격이 다양해 어떤 안주엔 어떤 술이 어울리는 식의 사랑의 작대기까지 해가며 나름의 놀이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위로를 넘어 잔을 넘쳐흐르는 술처럼 결국 술이라는 친구는 어깨동무에 그치지 않는다. 기억을 끊어 또 다른 죄의식, 죄책감, 혐오감을 선물한다.
멀어지고 싶으나 결국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술이라는 친구와의 절교는 쉽지만은 않다.
정민의 곁에 같은 방식으로 술을 벗 삼는 민주라는 친구와 전화하면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와주는 준희라는 인물이 있다.
술이 아닌 어떤 인물이 언급된다는 건 희망이다.
녹즙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이 녹즙이 놓이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녹즙 배달원 강정민을 읽다 보면 한순간의 목 넘김으로 지나치는 음료에 사연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알아버리고 나면 이제 자신에게 배달된 음료를 감사한 마음으로 마시게 되고, 배달하시는 분을 만나면 이제껏과는 다르게 인사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권하는 이유다.
가볍게 읽고 지나칠법한 책이라 여겼던 마음에 건강한 녹즙을 들이킨 마음이랄까.
읽으면서 녹즙을 주문하고 싶어지기까지 하니 이 책은 배달 음료 회사에 전파되어야 할 성싶다.
성역이 많이 무너지고 성차별이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는 성차별적 언어들이 많이 남아있다. 가끔 거슬리면서도 익숙해서 그냥 지나쳤던 말과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한 번 더 짚어주는 것도 <녹즙 배달원 강정민>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틀어 간직하고픈 문장이 있다.
생각해.계속 생각해.
생각하는 걸 그만두면,
그때부터는 정말 지는 거야.
건강해지는 맛이 나는 책이었다.
새로 만난 독서모임의 책으로 선정되어 읽을 수 있었다. 막상 해보면 그 안에서 뭐든 얻게 된다.
생각이 많으면 피곤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어떤 상황에선 생각을 멈춰버리면 잘못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어가게 된다.
생각은 멈추면 안 된다.
살아있다는 거니까.
살아보려는 것들은 다 이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