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하면서, 이것이 또 다른 명상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걷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전에는 그것을 깨달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
걸을 때면, 내게도 매가 가진 집약성, 매가 가진 집중된 자족감이 생기는 기분이다. 나는 매처럼 군더더기 없이, 강하고 절제되어 있다. 나는 내 주위에 날개를 드리우고 이 호들갑스러운 세상의 표면을 응시할 수 있다.”
-캐서린의 독백
서른아홉,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나서야 자폐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짧지 않은 인생에서 남과는 다른 무언가를 어렴풋이, 아니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진단 받음과 어렴풋함’의 간극은 태평양 바다만큼이나 넓은 것이다. 자폐(autism) 정확하게는 의학적 진단명으로 자폐 범주성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의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disorder)이다.
스스로 아스피(Aspie)라 칭하며 아스퍼거 증후군과 함께 살아가는 캐서린은 영미권에서는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작가”라는 찬사를 받는 에세이스트이다. 그녀의 문장은 유려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아름답다. 어릴 적부터 활자에 침착하여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몇 차례 씹어먹었을 정도로 읽기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그런 그녀의 활자 사랑과 뛰어난 지적 감수성이 유별난 행동을 상쇄해 줄 것이라 믿었다(흔히 천재들의 특별한 어린 시절처럼). 그녀의 문장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예상치 못한 상상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특별한 언어 유희. 사람과의 관계를 힘들어하고, 그로 인해 책에 더 몰두하게 되면서 그녀의 특별한 재능이 발현된 것이리라.
캐서린은 영국의 해안산책로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패스를 걷기로 한다.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 자신을 찾기 위해, 아스퍼거를 진단받고, 인정하고 동행하기 위해.
그녀의 여행길은 때론 고난의 길이고, 때론 작은 행복의 발견이다. 여행작가들이 길 위에서 발견하는 크고 작은 아름다움, 그 속에서 발견한 행복, 환희의 울림..
캐서린의 걷기 기록은 그러한 정형적인 틀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 신발 속의 작은 돌멩이로 인한 불편함, 변덕스런 날씨와 진흙의 오르막길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지기와 불평,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걷는 즐거움보다 목표치를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이 넘쳐난다. 책을 탐독하다 보면 캐서린과 함께 걷는 착각을 하게 된다. 오르막을 오르며 AC가 입에서 튀어 나오고, 저자가 체험한 불편함이 나의 불편함이 된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나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교육현장에서도 더러 접한 경험이 있다. 책에도 나오는 DSM-Ⅴ(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정신장애 진단 통계 편람)는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 기술하는 것이다. 내가 배울 땐 DSM-Ⅳ 였고 지금도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중이다.
여기에 기술된 자폐범주성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에 속하는 사람의 보편적 특징은 보통 세 가지 영역에서의 결함으로 나타난다.
① 의사소통(communication)
② 사회적 상호작용(socialization)
③ 관심과 활동(interests and activities)
아스퍼거는 DSM-Ⅳ에 제시된 전반적 발달장애의 범주 내에 있는 자폐 범주성 장애의 다섯 가지 하위 유형(자폐성 장애(autistic disorder), 아스퍼거 장애(asperger’s disorder), 레트 장애(Rett’s disorder), 아동기 붕괴성 장애(childhood disintegrative disorder : CDD), 비전형적 전반적 발달장애(PDD not otherwise specified : PDD-NOS) 중 하나이다.
Asperger는 비엔나의 대학 병원 의사로 그의 연구를 통해 아스퍼거 증후군이 밝혀졌다.
아스퍼거 장애인들은 비언어적 의사소통 사용에 결함을 보이고, 비언어적 메시지를 읽거나 보내는 데 어려움을 보인다. 이들이 보이는 언어 활용상 어려움은 사회적 상호작용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으며 흥미 및 활동과 관련하여 그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들은 인지적 기능 수행과는 상호관련이 없는 운동 기술에서 어려움을 보이기도 한다. 아스퍼거인은 뛰어난 어휘를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말하는 능력을 보이나 언어 출현이 지체되어 있고 언어의 사용에 어려움을 보이며 문자로 표현되지 않은 언어(구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출처: 자페 범주성 장애아동 교육의 실체 ; 시그마프레스
이상이 아스퍼거 장애에 대한 대략적인 서술이다. 이 정도의 이해를 바탕으로 캐서린 메이의 책을 읽는다면 그녀의 행동과 돌발적인 감정 흐름을 따라가기가 조금은 수월할 듯하다.
나만의 시간, 나만의 모험, 어쩌면 이 시간이 예전의 나를 되찾아줄지도 모른다.
나도 걷기를 즐겨하고, 기회가 되면 길을 나서려고 노력한다. 오늘 아침에도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운동화끈을 조여 매고 영하의 칼바람을 뚫고 주변 산책을 다녀왔다. 어떤 이는 번민으로 가득 찬 머리를 비우기 위해, 어떤 이는 해가 다르게 내 몸을 점령하는 살덩이를 녹여내기 위해 길을 걷는다.
나의 걷기는.. 걷기 위해 나는 걷는다.
걷기는 치유의 힘이 있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 생각마저도 사라질 때 진정 걷기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마 캐서린도 그 순간을 오롯이 경험하였으리라.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이름표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해주고, 비로소 내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거울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 그것은 내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 이름표를 단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차이를 상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때때로 하나의 이름표는 세상에서 온정을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p.358 다시 일어서다
책에는 함께 걷기가 자주 나온다. 걷기 그룹과 함께 걷는 저자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다름을 인정하고 세상 속에 발맞추어 걸어가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나는 이 ‘함께 걷기’를 가족, 더 좁은 의미로 ‘배우자와 함께 걷기’로 바라보았다. 책 속 캐서린과 남편 H의 일상이 자주 언급되는데, 남편은 캐서린의 돌발적 모습들을 보아 오며 오래 참고 세심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장애가 있는 아내를 둔 배우자(혹 그 반대라도)는 아무래도 좀 더 세심한 배려가 몸에 배는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아내의 행동에도 바로 반응하지 않고 기다려 준다. 그런 남편일지라도 자기도 모르게 둑이 터지듯 쌓여왔던 앙금이 폭발할 때가 있는데, 캐서린은 또 이러한 남편에게 서운해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 이런 것이 부부간의 사랑이다. 서로에게 “더” 요구하지 않고 인정하며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누구나 살면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때론 길고 긴 터널이기도 하고, 때론 험준한 산길이기도 하다. 주변에 꽃들이 만발할 수도 있고,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에 비까지 내릴 수도 있다. 그래도 걸어야 한다. 뛰어가지 않아도 좋다. 걷다가 길을 잃어도 좋다. 모든 길은 연결되니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것이고, 길 위에서 위로를 얻을 것이다.
이번 겨울엔 아름다운 마음의 눈을 가진 아내와 손 꼭 잡고 골목길을, 강둑을, 산길을 걸어보아야겠다. 우리가 걷는 길이 꽃길이 될 수 있도록.
매서운 삭풍 가운데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준 이 책의 부제는
‘휘청거리는 삶을 견디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법’ 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