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사회의 두 가지 키워드, 풍요 그리고 화목(和睦)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해주고 행복하게 하는 건전한 사회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 사회다. 먼저 하나는 물질적 풍요다. 헐벗고 굶주리면서 살아가는 삶은 사람다운 삶일 수 없다. 또 그런 삶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할 리 없다. 따라서 건전한 사회는 최소한 모두가 의식주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워야 한다. 다른 하나는 화목이다.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며 다투면서 살아가는 삶은 사람다운 삶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건전한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면서 사이 좋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화목해야 한다.” [pp. 12~13]
즉, 건전한 사회 혹은 이상 사회의 기준이 되는 키워드는 풍요와 화목인 셈이다.
이 키워드에 따라 사회를 분류하면,
첫째, 가난-불화사회. “자본주의 시대 이전의 인류 사회는 거의 가난한 사회라고 해도 무방하다.” [p. 14]. 따라서 “아주 엄격한 기준 혹은 절대 기준을 적용할 경우 자본주의 이전 시기까지의 계급사회는 모두 가난-불화사회이다.” [p. 15]
둘째, 가난-화목사회. 계급이 생겨나기 이전의 원시공동체 사회가 해당되고, 현대사회에서는 사회주의국가인 쿠바나 아프리카의 일부 소국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만, 상대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자본주의 시대 이전의 계급 사회 상당수가 가난-화목사회로 분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 계급 간 불화는 심각했지만, 계급 내부는 비교적 화목한 편이어서 풍요-불화사회에 비하면 화목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16]
셋째, 풍요-불화사회. 1980년대 신자유적 자본주의로 전환한 이후의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가 여기에 해당된다.
넷째, 풍요-화목사회. 절대적인 기준에서의 풍요-화목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지만, 상대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복지제도를 만들거나 부의 재분배를 통해 평등 수준을 큰 폭으로 끌어올린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소위 선진국 이나 상대적으로 평등 수준이 높고 인간 관계가 양호한 북유럽 사회는 상대적으로 풍요-화목 사회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가난-풍요는 객관적으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불화-화목은 어떤 기준을 적용할 것인가에 따라 같은 사회를 다르게 분류할 수 있기에 상대적 혹은 주관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저자는 “199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은 가난-화목사회이고, 21세기 이후는 풍요-불화사회”[pp. 20~21]라고 정의한다.
즉,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관계는 비교적 양호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돈만 벌면, 경제성장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p. 20].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성장 노선을 선택한 1990년대 이후 ‘돈’을 기준으로 하는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인, 다층적 위계질서에 기초한 심각한 위계간의 불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동일한 위계 내에서도 개인 경쟁의 일반화에 따라 사실상 개인을 단위로 위계가 나눠진다는 얘기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야 한국 사회가 갑자기 생산력이 일정수준을 돌파한 것도 아닌데, 저자는 199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 사회는 절대적 기준이나 상대적 기준, 어느 쪽을 적용해도 쿠바나 아프리카 일부 소국처럼 가난한 사회라고 얘기하는 것으로 들린다. 오히려 1990년대까지 화목사회로 볼 수 있다면, 1980년대를 포함한 일정 시기를 상대적 기준으로 풍요-화목사회라고 분류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분명히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후 한국 사회는 개인으로 파편화된 불화사회로 전환했고, 현재의 한국사회는 저자가 정의한 ‘풍요-불화사회’에 해당한다. 하지만, 21세기 이후에야 한국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자의적(恣意的)인 기준 적용이 아닐까
풍요-불안사회의 대안은 사회주의
저자에 따르면 “풍요-불화사회는 지속 불가능하다. 풍요-불화사회는 사회구성원을 병들게 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며 사회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들을 사라지게 하고 환경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풍요-불화사회는 ‘개인의 생존은 개인이 책임진다’는 철학을 기초로 하는 사회” [p. 171]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존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약육강식이 극대화된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칠 수 밖에 없고,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오로지 개인적인 이익과 이권만을 추구하게 된다. 불신(不信)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불신 사회에서는 인간을 증오하는 심리가 불특정 다수를 총기로 살해하는 대량살상이나 묻지마 살인으로 표출되기 쉽다.
이를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개인의 생존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로 변혁해야 한다.” [p. 175]. 어떤 사회가 개인의 생존을 국가가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로 바뀔 수 있을까? 집단주의 심리가 강한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한 씨앗이 내포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최근 코로나에 대한 방역에서 보듯이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사회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집단주의 심리가 강한 민족이지만, 동시에 한국은 불평등이 극심한 21세기형 불화사회에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는 잠재된 집단주의와 현실화된 개인 이기주의가 갈들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불평등한 일상적 상황에서는 개인이기주의적으로 대응하지만, 임의의 순간에 (전체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해서) 평등한 상황이 조성되면 집단주의적으로 대응한다.” [p. 185]
“최근에 과학자들은 인류가 지금의 방식을 고수해 살아간다면, 22세기는 오지 않는다고 경고” [p. 171]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현재의 풍요-불안사회 상태에서 유토피아인 풍요-화목사회를 지향하기 위한 변혁을 하기에는 빠듯하다는 말인 셈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처방으로 내세우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생존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렴한 임대주택제도 혹은 토지국유화에 기초한 무상주택제도, 실업대책 등을 장단기적으로 추진” [p. 262]해서 국가가 국민들의 생존을 책임지자는 것이다.
둘째, 개인의 생존을 공동체가 책임지고,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집단주의 원리에 기초한 ‘기본소득제’를 통한 공동체주의의 회복이다.
셋째,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통해 조직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조직 문화를 정착시킨다.
넷째, 분단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시켜, 사회주의적 내용을 받아들여 자본주의의 모순과 결함을 시정하거나 최소화한다.
저자의 처방이 현재의 한국사회가 풍요-불화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책 <풍요중독사회>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돈과 물질적 풍요에 의존하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지속 가능한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고민해볼 계기는 되리라고 생각한다.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한겨레출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