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작가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최근 배우 송중기 씨가 주연한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의 원작 소설이다. 2011년 출판되었던 오랜 소설이 영화화되며 새롭게 심폐 소생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영화화되었기 때문에 읽어봐야 할 가치가 있는 소설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작가 '조해진' 소설가 때문에 읽을 가치가 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진 소설가. 그것만으로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소설은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사연을 방송해 시청자들의 기부로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김 작가.
그녀는 출연자들과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쓴다. 모든 사연들이 안타깝지만 더 마음이 가는 사연이 있다. 집 나간 어머니, 돌아가신 아버지, 가출한 동생, 열일곱의 나이에 오른쪽 뺨에 혹이 생겨 수술이 필요한 소녀 윤주. 김 작가는 윤주를 돕기 위해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몇 달 후에 있는 추석에 방송하자고 스태프를 설득한다.
윤주를 도울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 데 그 사이 전해진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윤주의 혹이 신경섬유종이 아닌 악성 종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윤주를 돕기 위해 방송 편성을 뒤로 밀려왔는데 자신의 결정으로 윤주의 혹이 악성으로 된 것만 같은 생각에 김 작가는 하던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브뤼셀로 떠난다.
브뤼셀로 가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로기완을 만났다』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로기완은 누구인가?
그는 탈북민이다. 아빠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엄마와 함께 자란 로기완. 그는 중국에서 엄마와 함께 살다가 엄마의 사망 후 브로커의 도움으로 유럽으로 망명 온 탈북민의 사연이 시사잡지에 소개되었다. 김 작가는 왜 아무런 안면식도 없는 로기완을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바로 잡지에 실린, 그의 고백이 담긴 짧은 문장 때문이었다.
감작가를 먼 브뤼셀까지 오게 한 로기완의 짧은 문장은 소설의 중반이 넘어가도록 잘 보여주지 않는다.
로기완을 만나러 브뤼셀에 왔지만 로기완은 영국으로 건너가 만날 수 없다.
하지만 로기완을 도와준 한국인 '박'을 만난다. 박은 로기완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준 일기장을 김 작가에게 권한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서 영국으로 떠나기까지의 여정이 담긴 로의 일기를 통해 김작가는 하나하나 그가 지나간 행적을 더듬으며 그의 마음을 떠올린다.
그의 슬픔, 그의 고통, 그의 배고픔을 느끼려고 애를 쓴다.
이 소설에서 김작가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어떻게 한 인간에게 깊이 공감하며 연민할 수 있는가.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로기완의 일기를 통해 그의 삶을 느끼며 과연 진심 어린 연민이 가능한가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고통까지 똑같이 느낄 수 없다.
한 사람의 슬픔을 공감한다 하더라도 당사자만큼 느낄 수 없다.
결국 완전한 공감에 이를 수 없다는 무력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처럼 자신을 탓하며 더 깊은 늪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윤주의 슬픈 소식을 도저히 볼 수 없어 도망쳐온 김작가를 이 질문 속에서 구원해 준 건 그동안 꽁꽁 숨겨져온 로기완의 한 고백이었다.
가장 힘든 상황 속에서도 로기완을 움직이게 했던 그 고백.
그 고백은 김작가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로기완을 돕고 김작가를 도운 박을 위로하며 서로가 앞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가게 해 준다.
로기완이 힘들 때마다 읊었던 그 고백처럼 살기 위해 또 한 번의 선택을 한다. 남에게는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생의 가장 끝자락에서 견뎌왔던 그의 고백대로 살기로 한 선택임을 소설은 알게 한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설이다.
김작가는 윤주의 사연을 듣고 브뤼셀에서 박의 이야기를 듣고 로기완의 일기를 통해 로기완의 이야기를 듣는다. 김작가를 도운 박 또한 로기완의 행적을 쫓는 김작가와 함께 하며 침묵 속에 담긴 김작가의 상처를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서로가 위로받는다.
이 소설은 자신의 상처를 말함으로 위로받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자발적으로 들음으로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위로받는 소설이다.
김작가가 로기완의 고통을 느끼는 과정에서 위로를 받고 그런 김작가를 지켜보고 함께 해 줌으로 박은 오랜 상처와 죄책감으로부터 위로받는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자신을 구원함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우리에게는 끝까지 사랑하고 공감해야 할 이유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고 위로하며 나아가야할 이유를 말해준다.
잊힌 세세한 표현들이 아쉽고, 일부 달라진 표현들이 궁금해서 반갑게 펼쳐본 리마스터본, 오래 전 처음처럼 호흡이 차분해진다. 무거운 젖은 담요 아래 호흡이 어려운 기분이 들던 영국의 겨울 하늘을 피해, 먼 동유럽의 어느 도시로 무작정 떠나기로 한 전생 같은 순간이 떠오른다.
내내 비가 오던 회색 풍경은 함박눈이 내리는 도착지의 하얀 설경으로 바뀌었다. 그때 나는 비교적 신분이 안정적이고 확실해서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숨이 잘 안 쉬어지는 서유럽의 겨울에는 해가 가도 적응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13년 전 나와는 아주 많이 다른 독자로 다시 만난 작품의 문장들에서 인물들의 기분이 때론 시각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따라 망설임 없이 함께 버스에 타고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렇게 몰입이 쉬운 다정한 작품이다. 섬세하고 완벽한 세계의 탄생이다.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는 줄 수 있겠지만 그 위로는 영원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다. (...) 우리 삶의 부분적인 단서를 될 수 있을지언정 생애 전체를 관통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는가, 따져보면 몇 개인가의 기록이 남는다. 그 기록이 사라지거나 조작되면 우습게도 존재를 증명하기가 어려워진다. 확실하다고 확신한 나에 관한 모든 것들이 그의 이니셜보다 더 강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알고 있다는 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는 의미의 문장을 여러 형태로 만난다. 학문만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오히려 사람이 더 그렇고, 그러니 사람살이가 그렇고,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일이 그렇다. 단순한 것이라곤 없으니 상대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겸손해야 한다.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여겨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가장 아픈 진실은 그 모든 것이 다만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것이다.”
처음 일독과 달리 이제 이 작품에서 나는 청산하지 못한, 하지 않은 문제들이 만든 굴곡과 흉터를 본다. 청산이란 일회적 성취가 아니라서 거듭해나가며 채워야하는 문제이지만, 감추고 가리고 결국 가해자가 여전히 혹은 더 잘 살게 한 모든 일들은 문제다.
“저항을 학습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난은 그저 익숙하고도 어쩔 수 없는 생의 조건이었을 뿐 (...)”
그런 행위를 일삼은 이들이 지켜내려한 것은 무엇인지, 그래서 보이지 않게 되고 밀려 나고 떠돌게 된 이들은 누구인지, 천천히 가늠해본다. 불확실이 불안을 불러오는 듯해서, 확신과 정답을 찾은 세월 동안 내가 부정한 내용은 무엇이었을지 재고해본다.
첫 출간된 13년 전보다 지금 나는 더 자주 포기하고 싶다. 작은 깜냥은 더 작아졌고, 체면치레하던 인내심은 더 얕아졌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도 줄었는지, 견디는 일에 지쳤는지, 자극에 발작 버튼이 눌릴 듯한 아슬아슬한 기분도 더 자주 든다.
정치사회적으로, 기후생태적으로, 개인인 내가 애쓰는 일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마음이 매일 든다. 다정한 친구는 아직 내가 성장 중이라는 신호라고 하지만.
내용을 안다고 생각한 낯설고도 신비로운 이 작품이 진정제처럼 의미 있는 위로가 되었다.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다면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이냐고 조용히 속삭인다.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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