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느슨한 이야기묶음
『좋은 곳에서 만나요』는 연작소설이라고 한다. 책에 실린 단편들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하나의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독립적이다. 첫 번째 이야기(「오리배」)의 주인공이 탄 택시기사(「심야의 질주」), 그 택시기사가 뺑소니친 사람(「세상의 끝」), 그 사람이 밥을 주던 길고양이(「아홉 번의 생」), 그 고양이의 네 번째 삶에서의 동거인(「영원의 소녀」), 그 사람의 언젠가의 애인 비스무리한 사람(「이 세계의 개발자」). 각 이야기의 인물들은 이렇게 이어져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진행함에 있어서 서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소설의 이야기가 아닌 서로의 인생에 대해서라면 큰 비중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스치듯 지나간 인연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죽은 후에도 세상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사람의 경우에는 흔히 생각하는 유령의 형태로, 고양이의 경우에는 환생의 형태로. 그럼 그렇게 남아서 무엇을 할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던 곳에 가고, 하고 싶은 말을 끝내 하고. 아무튼 원하는 건 거의 비슷한데,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이 또 얼마나 다양한지 몰라.(이 세계의 개발자, p. 289)" 그곳에 다다르고 나면, 그제서야 이 세상을 떠난다.
1. 슬픔들 - 슬픔을 뭉개지 않기
슬픔을 다루는 방법 중 한 가지는 뭉개버리는 것이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거나, 그런 일은 사실 슬픈 일이 아니었다고 치부하기. 나는 항상 이 방법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 의문을 품어왔다. 이제 그런 건 다 잊어버렸다는, 혹은 그 때는 그걸로 뭐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진심인지 혹은 애써 하는 말인지, 진심이라면 정말로 그러한지 궁금하다.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로 그런게 가능할지도. 다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회복은 예전으로의 복귀가 아닌, 새로운 안정 상태로의 진입이어야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고,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무리 시야에서 치워버린다고 해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침대 밑이나 카펫 밑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썩어간다. 당장은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시점에는 청소를 해야한다. 썩어서 악취가 나기 전이라면 더 좋겠지.
시간이 지나 내가 더 성장해서 과거의 슬픈 일들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겪었던 슬픔이 정당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분명히 그건 슬퍼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걸 부정하는 건, 좀 강하게 말하면, 과거의 나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리의 소설은 슬픔을 뭉개지 않는다. 『좋은 곳에서 만나요』의 이야기들은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 차있다. 주인공들이 모두 (적어도 한 번은) 죽은 상태라는 점에서 그럴뿐더러 주변 등장인물의 서사 또한 그렇다. 『좋은 곳에서 만나요』는 그런 죽음과 슬픔을 숨기지 않는다. 교통사고, 자살, 병사, 과로사, 공황장애, 알코올 의존, 우울증, 실연...
그리고 그 슬픔들은 치워지지 않고, 슬픔으로서 정당하게 받아들여진다. 주인공들은 유령이 되어 과거의 슬픔들을 곱씹는다. 아빠의 자살, 어느날 찾아온 동생에 대한 적의(「오리배」), 자신이 저지른 죄들, 유일한 친구를 저버린 일(「심야의 질주」), 죽고 싶어 하던 혜수, 그리고 그런 혜수와 같이 살아가고 싶었던 지우(「세상의 끝」), 선인장의 마음을 확인한 때, 선인장과 영영 헤어져야 했던 일(「아홉 번의 생」) 등등...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주인공들이 안정을 찾은 때에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리배의 주인공은 엄마와 희재의 사진에 찍히지 않았고, 심야의 질주의 주인공은 생전 자신이 저지른 어느 죄에도 속죄하지 못했다. 세상의 끝의 주인공은 같이 유령이 된 혜수에게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고양이는 아홉 번째 생이 곧 끝나 다시는 선인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영원의 소녀의 정민은 여전히 딸의 죽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2. 죽어도 해피엔딩 - 슬픔에 짓눌리지 않기
슬픔을 마주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슬픔의 주름들을 하나하나 만지다 보면 어느 샌가 그 속으로 삼켜지기도 한다. 슬픔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다시는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 체념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지는 순간들. 실제로 주인공들은 슬픔에 삼켜지기도 한다. 오리배의 주인공은 긴 시간을 기다려도 엄마와 희재가 오지 않자,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이대로 사라지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좋다.(「오리배」, p. 50)"라며 체념에 빠진다. 세상의 끝의 주인공은 혜수와 죽으러 강화도로 향했고, 영원의 소녀의 주인공은 호수에 빠져 스스로 죽는다.
그럼에도 작가는 좋았던 일들이 슬픔들과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곧 우리에게 예비된 좋은 일이 무엇이 있으려나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각자의 생일은 아직 멀었고 방학 중이므로 상장을 타오거나 시험을 잘 볼 일도 없었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내밀고 오리배를 탈까나.(「오리배」, p. 43)" "매일이 그런 날들이었다./ 모든 것이 좋아질 듯 좋아지지 않았고 다만 혜수가 좋았던 날들./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혜수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혜수가 있어서 조금 덜 외로웠다.(「세상의 끝」, pp. 152-3)" "나는 여느 때처럼 그 애를 생각했다. 햇빛 아래 반짝이던 그 애의 모습이며 그 애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그러자 늘 그랬듯 빛나는 기쁨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아홉 번의 생」, p. 175)" 이유리가 그려내는 좋았던 일들은 무척이나 달콤해서, 읽는 사람이 슬픔에서 허우적대지 않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런 사탕이 없으면 약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이유리의 소설을 참 좋아한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들은 모두 슬픔에 짓눌리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다. 그들이 내린 답은 어찌보면 진부한 말일 수도 있다.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지나갈 것이고, 현재의 행운에 충실하기. "그랬다, 그 반짝이는 알갱이들만큼이나 많은 슬픈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강물이 한 번 일렁이는 동안만큼만 빛날 뿐이라는 것을.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빛들은 강 하류로 흘러가면서 거대한 물결에 합쳐져 사라질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다음 번의 빛을 표면에 받아들이며, 강이 흐르고 해가 빛나는 동안 영원히 계속.(「오리배」, p.57)" "세계가 빛이라면 관계는 두꺼운 유리 조각과도 같다. 하나의 관계를 통과한 세계는 수십 가지의 색깔로 나뉘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한번 지나간 빛이 돌아오지 않듯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수억만 분의 일의 확률로, 무작위로 내달리던 두 갈래의 빛이 어딘가에서 다시 겹쳐지는 찰나가 있다면./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 찰나를 붙잡아두는 방법을, 그저 소중하고 소중하게 누리는 방법을. (...) 그저 수천만의 행운이 겹쳐 만들어낸 오늘을 최대한 즐기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아홉 번의 생」, p. 201, 205)"
말은 쉽다. 이러한 설교는 질리도록 들어왔다. 이유리의 설교를 특별하게 만드는 점은 그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각양각색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종종 이거면 됐다고, 아무래도 좋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이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진심으로 그렇게 느낀다. "정말로, 더할 나위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직후에 (...)(「오리배」, p. 58)" "진심으로 그렇다고 생각하며 나는 대답했다.(세상의 끝, p. 158)" ""슬프지만 슬프지 않기도 해."/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했다.(「아홉 번의 생」, p. 204)"
3. 깨달음에 이르는 길
1)기다림
주인공들은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채 그저 무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기다림의 시간은 다양하다. 오리배에서는 수 년, 세상의 끝에서는 반나절, 아홉 번의 생에서는 네 번의 삶.
슬픔을 언젠가는 마주해야겠지만 그것이 꼭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다. 당장 슬픔을 감당하기 너무나도 버겁다면 그게 가능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이들이 뭔가 특별히 좋은 일이 있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때가 되어서, 다시 올 수 있을 때가 되어서 온 것이었고 두 사람 다 그때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려왔다는 것을.(「오리배」, pp. 56-7)"
2)기적
"그렇게 한 계절을 다섯 번쯤 반복했을 무렵,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아홉 번의 생」, p. 195)" 오랜 기다림의 끝에, 기적이 일어나곤 한다. 기다렸던 사람들이(「오리배」), 예상치 못한 사람이 찾아오고(「심야의 질주」), 그토록 찾아헤맨 누군가를 만나고(「아홉 번의 생」), 세상의 끝에 단 둘이 남고(「세상의 끝」), 신이 나타난다(「이 세계의 개발자」).
리틀우드의 법칙이라는 것에 따르면,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기적을 경험한다고 한다. 백 만분의 일의 확률을 갖는 사건을 사람이 깨어있는 동안 1초에 한 번 독립시행한다는 가정 하에 나온 결과인데, 헛소리긴 하지만 또 아예 헛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꽤나 겪었기 때문에. 그렇게 찾아온 기적이 내가 바라고 있던 것일 수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에게 슬픔을 마주할 힘을 줄 무언가가 찾아오리라 믿고 기다릴 수 있기를.
4. 슬프지만 슬프지 않기도 해
이유리는 「그 때는 그 때가서」라는 소설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로 추정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주인공은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말을 듣고는 한다. 슬픔 속에서도 기어코 해피 엔드로 향하는 이유리의 낙관은 머릿속에 꽃밭 밖에 없는 사람의 현실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꽃들은 현실도피의 결과가 아니라, 슬픔을 머금고 마침내 피워낸 것이다. 슬픔에 지지 않고, 슬픔을 이기지도 않고, 슬픔을 껴안고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강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거야."/ 그러자 그 애는 오랫동안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기도 해."(「아홉 번의 생」, p. 204)" 나는 아직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나쁜 생각들이 불쑥 솟을 때마다 이 이야기들을 다시 읽으면 조금씩은 이해해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