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짧은 정형시 하이쿠,
한 줄의 시에 압축된 세계가 미야베 문학을 통해 새로운 사계(四季)가 펼쳐진다 "
-미야베 문학의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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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는 사실 출간하자마자 알았다. 작가 이름만으로 알림을 해둔 덕분이었다. 하지만 막막 들떴던 열정이 조금 식은 것은 이 책이 단편이라는 사실과 하이쿠를 소재로 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이쿠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일본문학을 많이 읽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고전 중에는 하이쿠를 짓는 것으로 내기를 하는 그런 장면이 실린 이야기들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시조쯤 되려나. 시도 생각을 많이 하고 이해하기 힘든데 시조를, 그것도 남의 나라말로 된 시조를 가지고 어떻게 문학을 그것도 장르문학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그래 이 이야기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하는 생각으로 살짝 멀어져버렸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런 선입견으로 인해서 놓쳐버린 수작이 꽤 많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야기의 전개나 소재나 만듦새나 가독성이나 특성 등 모든 부문에 걸쳐서 말이다.
총 열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다소 길다고 느껴지는 제목이 전부 하이쿠다. 이 하이쿠들에 나온 단어나 이 문장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가령 <외국서 찾아온 사위가 장인의 묘석을 닦네>라는 제목의 두번째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서 진짜로 외국인 사위가 등장을 하며 묘석을 닦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요람'이라는 특수한 설정이 더해지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아닌 조금은 더 미래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것이다. 사람이 죽지 않은 세상일까.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일까. 이런 식으로 호러나 sf 그리고 스릴러나 정통 미스터리 등 담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장르 소설의 틀은 다 담긴 듯 하다. 그야말로 골라 읽는 재미가 가득한 그런 소설인 것이다.
호러 면에서도 작가만의 특유함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그리는 호러는 마구 무섭거나 진저리 칠 정도로 징그럽다기 보다는 귀신이나 몬스터들이 존재는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고 감성이 살아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도 그러한 호러가 실려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귀신은 분명 처음에는 깜짝 놀라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지만 자장가를 불러주는 등 오히려 위험에 처한 인간을 구해주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니 작가 특유의 귀신이 그대로 여기에도 설정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에도시리즈에서 자주 보이는 귀신의 형태라고나 할까.
편집자의 말대로 작가의 말을 먼저 읽고 이야기를 읽었다. 쓰여있는 대로 편집자의 말을 가장 나중에 읽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말에 의하면 어떻게 이 하이쿠가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준다. 자신과 관련이 있는 모임의 사람들이 지은 하이쿠들이다. 남의 하이쿠를 받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다. 하이쿠들은 제목에 한번 쓰이고 본문에 나온 뒤 가장 마지막에 한번 더 첨부되어 있다. 이야기를 읽고 다시 읽으면 그 맛이 또 다르게 느껴져서 더 좋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이 하이쿠들에는 계절감을 나타내는 요소가 나온다는데 장미나 여주, 해바라기 등이 소재로 쓰인 하이쿠에서는 계절 감성을 찾기가 쉬웠으나 못 찾은 것들도 있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읽으면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의 말대로 한꺼번에 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꺼내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다.
하나, 다들 찾아봤는지 모르겠지만 책의 앞날개와 뒷날개를 펼쳐보면 MBTI에 따른 북스피어 책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처음에는 앞면만 봐서 나한테 해당되는 것은 없네 했었는데 뒷날개를 펼쳐보니 있었다. 이 페이지가 궁금해서라도 이 책은 꼭 소장할 가치가 있다.
둘, 이 책이 여전히 이판사판 시리즈인 줄 알고 있었다. 보니 레이디 가가 시리즈더라.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다시 찾아보니 이판사판 시리즈가 열 권이었고 첩혈쌍녀 시리즈가 있고 이번 책인 레이디 가가 시리즈가 있었다. 지난번 읽었던 책도 첩혈쌍녀 시리즈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 미시야마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도 있어서 반갑다. 오치카에게서 도미지로로 넘어간 청자가 또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새로운 주인공으로는 누가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재미있는 기획의 소설이다.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가 취미삼아 지인들과 일본식 짧은 시인 ‘하이쿠’를 짓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 모임에서 나온 하이쿠를 가지고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애초에 채 스무 자가 안 되는 짧은 시구 안에 심상을 담아야 하는지라, 상상력을 동원하도록 만드는 게 관건인데, 작가는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물론 각 하이쿠를 지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았다는데, 재미있는 건 하이쿠를 보고 떠오르는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원래의 시를 지은 사람들의 의도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는 점.
장르도 굉장히 다양하다. 모든 이야기는 현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한 이야기에서는 가까운 미래의 새로운 의학기술이 보이기도 하고(SF), 심령현상이 있는 이야기도 있다. 조금은 동화 같은 신기한 열매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한 명의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쓰기도 하는구나 싶은 느낌이 확 든다. 물론 단편들이긴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에 나름의 매력도 있고, 짜임새도 결코 단순하지 않아서 금새 빠져 들어간다.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면(모든 이야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쓰레기 같은 남자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사법고시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부인의 등골을 빼먹으며 허송세월하다가 이젠 바람까지 피우는 모습을 장모에게 들킨다거나, 의심병이 도져 새로 사귄 애인에게 집착과 스토킹, 학대까지 일삼는 사이코,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애인을 납치해 강제로 업소에서 일하도록 만들려는 악질 등등.
책 후반에 실려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보니, 보통은 역사물을 쓰던 작가가 현대 이야기를 쓰려다 보니 자연히 매일 뉴스에서 보던 이야기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런 뉴스들이 매일처럼 보이는 일본이라는 사회는 얼마나 지옥 같은 곳인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는 일이기도 하니 피장파장이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책은 이전에 겨우 한 권 읽어봤을 뿐이지만,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가끔씩 쉬어가는 독서를 위해 선택해 보기에 충분한 작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