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이 책 꼭 읽어보세요! 등장인물 중에 ‘앤드류’라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회사에도 있어요!!”
친한 후배 두 명이 소리 높여 내게 소개한 책이다. 아니, 소개 정도가 아니라 필독서라고 꼭 읽어야 한단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 책에 나온다나
막내가 사라졌다
가슴 뛰는 일을 찾습니다
전설의 앤드류 선배
재능의 불시착
누가 육아휴직의 권리를 가졌는가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된다
노령 반려견 코코
언성 히어로즈(Unsung Heroes, 보이지 않는 영웅들)
어느날 출근하지 않고 대리인을 통해 퇴사처리를 진행하는 막내(였던 직원), 가슴 뛰는 일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는데 아침마다 출근이 힘든 직원, 업무시간 이후에도 ‘나’로 돌아가지 못하고 ‘직장인’의 역할을 강요받는 직원..그렇게 ‘직장’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 책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후배들의 강력 추천 챕터 ‘전설의 앤드류 선배’를 펼치니,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났다. 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누군지 맞춰보라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어서였다.
강 선배에게 당시 입사 십 년 차였던 앤드류는 팀장만큼 높은 존재로 보였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함을 느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일은 하나도 안 하는 거야.”
“그게 우리 회사에서 가능한 거예요?”
“그러게 말이야. 어떨 때 보면 부러운 재능과 멘탈이라니까.” p.84
“지금 이 계산들을 그냥 엑셀 프로그램으로만 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엑셀 함수로 계산한 거냐고요?”
“엑셀 함수?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말은 이 숫자들이 맞는지 계산기로 꼼꼼하게 확인해봤냐는 거야.” p.85
“앤드류 선배는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기가 나를 키웠다고 말하고 다녀.” p.86
“방금 팀장과 얘기하는 거 들었죠? 도와줄 아르바이트 직원 뽑읍시다. 지연 씨가 마음이 약해서 말 못하는 거 같길래 내가 총대 메고 나섰잖아.”
어쩌라고. 고맙다고 하라는 건가. 나는 앤드류를 빤히 쳐다보다 반응할 의욕조차 나지 않아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 그와 실랑이할 에너지조차 모자랐다. 몰라, 알아서 하겠지. p.94
그리고 신기한 체험을 했다. 나는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언젠가 후배 중 한 명이 한숨 쉬며 이야기한 말이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무능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쁜 의도는 없지만 내 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무능함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말이다. p.80
어디 앤드류 뿐일까, 내가 속한 조직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문자 하나로 퇴사를 통보한 직원이 있었으며, 이 회사에 꼭 오고 싶어 재수까지 했다고 말한 직원이 지금은 어떠냐 묻자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다 같이 웃음을 터뜨린 기억도 있다. 월요일 아침마다 설렘의 두근거림이 아닌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월요병을 호소하는 동료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쯤되면 합리적 의심을 해보게 된다. 이 책의 저자가 우리(?)를 알고 있거나 아니면 어느 조직이나 발생하고 있는 상황과 그 안의 구성원은 별반 다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조금은 씁쓸함과 분노를 담아 책을 다 읽고 나니, 동료들에게 내 모습은 어떻게 비출까,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 역시 전설의 동료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졌기 때문이다.
문득 며칠 전 지인의 집에서 보고 웃음을 터뜨렸던, 아마도 아이가 꾹꾹 눌러쓴 듯한 가훈이 떠올랐다.
“친구들 흉보지 말고 나부터 잘하자”
정말, 다음 주부터는(일단 주말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쉰 후에) 나부터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아, 물론 심장이 두근두근 바운스하는 월요병을 먼저 물리쳐야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적용하기
하나. 타인을 흉보기 전에 나나 잘하자(적용기한 : 지속)
두울. 타인에게 친절하자(적용기한 : 지속)
*기억에 남는 문장
“그러게 회사 다닐 때나 상사고 선배지, 그만두면 아무 관계도 아닐 사람들끼리 진즉 기본 매너는 지키고 살면 좀 좋아요 지금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껌뻑 죽는 척 해주는 거지, 나가면 알게 뭐예요? 말도 제대로 안 섞어줄 동네 아저씨고 모르는 아줌마지.”
(중략)
회사 막내가 아니라 그냥 담백한 타인이라고 생각하자 ‘괜찮게 대했다’라는 기준이 흔들렸다. pp.26-27
“뭔가 다들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퇴사는 대단한 각서를 쓰고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적법한 시간과 절차에 맞춰 의사를 표현하면 성립되는 겁니다.” p.35
이상했다. 성공 대신에 가슴 뛰는 업무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잔항. 그렇다면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정상이잖아. 아침에 일하러 나오는 게 설레야 맞는 거 아니야 p.71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에 정규직으로 일하는 직장인.’
이 평범함은 준이 오랫동안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게 숨 쉬듯이 당연해야 하는 것 아니가. 하지만 그 생활을 쟁취하는 것, 유지하는 것 모두 준에겐 숨이 차오르는 일이었다. p.133
“원래의 압박 면접은 이력서에 적힌 내용 중에 허위가 없나, 해당 포지션에 능력이 있나를 꼼꼼하게 검증해서 찾아내라는 거란 말입니다..(중략)..상대방에게 모욕을 줘서 당황하게 만든 후 얼마나 침착하게 반응하는지를 평가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진짜 웃긴 일이죠.”
“그러게요. 모욕을 당해도 침착해야 하는 능력이 도대체 회사 어디에 필요한 걸까요 ” pp.139-140
“누구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는 건 사실이지만, 세상이 재능에 값을 치르는 방식은 공평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사람과 가장 유연한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둘 다 세계1등의 재능을 가졌지만, 수입은 비교 불가겠죠. 이게 과연 노력의 차이 때문일까요?”
“글쎄요, 그건 아니겠네요.”
“그렇죠. 결국 세상에서 비싼 값을 쳐주는 재능을 타고나는 건 운의 영향이 큽니다. 시대도 마찬가지죠..(중략)..그러니 제 성공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게임 산업이 막 성장하고 있는 때에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진 한국에서 살았다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pp.147-148
“선미야, 나 요즘 있잖아. 부쩍 화가 많아진 것 같지 않아? 예전에 이런 일이 생기면 ‘뭐래.’하고 무시하고 넘어가던 사람이었잖아. 아니면 차분하게 항의하던지. 나이 들면서 성격이 달라지는 건가?”
“직장인이면 다 겪는 만성 질병이란다. 역류성 식도염 같은 거지. 나는 저번에 출근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내 어깨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볼 때 죽여버리고 싶던걸.” p.207
*이런 스트레스가 직장인의 만성 질병이라니, 씁쓸하면서도 수긍이 되던.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 내가 막막할 때 손을 잡아주고, 걷도록 도와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중략)..혹시 속으로 ‘내가 쟤를 사람 구실 하게 만드는데, 좀 이바지했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맞다. 바로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p.335
*서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일이 많아지는 직장생활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