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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바보들의 행진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를 서두에 밝히면서 그런 관점으로 역사의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삶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새로움을 찾는 것,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행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일들이 힘자랑이다. 개인은 개인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힘자랑이 자행되면서 그것은 인간의 삶을 파괴해 가고 황폐화시켰다. 이 책은 이런 관점에서 세계 석학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겐 공감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발전이란 이름으로, 편리란 이름으로 무수한 다른 존재들을 이용해 왔으니까 지혜로웠다고 자평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의 조금의 편의가 후세 사람들에게 엄청난 시련의 시간이 되고, 고통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우리는 잘 안다. 우리 이후 세대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야 할지를.
내용
이 책을 읽으면 대충은 뭐가 바른 길이고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야 할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리석음이라는 것들이 어떻게 포장되었고, 어떻게 각되었는지? 책은 그런 불편한 진실을 우리들에게 잘 그려보여 주고 있다. 즉 세계 석학들의 35가지 인류의 바보짓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우리의 조상 호모 에릭투스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약 30만 년 전부터 점차 호모 사피엔스로 변모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들 중 가장 무책임한(혹은 가장 멍청한) 개체들은 약 16만전 전 차츰 아프리카를 벗어나 덜 매력적이고 더 추운 지역으로 모험을 감행했다. 2만 5,000년 전에는 얼어붙어 있었을 베링해협을 거쳐 꿋꿋하게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했고, 다시 남반구로 내려왔다. 애초에 떠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쉬웠을 것을! 그렇게 그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현지에 서식하는 모든 동물 개체 및 먼저 자리 잡고 살고 있던 먼 사촌뻘 되는 인간 종까지 대규모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재 가속화 중이며 대재앙을 몰고 올지도 모르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발단이다.
책은 인간의 삶이 발전적이라기보다는 멍청한 짓의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점을 두고 얘기해 나간다. 눈에 뻔히 보이는 앞날의 대재앙 결과를 생각하면서 과거 인간의 모습 속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그 원인들에 해당하는 일을 자행한 인간들이 멍청했다고 결과론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정말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은 지난 시절 만들어온 결과물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지는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역발상으로 이루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학자들이 발전이라고 하는 것을 멍청한 짓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은혜를 저버리고 개척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고 쟁취하고 하는 일들이 결국은 파괴의 한 속성임을 말하고 있다. 오늘 나타나고 있는 결과가 그것을 반증한다. 전쟁과 자연 질서의 파괴, 그것은 인간들을 자멸의 길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들의 멍청한 짓은 동굴의 벽화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500년 전, 에티엔 들라보에티는 소논문 <자발적 복종>에서 이에 대해 본질적 질문을 던졌고 제법 설득력 있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는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관습을 꼽았다. (관습에 관한 특히 멍청한 명언으로는 ‘대안이 없다’가 있다) 두 번째로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피라미드 조직망을 지적했다. 세 번째로는 그는 사후에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명하에 순종과 인내를 가르치는 종교를 ‘자발적 복종’의 원인으로 제시했다. 실제로 군주들은 자신이 초월적 존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의식을 치를 때 성경에 맹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몇몇 사람이 권력욕을 가져 지배 계급이 되었다. 지배 계급이 족장으로부터 권위를 물려받아 결국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결성하고 그곳에서 권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몇 사람의 권력을 사람들은 왜 인정을 해 주었을까?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의 영육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상태를 그들 스스로 만들어준 결과를 가져온 일인데 말이다. 권력을 인정해 주면서 자발적 복종이 이루어진 원인에 대해 분석해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함으로 국가 단위의 조직이 완성되고 지배 계급이 생겨나면서 그들이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치르는 전쟁 같은 것에 일반인들이 희생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은 이 권력이 갈수록 더욱 공고하게 되어가는 결과가 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일인칭으로 지칭할 때의 어리석음은 나의 결함을 드러내는 것도, 나의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어리석음이란 나약함도 무지도 아닌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며 인간을 구분하는 한 부분이다. 공자의 <논어> 몇 구절만 떠올려보아도 이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옛사람에게는 세 가지 한계가 있는데, 지금은 그 한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옛날의 사나운 사람은 대범했으나, 지금의 사나운 사람은 방탕할 뿐이다. 옛날의 잘난 척하는 사람은 청렴했으나, 지금의 잘난 척하는 사람은 성내며 거스를 뿐이다. 옛날의 어리석은 사람은 정직했으나, 지금의 어리석은 사람은 남을 속일 뿐이다.
어리석음은 결점이다. 그런데 옛사람들의 어리석음 자체에는 악의가 없다. 논어에서 어리석음을 논하는 것은 당대 세습 귀족들의 타락에 맞서 스승을 세우려는 도덕적 신흥 선비들에 대비되는 일반 서민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공자에 따르면 신흥 선비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인격도야를 위해 지난한 배움의 과정에 기꺼이 뛰어든 사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난의 배당이 되는 것은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인간의 거친 본성이 아니라 나태와 폭력, 표리부동이다. 이 때는 그래도 어리석음이 진일보의 계기가 되고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의 사람들은 어리석음만 있고 어리석음이 가진 순수와 열정은 없다. 어리석음은 그대로 어리석음으로 끝이 난다. 훈민정음 서문에 ‘어리다’라는 말이 어리석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에는 그렇게 사용되었다. 그 어리석음에는 순수의 의미가 가미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의 어리석음은 모자람의 의미가 강하다. 역사 속에서 찾아낸 어리석음은 순수의 열정과 닮은 구석이 많다. 오늘의 어리석음의 의미로만 해독하면 역사가 곡해된다. 저자의 어리석다는 말을 우리는 잘 음미해야 할 듯하다.
2001년 5월 10일, 프랑스에서는 노예무역과 노예제를 반인권범죄로 인정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노예제와 노예무역은 인류의 정신에 극단적 폭력의 이미지를 각인했으며 극심한 인종주의를 발생시킨 주범이었다. 그런 만큼 이에 관한 교육이 권장되고 있지만, 실행에는 난맥상이 드러난다. 어처구니없게도 유럽은 대서양의 노예제가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또는 중동의 노예제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펼치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노예제, 노예무역은 인류가 저질렀던 가장 참혹한 역사 중의 하나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권 침탈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은 땅을 빼앗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전쟁에 승리할 경우 같이 싸우는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로 삼아 생사여탈권까지 쥔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거나 인간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노예제는 정말 인류 역사상 가장 바보짓이다. 기득권자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이런 일들인데 말이다.
프랑스에서 2001년에 이런 반인권범죄로 법이 발의된 것은 그동안 얼마나 노예가 습관적으로 자행되었는가는 잘 보여준다. 이기에서는 노예제의 비교를 운운하면서 노예제가 서로 다름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지만,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할 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인권을 침탈하는 행위들이다. 인간들이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일이다. 자신들이 노예를 부리는 일이 자신의 후손들이 노예 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로 나타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노예제는 책이 아니라도 인류가 행한 가장 바보스러운 일 중의 하나다.
전쟁이 역사학계와 역사 편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쟁 영웅들과 정복을 과시하는 왕들의 무용담을 풀어놓은 역사책의 초반에서부터 우리는 전쟁을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전쟁은 지난 수천 년간 인간의 역사를 빚어냈다. 그렇게 전쟁은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발전시킨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개념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전쟁의 기저에는 폭력성과 이기심이 들어 있다. 전쟁이 인류 공동체에 내재된 것이라면 우리 조상들은 딱 지금의 우리만큼만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폭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다양해 졌고 과격해 졌다. 그러기에 똑같은 폭력성이라도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오늘날의 폭력성이 더욱 더 폭력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폭력성에 기인해 악을 쌓아왔다. 이 폭력성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뻔한데, 이는 메아리인데 그것을 인간들은 간과한다. 내로남불만 외친다. 지구를 사용하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인간이 공동으로 절제하고, 사용해야 할 소중한 시공간을 우리 공동체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정해진 마스크도 쓰지 않고, 거리두기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그들이 자신에게 똑같이 돌아가는 것을 모를까? 아니 다 알고 있으면서 우선은 자신에게 이롭게 보이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자행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인류의 탄생기부터 현대까지 끊임없이 불길을 일으키는 어리석음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바보짓을 하면서 살았다. 그 바보짓이 권력, 전쟁, 노예, 개발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은 결론적으로 공멸을 향해 가는 길의 한 과정이다. 그러기에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바보짓>이란 일깨움을 주는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부추기고, 실수를 키우며, 진실을 막고, 희망을 배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결국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간을 희생하게 만들며 고통당하게 한다. 인간들은 이들의 피해자가 되고 공범자가 되기도 한다. 모험이라는 것이 인류의 삶을 확장시켜 왔다고 볼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피폐하게 만들어 나가는 주범이 된다. 역사를 보라. 하나의 패러다임이 생겨나 바뀔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입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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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류가 걸어온 길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삶이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속성이 그런 면도 있지만 인간끼리의 쟁투가 가져오는 아픔은 말할 수가 없다. 이들을 치유하려면 자연이 필요하다. 자연이 자연스러워질 때, 좀 더 질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은 인간이 개인의 유익을 구하면서 만들어진 세상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 바보짓이라는 말로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사가 이렇게 바보라는 말로 재단되어 표현되고 있을까? 생각하는 마음에 인류에 대해 안쓰러움이 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