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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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저편

리뷰 총점 9.3 (7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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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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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일몰의 저편』 좋은 소설의 판단은 누가 하는 것일까?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h*****9 | 2021.10.12 리뷰제목
소설을 읽을 때면 결말이나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혼자서 주절거릴 때가 있다. 소설이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다양한 감상 혹은 평가가 따르게 된다. 소설은 작가의 작품이다.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작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작품 판단하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리뷰제목

소설을 읽을 때면 결말이나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혼자서 주절거릴 때가 있다. 소설이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다양한 감상 혹은 평가가 따르게 된다. 소설은 작가의 작품이다.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작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작품 판단하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기리노 나쓰오의 일몰의 저편은 이 책의 발행편집인인 김 사장의 글에 유혹당해서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책의 내용이 궁금해 견딜 수 없다. 작가의 작품을 몇 편 읽었지만 전작주의에 임할 만큼 매력적인 작가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어쩐지 자주 읽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성애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가 문화문예윤리향상위원회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어느 외딴 바닷가의 요양소에 감금되며 일어나는 이야기다. 강간이나 폭력, 범죄를 긍정하는 것처럼 썼다는 독자의 고발이 있었다고 했다. 문예윤리위원회 즉 문윤은 작가가 자기 작품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훈련하게 하여 교정 즉 갱생을 시키는 역할이다. 작가 마쓰 유메이(마쓰시게 간나)가 도착한 건물은 외부와 단절되어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감금된 작가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며, 식당에서조차 벽을 바라보고 식사를 해야 했다. 마쓰 유메이는 그들의 말을 잘 들으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그들이 원하는 작문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쓰지 않은 종류의 글이었다.

 

모두에게 올바른 소설이란 어떤 것일까. 그들에게 순응하기로 한 작가는 처우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바닷물 냄새가 배어 있는 미지근한 물에서 얼음조각이 들어간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거다. 감점 7점을 받아 7주간의 격리 생활을 해야 하는 작가에게 이제 남은 기간은 한 달여 남짓. 곧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작가라는 표현자들, 특히 사회적 상식과 동떨어진 작품을 쓰려고 하는 작가들을 섬멸하려고 합니다. 물론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사람들도 저들에게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정부 말을 잘 듣는 우민을 대량생산하는 것이겠지요. (201페이지)

 

문윤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작가들을 배제하고 갱생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작가들을 비판하고 매장하려 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소설일 뿐이지만 일본도 이렇다는 것인가. 그저 작가의 상상일 뿐일까. 진행중이라는 것인가.

 

누구라도 공감할 아름다운 이야기만 쓴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독자들은 아름다운 이야기에 금방 싫증 내고 말 것이다. 더 강력하고 짜릿한 이야기를 원할 수 있다는 거다.

 

 

 

작가가 외딴 요양소에 감금될 경우 대부분 다른 소설에서는 작가들이 서로 힘을 합해 그곳을 뛰쳐나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작가들은 무력하다. 체제에 순응하거나 그렇지않으면 죽음을 택한다. 과연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 왜 방법을 찾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무언가 해결을 바랐던 거 같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인정받는 것, 순응하는 게 작가가 아니라 작가들을 가두고 갱생하려는 그들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시시한 논리 들먹이지 마. 작품은 자유야. 인간의 마음은 자유니까. 무엇을 표현해도 돼. 국가권력이 그걸 금지하면 안 돼. 그게 검열이야. 파시즘이라고. (317페이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작가의 생각을 짐작하게 했다. 인간의 다양성. 다양한 인간만큼이나 그들의 고통도 다채롭다는 것. 작가는 다양한 인간의 고통을 작품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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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0 댓글 2
종이책 일몰의 저편 평점9점 | YES마니아 : 로얄 k*****3 | 2023.04.19 리뷰제목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의 생각이 독자로 하여금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내 생각이 타인의 생각으로 침식될 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생각한다. 세상의 이슈를 무시하고 사랑과 낭만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좋은 인상을 주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글이 주는 힘을 알기에 글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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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의 생각이 독자로 하여금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내 생각이 타인의 생각으로 침식될 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생각한다. 세상의 이슈를 무시하고 사랑과 낭만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좋은 인상을 주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글이 주는 힘을 알기에 글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강약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 아마추어인 나도 이럴진대 작가들은 더 많은 생각을 하며 글을 쓰지 않을까? 그래서 나와 취향이 맞는 작가를 만나는 걸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한때는 열심히 찾아 읽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책. 시들해졌고 무시했던 시간이 제법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녀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아니 독자에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은 무엇인지. 그런 기준은 과연 누가 나누는 것인지.

 

성애 소설을 쓰던 작가가 문예윤리위원회라고 칭하는 조직의 소환장을 받고 그곳에 찾아간다. 금방 풀려날 거라고 믿었던 작가. 그곳은 핸드폰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곳으로, 바닷가의 격리된 건물이다. 위원회의 요구는 단 하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것. 즉 누가 읽어도 이상하지 않을 올바른 글을 쓰라는 것. 외설, 폭력, 범죄 등이 담긴 글을 쓰면 거지 취급을 받지만, 위원회가 원하는 글을 쓰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위원회. 과연 이곳에서 작가들은 나갈 수 있는 것일까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 자유로운 글을 쓰는 게 자유민주주의 국가일까? 얼마나 자유로운 글을 써야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노래나 영화 혹은 드라마도 심의위원회가 있어, 타당하지 않은 것은 방송되지 않았다. 그 타당한 이유가 누구에게든 납득 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규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아닐까? 나는 예술에 진지한 사람도 아니고, 예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지 정확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예술의 범위가 예술인지 외설인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애 장면을 묘사하더라도 그게 성애를 위한 성애인지, 과정을 위한 성애인지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 자체가 매일 희망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누구나 공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라고 강요하는 게 맞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이 책에서처럼 어느 날 작가들이 고립된 바닷가 어느 곳으로 끌려(?)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얼마만큼 저항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으며 불의를 보면 되도록 참으라고, 어떻게든 못 본 척하라는 말을 한다. 나선다고 달라지지 않는 세상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의 아이들이 피해 입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인생이, 삶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신념이 어느 순간 변절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 주는 부모일까? 신념을 가진 채 움직이고 행동하라 말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읽은 기리노 나쓰오의 책. 반짝이는, 신박한 재치가 숨어있는 건 아니지만, 작가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창작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고민하게 되는 책이다. 우린 창작이나 표현의 자유에 얼마나 유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우리는 속박이 전혀 없는 것인지,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의 구분은 대체 누가 만드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8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8 댓글 2
종이책 [서평]일몰의 저편 - 기리노 나쓰오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b***8 | 2021.10.11 리뷰제목
책을 읽다가 덮었다.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뒤져본다. 있다. 콜라를 가져와서 캔을 딴다. 한 모금을 가득 들이마신다. 다음 문장을 보는 순간 내가 했던 일이다. 콜라를 좋아하지도 않고 일 년에 몇 번 먹을까 말까 한데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콜라가 마시고 싶어졌던 까닭이다. 그녀 마쓰와 함께 나 또한 B98번이라는 이름으로 갇혔나 보다.     다다가 권하자마자 나는 빨대의 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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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덮었다.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뒤져본다. 있다. 콜라를 가져와서 캔을 딴다. 한 모금을 가득 들이마신다. 다음 문장을 보는 순간 내가 했던 일이다. 콜라를 좋아하지도 않고 일 년에 몇 번 먹을까 말까 한데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콜라가 마시고 싶어졌던 까닭이다. 그녀 마쓰와 함께 나 또한 B98번이라는 이름으로 갇혔나 보다.

 

 

다다가 권하자마자 나는 빨대의 비닐을 서둘러 벗기고 갈색 액체에 꽂았다. 소리도 내지 않고 달콤한 액체를 빨아들인다. 미세한 기포가 목을 자극하고 인공적 감미가 온몸에 스며들며 퍼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콜라가 이토록 맛있다고 느낀 적은 없다. 트림을 하자 다다가 웃었다. (191p)

 

츠지무라 미즈키의 [슬로하이츠의 신]에서는 작가 고키가 쓴 작품을 보고 현실에서 누군가를 사람을 죽이는 일이 나온다. 당연히 매스컴을 타게 되고 작가는 그 이후로 한동안 칩거하게 된다. 역자 후기에 보면 2000대 초반 <배틀로얄>처럼 유혈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비난이 있었다고 한다. 한 반이 선택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여서 한 명만이 살아남아야 하는 작품. 책으로도 영화로도 모두 봤었는데 흥미로운 만큼 잔인함은 피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런 잔혹함을 뺀다면 이런 장르 문학은 존재할 수 있을까? 순하고 착한 문학만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하얗고 순수한 그런 상태로 유지가 될까.

 

 

음란, 불륜,폭력,차별,중상, 체제 비판. 이런 것들은 이제 어느 장르에서도 허용되지 않아요. (118p)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불륜이 소재로 사용되고 음란을 문학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해리 보슈나 요네스뵈의 해리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폭력이 주된 요소로 나오고 체제를 비판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주요 소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차별을 소재로 다루면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드러내어 강하게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떤 장르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는 무슨 재미로 책을 읽게 될까.

 

작가 마쓰는 문예위원회 조직에 끌려가서 감금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끌려갔다라는 말은 어색하다. 단지 소환장이 날아왔고 그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갔다. 내용으로 보자면 이 조직은 법적인 규제는 없는 것 같다. 인정받지 않은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 소환장을 받고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무시하고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그곳에 감금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살짝 해보게 된다. 아니 그녀가 직접 가지 않았다면 그곳의 사람들이 와서 그녀를 정말 무력으로 끌고 갔을까. 모를 일이다.

 

그렇게 그곳에 간 그녀는 수용된다. 숙식을 제공하면서 그곳에서 순화과정을 밟게 된다. 반항을 하거나 사건을 일으키면 그곳에 있는 기간은 더 길어질 뿐이다. 그곳에서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녀는 그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한 맛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솔직히 그녀가 쓰고 있는 그 '카레라이스'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이야기 속에서는 결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더 이어 써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작가가 기리노 나쓰오라고 할 때부터 결말은 이미 예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작품 중에서 미로 시리즈를 가장 좋아한다. 어둡고 무거움이 숨막힐 정도로 조여드는 작품들이다.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였기에 이런 발상을 떠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은 작가의 순한 맛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절망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편집자의 후기가 뇌리에 남는다. 그렇다. 나는 절망을 맛보기 위해 기리노 나쓰오의 책을 집어 든다. 그러니 그 어떤 종류의 어둠과 폭력과 그로테스크함이라도 마음껏 써 주시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피하면 될 일이다.

5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5 댓글 4
종이책 읽고 싶은 소설을 선택할 자유 평점8점 | r*********s | 2021.12.09 리뷰제목
자유롭게 읽고 쓴다. SNS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말한다. 개인적인 공간에 남긴 기록은 한순간 사회적 공론에 휩싸일 때도 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에 댓글로 다툼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자기 검열을 시작한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교정 같은 단순한 일부터 문맥이 맞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좋아서 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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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읽고 쓴다. SNS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말한다. 개인적인 공간에 남긴 기록은 한순간 사회적 공론에 휩싸일 때도 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에 댓글로 다툼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자기 검열을 시작한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교정 같은 단순한 일부터 문맥이 맞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좋아서 쓰던 글이 타인과 소통을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면 의문이 생긴다.

 

궁극적으로 글을 쓰는 목적은 무엇일까. 글의 형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한 행복, 기쁨, 즐거움은 아닐까.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장르 중 하나가 소설일 것이다.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가공의 이야기, 그 안에서 독자는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한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기에 일률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러니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나누는 획일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니까.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정부가 관리하고 판단하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나오키상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요미우리문학상 등을 수상한 기리노 나쓰오의 장편소설『일몰의 저편』(북스피어, 2021)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성애 소설을 쓰는 작가인 주인공 ‘마쓰’는 ‘문예윤리위원회’(이하 문윤)라는 조직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다. 독자의 고발이 있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설명 없이 강습에 참여하라는 내용이었다. 며칠이면 끝날 거라는 직원의 설명에 아무런 의심 없이 길을 나선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말이다. 마쓰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단절된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한 ‘요양소’다. 마쓰에게 지정된 방은 형무소와 같았다. 작은 책상, 화장실, 지급되는 생필품으로 생활하며 식사, 목욕도 정해진 시간에만 가능했다. 인터넷도 전화도 사용할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와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건물 곳곳에서 자신과 같은 복장의 사람들을 지나쳤지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 이곳에 왔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말 그대로 고립 상태에 놓였다.

 

그곳에서 마쓰는 이름이 아닌 ‘B98’번이었고 소장이라는 사람과 상담이 시작되었다. 마쓰가 쓴 소설이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라고 문윤이 판단해 요양소에서 갱생과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간은 마쓰가 얼마나 문윤의 조치에 따르고 협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B98번이 된 마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설은 그저 허구이며 상상의 세계가 아니던가. 단지 한 장면의 묘사, 몇 줄의 표현으로 인해 소설 전체를 평가받는 일은 부당했다. 독자의 호불호가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당연한 감정이다. 작가에게 그 누구도 그런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제재를 가할 수 없으니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주의 국가에서 개인을 갱생한다는 상상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소설은 너무도 비참한 방법으로 마쓰를 구속하고 학대한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을 위반하면 요양소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도 묵살했다. 그들의 설명은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서 창작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산책을 빌미로 요양소를 탐색하는 마쓰가 알게 된 사실은 더욱 잔인했다. 하루하루 요양소에 적응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처음에 끓어올랐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작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말이었다.

 

마쓰가 그들의 요구대로 쓴 글을 읽고 검열하며 문윤은 그녀가 충분히 갱생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윤에서 원하는 글은 명확하고 단순했다. 누구나 감동을 느낄 착하고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훌륭한 소설이라며 노벨문학상을 언급한다. 마쓰도 쓸 수 있었다. 요구하는 대로 변절자, 배신자도 충분히 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건 작가가 원하는 글이 아니고 쓰고 싶은 글이 아니었다. 무엇을 쓸지 창작의 영역까지 허락이 필요한 세상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글은 다양성과 고유성은 무시한 AI나 써내는 글이 아닐까. 기능적으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를 원할 뿐 마쓰라는 인간 개인의 글은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의 싸움이었다. 누가 봐도 개인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마쓰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정하며 그녀를 자극했고, 도발하게 만들어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드는 게 문윤의 전략이었다. 인간은, 그것도 예술가인 작가는 갱생되거나 교정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소설은 마치 문학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한다. 독자에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선별할 능력이 있냐는 듯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는 문학이라는 세계, 작가의 창작적 자유는 그들의 집단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작가는 곧 개인이며 독자다. 소설속 문윤의 논리에 따르면 좋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처럼 좋은 소설만 읽는 독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폭력이다.

 

이쯤에서 독자인 나는 어떤 독자인가 생각한다. 더불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지난 정부의 예술가 명단을 떠올린다. 정부의 뜻에 반하는 목소리를 지닌 이들은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다. 정치가 예술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 예술가의 정치적 신념은 작품과는 별개다. 설령 같다고 해도 그건 개인의 자유 영역이다. 그렇다면 소위 문학상 수상작, 베스트셀러, 고전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다양한 시도를 하는 실험적인 소설이나 사회를 비판하는 고발 소설과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는 탐사 소설은 읽지 말아야 할까. 그렇다면 작가 마쓰가 아닌 비주류 소설을 읽는 독자도 문윤의 요양소에서 갱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인 21세기에 불가능한 이야기라 장담했지만 막상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아무도 모르는 권력이 움직이는 검열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쓰는 이 글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작품은 자유야. 인간의 마음은 자유니까. 무엇을 표현해도 돼. 국가권력이 그걸 금지하면 안 돼.”(317쪽)

 

“내가 말하는 건 작가가 책임을 지고 표현한 작품이야. 허구의 이야기 말이야. 허구는 다양한 인간을 묘사하지. 개중에는 차별적 인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지. 왜냐하면 인간 사회가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의 고통을 그리는 게 소설이니까 아름다운 것만 쓸 수 없지.”(317쪽)

 

그리하여 마쓰의 처절한 외침은 곧 내 것이 된다.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고 좋은 소설만 읽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꾸며진 세상은 좋은 세상일까. 인형처럼 똑같은 얼굴과 마음을 지닌 인간들이 가득한 사회를 상상하자 오싹해진다.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마쓰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떠냐고 말이다. 소설 속 디스토피아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인간의 심연을 포착한 글이 소설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배우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마쓰가 문윤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그 때문이다.

 

단순하게 재미만 놓고 봐도 스릴 넘치는 소설이다. 하지만 묵직한 여운을 안겨 준다. 흥미롭게 진행된 마쓰와 소장의 토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다 정신을 차린다. 읽고 싶은 소설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독재의 사회가 될 것임을 알기에 모든 소설을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를 따라갈 수 없다. 작가와 독자의 인격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처사를 따를 수 없고 따라서도 안 된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마쓰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현명한 독자가 되려는 묘한 욕망과 함께 말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소설 밖 현실에선 ‘일몰의 저편’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Littor》 33호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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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구매 일몰의 저편 평점10점 | y****o | 2022.03.18 리뷰제목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알게된 작가인데 이로서 두번째 작품이네요. 처음 읽은건 절판된 로즈가든이었고, 이런 류의 소설을 별로 많이 읽어보진 않았는데 장르소설? 작년에 사놓은건 무지 많은데 거의 안읽고... 일몰의 저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고 앞으로도 팬 될것 같아요. 절판되었던 로즈 가든도 이북으로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나이가 현재 칠
리뷰제목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알게된 작가인데 이로서 두번째 작품이네요. 처음 읽은건 절판된 로즈가든이었고, 이런 류의 소설을 별로 많이 읽어보진 않았는데 장르소설? 작년에 사놓은건 무지 많은데 거의 안읽고...

일몰의 저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고 앞으로도 팬 될것 같아요. 절판되었던 로즈 가든도 이북으로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나이가 현재 칠순?정도라고 들었는데 이런 감각이 나온다는거에 감탄했고 너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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