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눈으로 본 사람들 세상. 『개』 (2021 개정판)
정말 궁금하다.
다른 생물들도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인식하고 있을까? 아니, 사람들이 사는 모습, 하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나쓰메 소세끼의 소설은 고양이를 화자로 내세워 고양이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소설은 개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김훈은 또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서는 말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주인공인 개, 이름은 보리다. 진돗개다.
먼저 보리라는 개가 세상과 만나는 모습을 살펴보자.
보리는 수놈으로 태어났는데, 그가 맨처음 세상과 접한 모습은 다음과 같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내가 주둥이와 앞발로 엄마 가슴을 헤집고 젖을 빨아먹을 때, 세상의 느낌은 따뜻하고 포근했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17쪽)
따뜻하고 포근한 촉감에 고소한 냄새, 그게 보리가 만난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다보니, 사람의 경우도 그와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그런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이를 낳아서 젖을 먹이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바로 보리가 떠올린 정경이 그려지지 않을까? 젖먹이 사람에게도 세상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고소한 냄새까지 풍기는 곳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소설이 갖는 한계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의 느낌으로 동물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말이다.
그래도 이 소설은 최대한 개의 입장에서, 개의 시각으로, 개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개의 입장으로 바꿔 생각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이런 것 말이다.
냄새에도 거리가 있다. 먼 냄새가 있고 가까운 냄새가 있다. 독한 냄새가 다 가까운 냄새가 아니고 엷은 냄새라고 해서 먼 냄새가 아니다. (52쪽)
이런 생각은 사람으로서는 여간해서 떠올리기 어려운 일일테니까.
보리가 사람과 관계를 맺는 법.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견인 개인 보리가 어떻게 사람과 인연을 맺어가는지 살펴보자.
아아, 나는 그때 사람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다. 놀랍고도 기쁜 냄새였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정답고 포근해서 눈물겨운 냄새였다. (40쪽)
그 냄새는 사람 몸의 거죽에서 나오는 냄새가 아니라 몸속에서 오랫동안 절여진, 아주 튼튼한 냄새였다. (41쪽)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그 짧은 동안에, 사람의 몸 냄새는 내 일생에 잊지 못할 느낌으로 몸속에 깊이 들어와 박혔다. 새로 태어난 사람의 냄새와 오래 산 사람의 냄새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그날 알았다. 사람의 몸 냄새 속에 스며 있는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슬픔의 흔적까지도 그날 모두 알게 되었다. 그 냄새는 모두 사랑받기를 목말라하는 냄새였다. (41쪽)
개는 냄새로 사람에게 다가가며, 냄새로 사람을 구분하며, 냄새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새벽 선착장에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라면 냄새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람 냄새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맡은 주인집 손자의 젖내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튼튼한 냄새였다. (74쪽)
김훈의 ‘냄새’론(論)
개가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인 ‘냄새’맡기를 계속해서 읽다보니, 저자 김훈은 여러 감각중 후각에 관한 묘사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훨씬 더 확실하고 튼튼한 냄새였다. (74쪽)
향긋한 냄새가 가늘게 퍼져왔다. (78쪽)
냄새들은 잘 말라서 바스락거렸다. (86쪽)
비오는 날 개집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내 몸은 그 냄새에 절여졌다. (145쪽)
나는 영수의 냄새를 맡고 사람 냄새를 처음 알았다. (85쪽)
나는 사람의 몸속이 어떤 냄새와 어떤 느낌으로 차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 따스함과 축축함과 부드러움을 알게 되었다. (88쪽)
벼 냄새는 봄에는 희미해서 풀 냄새와 같았으나 여름이 지나면 노르스름한 향기가 뚜렷해졌다. 나는 그 모든 냄새를 좋아했다. (99쪽)
난 콧구멍으로 흙냄새가 들어오지 않으면 못 살아, 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할머니는 나하고 똑같다. (133쪽)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냄새를 형용하는 말들을 모아보면 정말 어떤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김훈이 피력하는 냄새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른 작품까지 넓혀 살펴본다면, 정말 김훈의 ’냄새론‘ 하나 나올 법하다.
김훈은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서도 ’야백‘이라는 말을 통해 냄새를 묘사한다.
어미의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야백은 네 다리로 섰다. 네 다리가 땅을 디딜 때, 야백은 그 다리에 와 닿는 느낌으로 땅의 든든함을 알았다. ( ...........) 세상은 향기로웠고 힘이 가득 차 있었고, 끝이 없었다. 흙에서 햇볕 냄새가 났다. (위의 책, 68쪽)
바람이 불어와서 피가 흩날렸다. 야백은 제 피의 냄새를 맡았다. 냄새는 진하고 비렸다. 제 몸 깊은 곳의 냄새였다. (위의책, 89쪽)
나하를 건너오는 바람에 실려 오는 말똥 냄새로, 야백은 물 건너편에 수많은 말이 모여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몸 냄새가 다른 말들이었다. (위의책, 98쪽)
추억으로 남아있는 할머니의 ’강아지‘
개 보리가 강아지였을 시절,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마루 쪽으로 부지런히 달려간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주인 할머니는 강아지 보리를 부른 게 아니라 돌을 막 지난 손자 영수를 부른 것이었다.
하면서도 할머니는 팔을 뻗어서 나를 품에 안았다. (40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를 강아지라 부르셨던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중학교 때의 일이었는데 눈이 펑펑 오는 겨울에 학교에 갔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께서 나를 맞이하시면서 “ 아이구 추웠지, 내강아지 .. 어서 들어와 몸좀 녹여라 …” 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손자를 귀여워 하시던 그 다정한 그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강아지 보리를 통해 그런 할머니를 보여준, 저자 김훈은 한국인인 것이 분명하다.
개에게 공부란? 사람에게도 공부란
개가 공부한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김훈은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습득하는 것을 공부라 한다. 해서 개에게도 공부는 필요하다. 그럼 개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할까
개의 공부는 매우 복잡하다. (28쪽)
선생님은 많다. (29쪽)
나는 몸으로만 공부를 한다. 글씨나 숫자로 하는 공부는 무슨 공부인지 나는 알 필요없다. (120쪽)
내 공부는 오직 내 몸뚱이로 비벼서 알아내는 것이었다. (78쪽)
그렇게 공부하는 개, 보리는 공부한 결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앎, 우리도 알아야 한다.
신바람은 개의 몸의 바탕이고 눈치는 개의 마음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을 치사하고 비겁하게 여기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도 개처럼 남의 눈치를 잘 살펴야 한다. 남들이 슬퍼하고 있는지 분해하고 있는지 배고파하고 있는지 외로워하고 있는지 사랑받고 싶어 하는지 지겨워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척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31쪽)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불쌍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48쪽)
그렇게 우리의 선생이 되는 보리에게 공부는 끝이 없다.
개들의 공부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기초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무엇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무엇이 사람들을 괴롭히는지를 재빨리 알아차리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31쪽)
이 말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 대신에 타인, 다른 사람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면, 그건 우리 사람에게 향하는 말이 될 것이다
해서 보리의 어록, 사람 사는데 적용해도 될 것들이다.
까닭 없이 짖는 개는 없다. 그러나 어느 때 짖는가를 보면 그 개가 어떤 개인지 알 수 있다. (111쪽)
사람 동네에서 개 노릇 하기가 쉽지 않았다. (114쪽)
싸움은 슬프고 외롭지만,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115쪽)
이런 문장, 읽으면 저절로 미소가
광견병 예방 주사를 맞는 날, 나는 내 목줄을 잡은 영희를 따라서 보건지소에 갔다. (........) 개가 저 혼자서 예방주사를 맞으러 갈 수는 없었다. 개 혼자 가면 사람들은 예방주사를 놓아주지 않는다. (162쪽)
비발디의 <사계>, 보리의 <사계>
비발디의 <사계>만 들을 게 아니다. 보리가 관조하는 <사계>는 더 들을만하다.
봄의 흙은 향기로웠고, 그 흙 속에 고소하고 따스한 봄볕이 스밀 때 우리는 기쁨을 참지 못해 흙에 몸을 비비며 뒹굴었다. (50쪽)
벼 냄새는 봄에는 희미해서 풀 냄새와 같았으나 여름이 지나면 노르스름한 향기가 뚜렷해졌다. 나는 그 모든 냄새를 좋아했다. (99쪽)
가을 햇볕에 나무가 말라가면서 풍기는 향기를 나는 사랑했다. (135쪽)
세상의 소리들이 메말라서 깨끗해지는 겨울의 헐거움을 나는 좋아했다. (167쪽)
나는 겨울이 힘들어서 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봄이 신기해서 봄을 기다렸다. (168쪽)
다들 추워서 그런지, 겨울에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 같았다. (169쪽)
가만히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보면 알게 된다.
우리가 자연이 주는 이 좋은 것들을 얼마나 놓치고 살아가는지를. 요즘 누가 봄의 흙냄새를 맡기나 하며, 가을 햇볕에 나무가 말라가는 것을 생각이나 하고 살까, 그런 것 다 놓치고 살아간다. 개도 신나게 누리는 그 자연의 즐거움을.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우리 엄마의 모든 슬픔은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21쪽)
땅을 놀리면 벌 받는다. 노는 땅에 쪼이는 햇볕이 아깝지도 않냐? (137쪽)
다시, 이 책은
이 세상의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안개 낀 새벽과 노을 진 저녁들은 모두 입을 벌려서 쉴 새 없이 무어라 지껄이면서 말을 걸어온다. 말은 온 세상에 넘친다. 개는 그 말을 알아듣는데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직 제 말만을 해대고, 그나마도 못 알아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싸움판을 벌인다. 늘 그러하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16쪽)
자연이 건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 아니, 그런 말을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사느라고, 너희들이 고생이 많다, 라고 개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데도 보리는 그 다음 말에서 우리 가슴을 울린다.
나는 그 고통과 슬픔보다 개로 태어나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자랑을 먼저 말하려 한다. (16쪽)
이 발언이 개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우리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으면 좋겠다. 슬픔과 고통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자랑을 말할 수 있다면!
이 책, 『개』는 200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2021년에 개작한 것이다.
작품의 기조는 변함이 없어, 다시 읽게 되는 입장에서 줄거리보다는 김훈이라는 작가의 글에 조금더 신경을 쓰면서, 읽을 수 있다. 해서 다시 한번 이 작품의 매력을 흠뻑 맛볼 수 있었다는 점 말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