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랑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낸 ≪운명의 꼭두각시≫.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생을 마감한 문학의 거장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덧 씌워진 껍질을 들추고 주의 깊게 들여다 보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를 점점이 채우고 있는 개개인의 서사를, 상처 입은 약자의 서사는 더더욱, 무심코 지나쳐 버리게 된다. 마치 우드컴 파크를 보러 왔으나 160여 년 전부터 이어져 온 그곳의 내밀한 이야기는 알지 못하는 관광객처럼 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로 구성된 영국을 생전에 꼭 한번 가야 하는 나라, 세련되고 낭만적인 나라라며 선망 했지만, 정작 아일랜드라는 변방의 국가엔 내 관심의 렌즈를 줌-인 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아일랜드를, 우리나라도 그러했듯 독립과 자유를 갈망 했던 아일랜드를,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비로소 들여다 보게 되었다.
물려 받은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낯선 이들이 아픈 데는 없는지 묻곤 하던 윌리. 그는 영국 블랙 앤드 탠즈가 첩자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한 킬네이 대학살 사건에서 아버지와 여동생들을 잃는다. 폐허가 된 킬네이를 떠나 알코올 중독자인 어머니와 근근히 살아가던 중 영국인 외사촌 메리앤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만다.
“우리가 지금 함께였다면 당신의 고통을 입맞춤으로 날려 보내기 위해 두 팔로 당신의 머리를 감싸 안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을까? 그러면 내가 어쩌다 영국인인 것을 용서해주었을까?” / 메리앤, 198
킬네이는 그 어느 때보다 무시무시한 곳이었지만 난 다른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다. 반쯤 탄 집이 아무리 음울해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도 당신이 거기에 속했으므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었다.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메리앤, 264
사랑이란 게 왜 이리도 지독한 것일까. 함께라면 폐허가 된 킬네이에서의 삶도, 가족을 잃은 슬픔도, 억압 받는 자의 비참함도 다 사라질 것 같다는 윌리의 진심... 불결한 죄인 취급 받으며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 걸 알면서도,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증오와 적대를 알면서도, 그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싶은 메리앤의 용기... 진하고도 고독한 이들의 사랑에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퀸턴 가의, 증조부모로부터 이어진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이 사랑은 불가항력에 의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랑을 ‘꼭두각시’가 아닌 ‘운명’이라 부르고 싶다. 상황을 넘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지켜내는 사랑은 마땅히 ‘운명’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책장을 덮을 때쯤, 나도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운명’이라는 선을 점점이 그려나가야겠다고, 그렇게 또다른 ‘운명’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