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우울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실패와 자책속에 무력감은 절정에 달했고, 저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골방에 숨어들었습니다. '우울'과 '무력감'과 '불안'은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이 되었죠.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혼란스러움이었습니다. 머릿속에 자욱한 안개가 낀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이 늘 상존했습니다. 스스로를 자각하고 일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실패가 주는 무력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처절한 무력감을 선사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짚이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수험실패도 있었고 인간관계의 문제도 있었죠. 그런데 오늘 반가운 독서 덕분에, 그 동안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요소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염증'입니다. 당시 저는 몸 여기저기에 다발적인 염증을 경험했습니다. 몸무게도 대폭 줄었고 컨디션도 엉망이었죠. 마음이 회복된 것은 몸이 회복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럴 수 있죠. 스트레스와 불규칙적 생활이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고, 진득한 노력 끝에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의 사이에서, '염증'을 주목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우울'의 주요 원인으로 '염증'을 꼽을 수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어린시절부터 저는 염증과 아주 친했습니다. 심각한 비염을 달고 살았습니다. 호흡기의 잔병치례도 빈번했죠. 그런데,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실천했던 지난한 노력의 과정끝에 돌이켜보니, 비염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쉬는시간마다 코를 풀러 가던 기억은 까마득해졌죠. 안개가 자욱했던 머릿속은 한결 맑아졌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몸과 마음은, 생각보다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13 오래전 내가 처음으로 정신의학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가장 개인적인 고통을 해결하려는 노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아에 일어난 병적인 혼란, 감정의 균형과 불균형, 정신과 기억의 상태, 세계에 대한 생각이나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27 과거 우울증 및 기타 정신질환을 둘러싸고 있던 먹먹할 정도의 압도적 침묵은 이제 많이 옅어졌고, 우리는 정신질환에 관해 좀 더 편하게 말하게 됐다. 그건 좋은 일이다.
책 <염증에 걸린 마음>은 모처럼 빠릿하고 짜릿하게 읽어내린 책입니다. 별 다섯개를 줄 수 있다면 열두개를 줄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개인적인 의미가 되었던 이유도 큽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 책은 참 훌륭합니다. 유익하고 재밌습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앞서 인용한 정신의학 및 우울증을 향한 섬세한 표현은, 학문과 환자를 향한 저자의 진정성을 의심치 않게 만듭니다. 인간의 가장 개인적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니, 이런 주치의라면 기꺼이 마음의 치유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인 '에드워드 불모어'는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이자 케임브리지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 면역정신의학자입니다. fMRI 연구의 선구자로 인간의 뇌 지도를 그리는 데 공헌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정신의학 연구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과학자 중 한명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이죠. 극도로 보수적인 학문관을 갖고 있더라도 어색하지 않을겁니다. 그런데, 그런 저자가 아주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울증 치료에 흔하게 사용되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향한 의문입니다. 절대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너머의 문제를 향한 근본적 질문입니다. SSRI의 처방이 우울증 환자에게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른다'입니다. 단지 세로토닌의 결핍을 해소해주는 것이 우울증을 완화해줄 것이라는 가설이 있었고, 그것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했기에 지금처럼 처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맞습니다. 세로토닌 결핍을 해소해주는 것은 우울증에 효과가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세로토닌 결핍이 우울증의 원인이다."라는 문장을 증명해 주는것은 아니죠. 멀쩡했던 세로토닌 시스템은 왜 갑자기 균형을 잃게된 것일까요? 그 너머의 원인을 추적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보다 근본적인 단계에서부터 건강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감기 환자에게 있어서 당장의 콧물을 막는것보다 몸 안의 감기 바이러스를 사멸시키는 것이 중요하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너머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미 짐작하셨겠지요? 바로 '염증'입니다.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자의 커리어가 지지하는 권위와, 책에 실려있는 충분하고 친절한 설명이 아니었더라면 저도 쉽사리 믿지 못했을겁니다. 무엇보다 '염증'은 몸의 문제고, '우울'은 마음의 문제니까요. 그러나 많은 실험이 이를 지지합니다. 동물 실험에서 염증성 세균을 주사했더니 쥐들은 마치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우울에 빠져 고립되고 무기력한 상태를 보였습니다. '세균'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사이토카인'만 주입해도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이토카인은 염증에 대한 면역반응으로 체내에서 분비되는 물질입니다. 변역반응과 염증을 일으키는 '신호' 같은 물질이죠. 즉, 염증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인 것입니다. 사람과 쥐는 다르지 않냐고요? 사람의 경우는 실험이 매우 어렵습니다. 쥐와 같이 위험한 세균을 주입할 수도 없고 사람의 뇌에 직접 사이토카인을 주입할수도 없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술'이 있습니다. fMRI입니다.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뇌의 특정부위의 활성화 정도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장티푸스 백신을 주사하자 그들의 면역계는 세균을 주입한 쥐의 면역계와 비슷하게 반응하였고, 혈중 사이토카인 수치도 치솟았다고 합니다. 접종자들은 약간 우울한 상태가 되었고 감정 표현을 담당하는 뇌 영역들이 상당히 활성화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역시, 면역반응에 기인한 염증에 의해 우울증에 빠질 수 있음을 지지하는 실험 결과입니다.
처음 이 내용을 읽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면역 반응은, 전적으로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한 신체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몸의 가장 부정적 반응으로 알려진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니요. 몸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다니요, 몸을 돌본다면서 마음을 무너뜨린다니요, 이런 엉터리같은 시스템이 우리 몸안에 상존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진화심리학의 빠트릴 수 없는 영웅을 등장시키며 이 난제를 풀어갑니다. 바로 '찰스다윈'이죠. '진화론'으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우리 몸 안에 존재하는 시스템은, 우리의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채택되고 살아남은 것이라는 '자연선택'이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의 관점에서, '염증'은 왜 '우울'을 유발하는 것일까요? 이는 고대 인류의 생활 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야생의 인류에게 '감염'이 발생했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외상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각한 전염병에 감염되었을수도 있죠. 이 때 상처를 입은 개인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휴식과 안정이 필요합니다. 신체의 모든 자원을 감염과 싸워 이기는데 투입해야만 그나마 생존의 가능성이 있을겁니다. 한편 감염된 환자가 사회적 접촉을 빈번하게 이어간다면 자신의 바이러스를 다른 부족원에게 퍼뜨릴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이를테면 이태원 클럽에 놀러가 밤새도록 춤을 추듯이 말입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동료들을 보호할 수 있죠. 신체적 활동을 줄이고 사회적 고립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과 '집단'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격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감염'만 생각하기에는 현대사회의 우울증이 너무 만연한 것은 아닐까요? 면역반응과 염증은 오로지 '감염'에 의해서만 활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네, 그거 맞습니다.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 반응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생존에서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순간에 유발됩니다.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날리 만무하죠. 야생인류에게 있어서 생존을 가르는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스트레스가 발생했다면,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을까요? 네, '외상'과 '감염'입니다. 즉,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일어나는 스트레스는, 곧 일어날 감염에 대비하라는 반박자 빠른 '사전통보'와 같은 소중한 '신호'입니다. 지혜로운 우리의 몸이 이를 놓칠리 없죠. 즉각 면역반응을 준비합니다. 염증이 나타나게 되죠. 정리하면, 면역반응과 염증은 높은 '스트레스'에 의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염증'을 유발하는 주요 경로는 '감염'과 '스트레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저자는 이를 '스트레스, 염증, 우울증의 악순환'으로 규정하며 주요 경로에 개입함으로써 우울증을 완화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미 책의 많은 내용을 인용하였기에 여기까지 다루지는 않겠지만 매우 직관적으로 효율적인 대응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울과 무력감에 빠진 당사자와 가족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하기에, 단정지어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우울증의 원인이, 100% 염증 때문이라는것은 아닙니다. 저자의 연구와 따르면 전체 우울증 환자의 1/3 가량이 '염증'에 기인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우울증 뿐 아니라 알츠하이머와 조현병에 대해서도 짧막하게 언급하며, 개인의 '생체지표'에 따라 개별적으로 최적화된 치료법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자신에게 걸맞는 치료방법을 모색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전문의의 진료와 처방에 따른 '약물처방'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처방되는 SSRI의 효능을 저자가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몸과 마음의 긴밀한 연결'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바탕으로, 마음을 돌보기 위한 강력한 경로인 몸을 돌봐주기 시작한다면, 더욱 빠르고 경쾌하게 치유의 길로 달려가실 수 있을겁니다.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한 자연스러운 치유의 여정을 걷고있는 여러분들께 작지만 분명한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불교는 왜 진실인가 / 로버트 라이트>
제목만 봐서는 스님이 쓴 책 같지만 <도덕적 동물>이라는 전작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의 저서입니다. 종교서적은 아닙니다. 불교의 핵심철학이 '과학적으로' 진실임을 주장하며, 불교의 지혜를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은 인간'이, 치열한 성찰끝에 정립한 지혜로운 '삶의 철학'입니다. 따라서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부감 없이 만나보실 수 있을겁니다. 마음의 작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트레스를 비롯한 마음의 문제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겁니다. 이 책 역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준 책입니다. 6월말-7월초에 리뷰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