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에 나타나는 명화의 대부분은 읽어야 합니다"(7).
클래식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백화점 폐점 시간을 알릴 때 나왔던 음악도, 뉴스의 시작을 알리는 오픈닝 음악도, 분뇨차에서 나오는 음악도 모두 클래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가치가 수 억, 수천 억 원으로 환산되는 명화도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자수나 퍼즐의 도안으로도 쓰이고, 사우나나 카페를 장식하기도 하고, 요즘은 우산이나 삼푸 용기의 도안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림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감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랫 동안 천재적인 작품으로 사랑받아온 '명화'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특별함'이 숨어있습니다. 제게 이런 명화의 '특별함'은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놀이처럼 즐겁고,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듯한 쾌감이 있습니다. "미술사에 나타나는 명화의 대부분은 읽어야 한다"(7)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명화를 읽어주는 책"들이 참 많습니다. 구도, 등장인물, 색채, 소품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읽어주기도 하고, 화가의 삶과 비극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미술재료와 사조를 설명하기도 하고, 명화와 관련된 스캔들을 폭로하기도 합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도 명화를 읽어주는 책입니다. 화학자의 눈은 명화를 어떻게 읽어낼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한 천재 다 빈치도 화학만은 정복하지 못한 것 같다"(57).
이럴수가! 화학자의 날카로운 눈이 천재 과학자이기도 한 다 빈치의 '의외'의 빈틈을 포착해냅니다. 위대한 화가이기도 하면서, "헬리콥터를 설계하고 해부학 도감을 그릴 만큼 뛰어난 과학자"(10)이기도 했던 다 빈치가 화학에는 상당히 무지했음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최후의 만찬>은 유화와 템페라 기법을 혼합하여 그린 것으로, 다 빈치는 이런 혼합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화학에 관한 그의 무지가 드러납니다. "템페라에 사용하는 달걀노른자는 수분을 거의 50% 이상 함유한 에멀션인데 유화는 기름이므로 수지 균형이 깨어져 상분리(물과 기름이 층으로 분리되듯이 두 상이 섞이지 않고 분리되는 현상)가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 빈치가 미술 재료에 관한 화학적 지식이 상당히 취약했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그는 납이나 구리를 함유한 색(흰색, 녹색 등)과 황을 함유한 색(버멀리온, 울트라마린 등)을 자주 함께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반응하면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한다. 또한 나무판에 석회를 발라서 평편하게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석회는 탄산화하여 울트라마린 등과 반응하면 탈색한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이미 그의 생전에 심한 박락(채색층이 균열되어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색채도 전체적으로 갈색이나 어두운 색으로 바뀌었다"(57).
"물체가 자체의 색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에 닿는 색채의 분할에 의해 나타나는 스펙트럼의 물리적 현상이라는 자각은 그림의 역사에서 격변을 일으켰다"(346).
이 책에 의하면, "역사상 미술사조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고 높이 평가받는 인상주의"는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뉴턴의 색채 이론은 표현의 한계를 탈피하고자 몸부림치던 화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346)기 때문입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스펙트럼의 과학을 예술에 끌어들였습니다. "인상주의는 빛을 그리는 미술이다. 물체 고유의 색을 부정하고 그 물체의 표면에 반사한 빛이 만드는 순간적 인상을 표현한다. 빛을 그려야 하는 화가의 도구는 물감이다. 자연에서 보는 빛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밝았고 물감으로는 그 빛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과학자들은 프리즘에 의한 스펙트럼 분광에 관한 연구를 통해 색을 섞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즉 분광분석법이다. 최종적으로 나타날 색을 분석하여 각각의 원색을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화면 위에 병치하면 우리 눈의 망막에서 혼합된 중간색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병치혼합기법이다"(258-259).
햇빛을 받아 찬란한 자연의 신비를 표현하기 위해 인상주의 화가들은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고 밝은 색 조각들을 병치하여 어두어지지 않는 혼색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모네는 짧게 끊어지는 터치를 병치하였고, 르누아르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터치의 색면을 병치하였으며, 고흐는 속선의 긴 선을 병치하였다. 쇠라나 시냐크 같은 신인상주의자들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색점들을 과학적인 비율로 병치하여 혼합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269).
이러한 색채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추상화의 발전에도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화가들은 형태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 색채만을 사용하여 형태와 입체적 공간성을 모두 표현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입체파, 야수파 등과 함께 들로네와 쿠프카에 의해 오르피즘이 탄생하였다. 이는 추상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346).
이 책을 보니 가구가 과학이 아니라, 미술이 과학입니다! 미술은 항상 과학에 앞서는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미술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과학의 발전은 미술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습니다. 미술과 과학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커플 같은 느낌입니다.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는 이브의 사과요, 둘째는 뉴턴의 사과요, 셋째는 세잔의 사과다"(338).
"프랑스 상징주의의 거장 드니의 말"이라고 합니다. 드니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스티브 잡스의 '애플'을 하나 더 첨가했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역사상 유명한 사과 중 하나가 예술가의 사과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브의 사과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며, 뉴턴의 사과로부터 근대과학이 시작되었고, 세잔의 사과로부터 현대미술이 꽃을 피웠다. 세 사과가 각각 자연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인간 감성으로의 전환을 이끈 것이다"(338).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명화보다 그 속에 담긴 '화학'이론이 더 궁금하다면, 다소 싱거울 수도 있겠습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화학에 관한 지식은 물론 명화에 관한 지식을 총 동원하여 명화를 읽어줍니다. 화학이론을 위해 명화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명화 자체가 주인공인 것입니다.
봄날이면 친구들과 함께 자주 동물원을 찾았고, 동물원 옆 미술관도 들러보곤 했습니다. 그 시절엔 고흐처럼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예술가의 삶과 작품이 우리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를 따라 미술관을 걷다 보니, 새삼 '르누아르'라는 화가가 '인상'적입니다. 60여 년 동안 약 6,000점의 그림을 남길 만큼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렸던 화가, 심각한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손이 변형되어 붓을 손에 묶고 계속 그림을 그렸던 화가,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유쾌한 그림을 그렸던 화가.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르누아르는 그림 자체를 매우 즐거워했으며 보는 관람자도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그림에는 메시지나 철학이 없다.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매우 통속적인 사람이며, 그의 그림도 통속적이다. 르누아르는 '인생은 끊임없는 유희'라고 했다. 낙천적인 르누아르는 늘 즐거운 장면만을 그렸다. 그는 불쾌한 것이 많은 세상에 또 불쾌한 것을 창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화가였다"(290). "그의 작품들은 매우 대중적이어서, 도서관에는 <독서하는 여인>, 목욕탕에는 <목욕하는 여인>, 무도장에는 <부지발의 무도회>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291)고 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천개 화가의 명작을 '통속적'이라고 표현하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통속적"인 관람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학자를 따라 미술관을 걷는 내내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책 속으로 떠나는 미술관 나들이,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