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사가 아닌 세계사 속의 화학
이 책, <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는 제목만 보면 ‘화학’이 주(主)고, ‘역사’가 종(從)일 듯하다. 하지만, ‘1장 우주 탄생’, ‘2장 선사 시대’, ‘3장 고대 문명’, ‘4장 지중해 세계의 형성’, ‘5장 로마제국 시대’, ‘6장 로마제국 멸망과 이슬람 세력의 발흥’, ‘7장 몽골제국과 이슬람제국 시대’, ‘8장 르네상스 시대’, ‘9장 신항로 개척시대’, ‘10장 과학혁명 시대’, ‘11장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시대’로 되어있는 구성에서 보듯이 짧게 언급된 1장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역사책의 서술순서를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읽다 보면, ‘화학사(History of Chemistry)’라기 보다는 세계사에 ‘화학’이라는 요소를 덧붙였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학문으로서의 화학을 사실상 창시하여 ‘현대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장인 11장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화학사를 다룰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화학이 어떻게 세계사에 영향을 끼쳤는가
현대의 생활은 화학물질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입는 옷, 화장품, 주방세제, 샴푸, 치약, 장난감 등 우리가 사용하고 소모하는 여러 제품들이 화학 반응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것들은 각 시대별로 발견된 수많은 화학 지식이 우리의 삶에 녹아 든 결과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함이 화학 지식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도
‘화학 지식’은 세계사를 바꾸는 원동력이었다. [p. 7]
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원동력의 하나로 저자는 고대 인류가 가진 ‘유리’와 유리에 관한 정교한 ‘화학 지식’을 꼽는다
유리는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물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가 없다면 건물 안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창문이나 유리 전구를 만들지 못해 어두운 곳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유리가 없다면 와인잔 같은 유리잔도 만들지 못해 음주 문화를 향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망원경이나 현미경 등의 도구도 발명되지 않아 지동설 같은 획기적인 과학이론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며, 연쇄상구균, 포도상구균 등의 병원균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카메라가 발명되지 않아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나 유진 스미스(W. Eugene Smith, 1918~1978) 같은 사진가의 작품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리가 발명된 것은 언제, 어디에서일까?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라고 한다. 그 시대 사람들은 처음에 보석의 모조품으로 일종의 구슬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무역을 통해 이집트까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pp. 74~75]
물론 유리만 세계사를 바꾼 원동력이 아니다. 이 책에 언급된 불의 발견에 따른 구운 고기 섭취가 뇌를 진화시켰다는 얘기, 재봉 바늘의 발명으로 호모사피엔스가 전 세계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 보관을 잘못한 보리에서 맥주가 등장했다는 얘기,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위한 연단술(練丹術)에서 화약이 발명된 얘기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사에 영향을 끼친 화학 지식에 관한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화학 얘기들을 엮은 이 책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들을 일종의 사전처럼, 그리고 시대순으로 묶어놓은 느낌이 든다. 덕분에 자신이 관심 있는 부분만 부담 없이 가볍게 한 번 읽어볼 수도 있다.
다만 학문으로서의 화학이 시작될 무렵에 이야기를 끊은 구성과 예전에 읽은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과 달리 역사의 흐름을 보다 강조한 구성이 ‘화학사’로서는 <세계사를 바꾼 화학이야기>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