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를 때 고려하는 여러 가지 중에 순위를 꼽자면,
일단 흥미로운 주제 (그때 그때 다르겠지)와
작가 (선호하는 이가 종종 있을 테고, 역서라면 번역가도 한몫한다.),
거기에 덧붙이면 출판사 (사람처럼 출판사도 은근 드러나는 성향?!이 있기에)와
책 디자인 (무려 폰트와 사이즈도 무시 못한다) 도 포함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된 책들 사이에서 끝까지 재.밌.게 읽히는 책들은 솔직히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선택지 중, 일단 주제와 특이하게도 역자 선택지다.
<크레이지 호르몬> -랜디 허터 엡스타인 (양병찬 역)-
책날개에 적힌 '성장 호르몬을 맞으면 정말 키가 커질까?', '폭식도 호르몬 때문이라고?'
이런 호객성 질문에, 여느 시시콜콜한 책들처럼 가벼운 답변을 기대했다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호르몬 연구 역사에 관한 최고의 책' 내지는 '광기와 창조성으로 뒤틀린 내분비학의 흥미로운 역사' 정도가 이 책에 대한 정직하고 적확한 표현이라 보인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바탕으로 저술한 '과학사(史)'가 이 책의 기본이므로, 자칫 정신줄을 놓다가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모드가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주로 전철 안에서 읽는 걸 좋아하는데, 고백컨대 읽다가 몇번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기도 했다...)
후루룩 국수넘기듯 쉽게 넘어가는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글맛이 공존하는 놀라운 과학책!' 이란 평가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글맛'에는 저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맛깔나게 잘 살려낸 역자의 기여도 역시 몹시 크단 것도.
분명한 것은, 읽고 난 후 채워진 '지식의 충족감'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
뿌듯함을 줄거라 본다. 어떤 의미에서든.
호르몬의 어원은 '흥분시키다', 자극하다'란 뜻의 그리스어'호르마오'에서 왔다 한다.
그런 뜻에서라면 원서의 제목은 꽤나 정직하다.
(사진 출처:http://randihutterepstein.com/aroused/)
일단 호르몬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상식!들이 얼마나 많은 지에 대한 놀라움은 새삼 차치하고라도,
새롭게 알게 된 지식들이 풍성하기 이를 데 없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이 호르몬의 역사를 써온 수많은 과학자들의 면면을 세세하면서도 가감없이 드러내는데, 그야말로 광기와 창조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긴, 그들의 그런 열정과 집착 아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누적,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과학이 빛을 발하는 것일테니.
잡다한 호르몬 관련 생화학적 지식들이 하나의 전문분야, 내분비'학'으로 등장하기까지의 역사는 의도치 않게 스탈링-베일리스의 동물 실험 논란과 맞물린다. 그 역사 중, 호르몬과는 무관하지만, 반갑게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로 유명한 그 파블로프도 살짝 언급된다. ('잘못받은 노벨상' 주인공이자, 뒤집힌 자신의 이론에 침묵한 과학자로서 말이다.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20세기 뇌신경계를 주름잡은 뇌외과의 하비 쿠싱의 이야기는 한층 더했다.
뇌종양표본 수집광에 수술과 글쓰기, 그림에도 능했다던 그는 특히나 뇌하수체 분야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시각을 갖고 과감한 실험들을 시도했는데, 그의 뛰어난 학문적 능력과 열정에 더해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시 내분비 질병으로 인해 변형된 외모를 천박한 웃음거리로 삼았던 언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바로잡고자 했던 모습이었다.
호르몬의 비밀이 한겹 한겹 벗겨지면서 인간의 행동, 정신, 그 모든 영역에서 호르몬이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로 인해 불거진 웃지 못할 잔혹사 역시, 과학이 걸어 온 역사의 한 그림이겠다.
가령 개개인의 호르몬 수치를 측정하여 정신의학적-사회적 데이터와 함께 분석하면, 범죄자를 판별해 낼수 있다 주장했던 것이랄지 (일종의 '예방의학' 근거라니!), 동성애 치료!(당시만 해도 질병목록에포함되었다)를 위해 시도된 호르몬 주입, 회춘을 위해 남성들 사이에 공공연히 시행되었던 정관수술 역시 사회분위기 덕을 톡톡히 본 호르몬 요법이었다 (힘이 세지고, 현명해지고 섹시해 질거란 입소문이 파다했다한다...)
정관수술을 마친 예이츠는 감격하며 "창의력과 성욕이 되살아나 죽는 날까지 지속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유명한 시인, 예이츠?)
모든 과학의 면면에서 볼수 있듯, 데이터 자체 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이슈에 더 휘둘리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저자의 아래 글에 매우 공감이 갔다.
데이터 자체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지 모르지만, 해석은 보는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자들이 증거에 기반해 이론을 수립하는 과정이 늘 명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건강과 질병에 대한 자신만의 관념'과 '당대의 통념'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지식이 진보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지식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일 수 도 있다. (p.115)
성결정을 이루는 과정에서 호르몬의 역할을 너무 쉽게 간과한 나머지, 간성인 (남녀한몸)에 대해 당연하게 시행된 생식기 수술 역시 잘못된 통념과 과학적 통찰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왜소증 판정을 받은 아들의 치료를 위해, 죽은 이의 뇌에서 추출하는 성장호르몬을 얻고자 뇌하수체 수집가가 된 발라반 부부의 사례에는 (뇌하수체가 가득 차 있는 유리병 사진을 볼 수 있다..) 여러가지로 복잡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후 오염된 호르몬 주입으로 인해 광우병의 일종인 크로이펠츠-야콥병이 발병한 예는 또하나의 성장호르몬 비극을 보여주었다.
광기어린 분위기에 휩쓸리는 호르몬 역사의 어두운 민낯도 있는 반면, 평생을 끊임없이 헌신적으로 연구에 매달려 온 이름 모를 수많은 영웅들 역시 그 역사 안에 든든히 존재한다. 최초로 인간의 호르몬 분리에 성공한 조지아나 시거의 예가 그러하고, 호르몬 10억분의 1그램까지도 측정 가능한 방법을 개발해 낸 후, 특허출원 없이 모든 이에게 그것을 공유한 로절린 얠로가 그렇다.
우리 몸의 호르몬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노화에 따른 호르몬 수치 저하를 막기 위해 에스트로겐을, 테스토스테론을 주입하고 먹고 처방받는다. 소위 사랑과 신뢰에 영향을 준다는 옥시토신을 연인간 성적 매력을 어필 하기 위해 흡입한다?
호르몬의 효과가 여전히 논란의 연속선상에 있더라도, 대형 제약사와 그것을 소비함으로서 젊음을 회복해보고자 하는 소비자들 사이에 큰 시장이 형성되는 한, 엇갈린 데이터 속에서도 꾸준히 그 행보는 이어져 갈 것 같다.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존 비만의 해결책을 칼로리 태우기에 집중했던 시선을 새롭게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겠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지루하거나 딱딱할 수 밖에 없는 과학+역사 책을 이렇게 다방면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능력과 재주지만, 그것을 매끄럽게 고스란히 전달해 내는 것은 역자의 능력이라 본다. 덕분에 머릿 속 한 가득, 알짜배기 지식들로 한껏 채워넣은 느낌이다.
역시나 결국 이 책에서도 실망하지 않았다!
약방의 감초마냥 이것도, 저것도, 다 호르몬 때문이야, 라고 쉽게 떠넘기던
잘못된 인식에서 좀 벗어나야지.
꼬리. 잠이 안와서 새벽까지 글을 쓰고 있다. 저녁도 든든히 채웠는데, 배가 아주아주아주 몹시 고프다.
...호르몬 탓인가? 훗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