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좋아하고, 우리 선인들의 문화를 좋아한다. 사실 걱정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요즘 그 어떤 것보다도 핫한 이슈인데도 사람들이 현재에 치여서 덜 신경쓰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사회적 문제는 바로 세계 1위의 저 출산이다.
2070년이 되면 우리나라 인구가 현재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는 나라중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너무 슬프게 다가온다.
지금 그 어떤 정치나 경제보다 나는 이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위정자들은 그렇지 않나보다.
이 땅이, 선조가 주신 아름다운 문화와 유구한 역사가 사라져 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역시 누군가 볼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 조선 미술관을 읽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우리 선조들은 당연히 후손들이 있을 것이고, 그 후손들을 위해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고 남겨주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도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와 이야기를 후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란다면 새로운 전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사람들이 많이 알게 해서 우리나라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또한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애국심을 다시 붙잡고, 한국인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답을 떠 올리게 해 주는 것도 좋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나라 역시 아름다운 문화와 사람들을 바탕으로 좋은 터전에서 살게 될 것 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요즘 나의 생각은 '한국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는데 그 생각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책이었다.
저자 탁현규님을 나는 벌써 6년전 과장 승격 교육에서 특강형태로 하루에 2시간씩 이틀동안 수업을 들었다. 아름다운 우리 그림에서 우리의 문화를 설명해 주시는 모습에서 너무나 감동 받았고, 저자의 책을 다 사서 읽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주석 선생님의 강연도 들은적이 있었는데, 그 때 느낀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신간으로 만날 수 있게 되서 너무 좋았다.
책은 문화 절정기 조선의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를 한 권에 담았다. 1관은 궁궐밖의 사사로운 날들이란 제목으로 우리 선인들의 풍속화를 통해 풍류를 알던 조선 양반과 가부장제 아래의 조선 여인들, 하루하루 충실한 삶을 살았던 서민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2관은 궁궐에서 열린 성대한 잔치로 조선왕중 기로소에 들어간 몇 안되는 임금 숙종과 영조의 기로소 축하연을 기록한 그림을 통해 조선왕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에는 걈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를 통해 한양과 개성의 경로 잔치를 보여주고 있다.
첫번쨰는 조영석의 현이도다. 선비 다섯이 나무 그날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현이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배불리 먹기만 하고 종일토록 마음 쓰는 바 없으면 곤란하다. 장기 바둑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이라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림 속에서 쪼그려 앉아 오른손으로 장기 알을 놓는 선비가 지금 "장이야!"를 외치며 승패를 결정지은 것 같다. 얼굴엔 기쁨이 흐르고 왼손으론 갓끈을 만지며 여유를 부린다. 뜻하지 않은 일격을 당한 상대는 왼손으로 자리를 짚고 오른손으로 장기 알을 만지작 거리며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한눈에 봐도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그렸으니, 풍속 인물화의 창시자다운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솜씨가 돋보인다. ---p.19
<현이도>는 이후 펼쳐지는 조선 양반 풍속과 평민 풍속화의 출발과도 같은 그림이다. 또한 감식안의 부탁으로 그려진 작품이기 때문에 수요자들 역시 한 시대 미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김홍도 작, <포의풍류>다. 종이창, 픍벽에 살며 몸을 마칠 떄까지 포의 신분으로 그 가운데서 읊조린다. 김홍도는 양반이, 선비가 되고 싶은 중인이었다. 물론 후에 지방관까지 역임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주류 밖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림에라도 그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겸재 정선의 <사문탈시>, 유명한 그림인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등 수많은 명작이 나온다.
저자는 말한다. 그 시대 선조들의 모습을 보는건 사진이 제일 좋다고. 주관적인 시선이 그나마 덜 개입된다. 하지만 사진은 구한말에나 들어왔다. 일단 그전까지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구한말 우리 선인들은 일제와 서구 열강들 틈에서 힘겨운 생존을 벌이고 있었다. 사진속 우리 선조들은 다 우울하고 슬퍼보인다.
그래서 절정기의 우리 선조들의 웃는 모습과 힘이 넘치는 시절의 그림을 봐야 더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1관의 1전시실 마지막 작품은 기생집에서 술을 기다리다_<홍루대주>의 신윤복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왼쪽 귀퉁이의 벌거벗은 아이를 데려오는 기생이다.
첩의 자식도 아닌 기녀의 자식을 두고 누가 아버지가 되는지를 가리는 것 같은 그림이다.
기방 드라마같은 이 그림은 기방문화에 정통하지 않으면 나오기 힘ㄷ은 연출이다. 문화절정기 한양 기방 풍속을 속속들이 만날 수 있는 것은 기방에 출입하며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준 신윤복 덕분이다.
제 2전시실은 신윤복의 아버지인 일재 신한평의 <자모육아>로 시작한다. 제 2전시실은 주로 여자들에 대한 그림이 많이 나오는데 유일하게 신윤복 부자만이 여자들의 그림을 아주 예리하고 정교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설정이 있던 소설과 드라마도 나왔으리라.
제 3전시실은 하루하루에 충실한 서민들의 모습을 겸재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등이 그려내고 있다. 역시나 멋진 그림이 많다.
2관은 궁궐에서 열린 성대한 잔치 기로소에 들어가는 부자 임금이었던 숙종과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는 그림이다.
기로소란 무엇인가? 한자로 기는 60살, 로는 70살을 의미한다. 그 중 정2품 이상의 문관이며 70세는 넘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기로소다.
그런데 숙종과 영조 이 두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나이가 예사롭지 않다. 이 두명의 왕은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우겨서 아버지는 60이 되기 한 해 전인 59세, 아들인 영조는 심지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간다.
종신이 1719년 1월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건의한다. 세자는 상소문을 읽자마자 부왕꼐 아뢰고 시행하게 한다.
당시까지 조선왕 중 60세를 넘긴 임금은 창업주인 태조가 유일했다. 2대왕 정종은 숙종대까지 왕으로 인정도 못받고 묘호도 없어서 공안왕으로 불렸고, 그마져도 40대가 되기전에 선위해서 왕위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기로소 행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일단 태조대왕이 기로소에 입소한 전례가 조선왕조실록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사방으로 물어물어 결국 김육이나 다른 신하가 기록해 놓은 근거에 의해 기로소행이 결정되고 시행에 옮긴다.
당시 숙종은 59세였으나 병색이 완연했고, 실제 60세가 된 해에는 병석에만 누워있었다. 결국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기로소에 그나마 정상적인 행태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삼종의 혈맥이라고 불린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진 적장자의 왕통을 계승한 숙종이 태조대왕과 동급으로 올려지는 권위의 상승을 꾀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태조대왕이 전례를 제대로 기록해 두지 않아 문제가 되자 숙종대왕의 기로소행을 기록한 것이 바로 기해기사첩이다. 어첩봉안도를 비롯해 임금이 경현당에서 기로신들을 위한 잔치를 베푸는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 화첩에는 기로소에 같이 들어간 동기 기로신들의 반신 초상이 남아있다. 영의정 김창집, 강세황의 아버지인 강현 등의 반신상이 있다.
영조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기사경회첩을 자세하게 또 알려준다. 영조는 사실 83세까지 살았기에 정식으로도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태조 이후 유일한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로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면서 기로소에 들어가 국가의 어른으로 빨리 존경받고 싶어 51세에 기로소 행을 강행했다. 이후 기로소에 들어가는 임금은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는 고종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간다.
숭정전에서 기로신들의 축하문서를 받고, 기로신들과 음악을 즐기면서 찬을 내려주고 잔치를 하는 모습을 담고 있고 화첩에 기로소 동기들의 반신상이 같이 전한다.
마지막은 조선이 낳은 최고의 임금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한양과 개성의 경로잔치를 그리고 있다.
말과 글이 넘쳐나고 이미지와 사운드가 넘치고 자고 일어나면 수백, 수천의 영상이 새로 생겨나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자유롭게 찍으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예전 필름카메라처럼 정말 절실한 순간을 차마 잡아내지 못한다. 그렇다. 조선은 이 그림 한 첩으로 당시의 일상을 절절히 그려냈다. 이 그림 아니면 후손에게 이 모습을 전하지 못한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백성의 다채로운 일상부터 왕실의 경사스로운 행사까지 그 시절 '진짜' 조선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