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을 이주 앞두고, 학교 도서관 나들이를 했다. 영화 '실비아'를 보고 관심을 갖게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대출했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빨간색 하드커버의 책 표지에는 'The journals of Sylvia Plath'가 타이핑체로 인쇄되어있었다. 일주일 동안 다른 책의 외도없이 너무나 섬세하게 한 인물, 한 장소, 한 물건을 묘사해놓은 그녀의 일기를 다락방에 숨어서 남의 글을 훔쳐읽듯 야금야금 읽었다.
위대한 천재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 실비아 휴즈. 그녀는 너무나 글로써 성공하고 싶어했고, 매일 매일 우울증에 시달렸다. 쓰는 일, 돈과 성공, 아버지를 어린 시절에 잃은 트라우마. 정신과 치료를 병행해야 할 정도로 심적으로 유약했고 냉철한 테드에 비해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시와 단편을 수없이 쓰고 고치고 읽고 사유하고 좌절하면서 쓰는 것의 고통을 누구보다 통감했던 그녀는 남편의 외도로 가스오븐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페미니스트의 전형으로 신화처럼 남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보다 책을 좋아했기에, 내면으로만 침잠해서 들어갔기에, 테드를 신처럼 의지했기에 세상과의 소통을 저버릴 수 밖에 없었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받아적고, 때로는 책을 접어가며 읽으면서도 조금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은 전혜린에게 천착했던 불과 2년전 새벽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날 것만 같아서였다.
이번 학기에도 국문학과 불문학을 같이 수강한다. 배수아의 '독학자'를 읽으며 학교 수업에 대한 회의를 더 강하게 품었던 지난 학기, 방학동안 나를 담금질하고 공부하는 목적을 찾아가면서 결론내린 것은 혼자 공부하는 막막함에서 벗어나 세상에 내밀 명함하나, 갖는 것-그것이다. 작가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노예처럼 회사에 '취직'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다. 안정적인 수입이 없을뿐더러 창작의 소재는 언제든 고갈되기 마련이다. 그녀가 고민했던 일들, 내가 한참을 행과 행 사이에서 방황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문장들. 이 책은 소유하지 말아야겠다. 심리학과 철학 학위를 따고 싶어했던 그녀처럼 나도 어쩌면 문학보다 적확한 학문에 목말라하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 자신과 이 문제를 탁 터놓고 상의하고 나니, 과거가 그렇게 흉측해 보이지도 않고, 미래가 그렇게 암울해 보이지도 않는다. 나의 메리 벤추라보다는 얼마나 많은 희망을 지니고 있는가. 철학적 태도, 술을 마시고 삶을 끝까지 밀어붙여 살아볼 것. 제발 나로 하여금 사고를 멈추고 맹목적으로 겁에 질려 순응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도록 하소서! 날마다 맛을 보고 영광을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고통을 겪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다. 아무 느낌도 없는 마비된 핵 속에 자신을 가두어두거나, 삶에 대해 회의를 품고 비판하는 태도를 버리고 수월한 탈출구를 찾아가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배우고 사유하고, 사유하고 살고, 살고 배우고. 항상 이렇게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사랑으로.」
경험을 경험으로서만 남겨두지 않고 언어로 가두는 작업. 늦은 저녁과 응답없는 기다림 속에서도 내가 의연해질 수 있는 것은 이 감정을 글로 쓸 수 있다는 환희가 있기 때문이다.
「밸이 말하기를 시각화라, 그리고 나중에 감정을 담아라. 작가 초년생들은 감각적 인상에 기대어 작업하느라, 차갑고 현실주의적인 조직을 망각한다. 먼저, 냉정하고 객관적인 플롯과 장면을 정하라. 경직되게. 그러고 나서 소파에 앉아 시각적으로 그리면서, 그 빌어먹을 글을 쓰라는 거다. 휙휙 휘저어 하얀 백열로 달구고, 다시금 생명을, 예술의 생명력을 부여하고, 더는 참조할 틀도 없는 무형의 신세를 벗어난 형식을 성취하라.」
그렇다. 매순간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될 수 없다. 시각화하고 기록하고 실사처럼 표현하라. 그것이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나의 어마어마한 독서목록을 차근차근히 지워나가고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이 책은 내게 소설과 시 창작의 소재와 방법, 그리고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소울메이트를 한 명 더 선물해준 고마운 책이다.
「내 두뇌에서 경쟁의 유령을, 자의식의 에고 센터를 싹 잘라내버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릇이, 타자를, 바깥 세상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관심은 독창적인 정체성의 개성에 순수하게 매료되는 게 아니라 나와 비교하는 관점에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상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이곳에서 나는 외형과 출판, 수표, 성공으로 점철된 바깥 세상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내면의 심장에 충실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음, 나르시시즘, 그리고 경쟁에서 상처받을까 봐, 결핍을 남한테 들킬까 봐 둘러친 보호막과 싸워야만 한다.
글쓰기 자체를 위해 글을 쓰고, 그 일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는 것. 그 얼마나 훌륭한 신들의 은총인가.」
방 안에서 치열하게 읽고 쓰다 나간 후라도 컬렉션 수준으로 집착하는 플랫폼 스니커즈 앞에 약해지는 것이 나이다. 신화와 민담, 세상의 모든 시를 읖조를테야, 이번 학기엔. 내 언어안에 기호학이 정신분석학이 철학이 다시 울부짖도록 다양한 독서목록을 만들어야지. 실비아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듯이 일본어 회화와 프랑스어 기본 발음을 수강하고 매일마다 영어소설을 읽어야지. 실제 사건들을 적을 공책을 하나 더 만들고 더 많은 작가들을 만나며 The journals of egoism을 멋지게 타이핑해나가야겠다.
아~~ 이 책을 생각하려니 다시 머리가 복잡해져온다.
아무래도 일기 형식의 글들은 쓴 사람의 속내-심지어는 허구가 아닌 진짜 인물-를 너무 깊이 알게되는 데서 오는,
왠지 모를 불편함과, 연민과, 안타까움과, 공감에 반응하다보니
내가 마치 실비아의 삶을 잠시라도 살았던 듯,
마음이 복잡해져오는 거다.
실비아는 나랑 너무 비슷하다.
그래서 일기를 읽는 동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내 이중성, 자기기만, 게으름에 대한 변명, 욕망, 우울, 두려움과 너무 닮아 있어,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서 날 닮은 부분을 보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래서일까, 나도 실비아가 미웠다.
(그러면서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뭔가가 있다.)
실비아 플라스는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었다.
어린 시절에 성공을 경험하고, 그 이후에 그 영광을 되찾지 못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방황한 시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재능에,..남부러울 것 없어보이던 그녀는
처녀 시절에도 몇 번 자살기도를 하고
평생의 짝이라 믿었던 (천재시인이라고들 하는) 테드휴즈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고 나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별거에 들어가고,
런던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스오븐에 머리를 쳐박고 자살한다.
그게 겉으로 보이는 실비아 플라스의 짧은 인생이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그녀의 일기(실제로 많이 생략되서 그 정도)를 읽다보면,
단명한 천재들이 늘 그러하듯이
실비아도 자신의 표면을 가능한 한 넓혀서(깊은 감수성으로)
남들이 60년 넘게 경험하고 고뇌하는 걸
짧은 시간에 소화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버지니아 울프..와의 오버랩 현상은 나만 느끼는 걸까?)
그녀는 다름아닌 자기 자신 때문에 힘들어했고
스스로를 극복하기엔 자아가 너무나 강하고 컸다.
슬픈 건, 그녀가 그걸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두려움 중에는 내가 공감하는 게 너무나 많다.
아직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시점에서 결혼을 하고(그까진 좋다)
아이를 낳고 싶어하면서도 임신에 대한 두려움.
남편의 그늘에서 남편이 가져다주는 바깥 소식만을 접하면서 살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재능에 대한, 노력에 대한 목마름과 염증의 반복..
그리고 우울증과 자살.
남편 테드휴즈는 실비아가 죽고 나서 이 일기를 출판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망각이 필수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부분을 생략해버렸다.
그게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의 말이 맞긴 하다.
읽는 동안, 정말 많은 것을 생각했고
게을렀던 나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재능과 노력에 대하여, 삶과 사랑에 대하여, 욕망과 인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