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종말, 그 와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 을 해결하는 여성 듀오. 책의 소개를 읽고는 읽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역대 최연소, 초신성의 등장,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이라는 수식어 보다 줄거리에 압도 당했다. 피곤한 밤이었고 이대로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좋겠다 싶은 그런 밤이었으니까. 아라키 아카네의 『세상 끝의 살인』을 주문했다. 놀랍게도 책은 다음날 도착했고 지구는 그런대로 굴러갔고 책을 읽으리라는 마음만 책상에 던져 놓은 채 일을 다녔다.
본격적으로 『세상 끝의 살인』을 읽기 시작한 건 주말 아침이었다. 곧바로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다. 두 달 뒤 지구는 망한다. 소행성은 일본 대륙을 겨냥해 떨어진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일본을 탈출해 유럽이나 남미로 떠나는 무리가 있고 사는 곳에 남는 무리가 있다. 주인공 하루는 남는 쪽을 선택한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떠났고 며칠 전 아버지는 목을 매 자살을 했다. 남동생은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곳에서 하루는 운전면허 학원에 간다. 운전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학원에는 이시가와라는 강사가 홀로 있었다. 그때부터 하루와 이시가와는 운전 연수를 한다. 텅 빈 거리와 산속을 달린다. 산속에서 오지를 찾아 자살을 한 자살자들의 시체와 마주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온 하루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은 동생을 위해 컵라면을 놓아두고 아버지의 시체를 치운다. 날이 밝자 운전학원에 간다. 연수를 위해 차를 고르고 곧 그 안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는다. 하루와 이시가와는 차 트렁크에서 참혹하게 죽은 여자를 발견한다.
그야말로 의문이다. 이 망해가는 세상에서 도대체 왜 살인을 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두 달 후에는 모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텐데. 설령 살인을 했더라도 수고스럽게 시체를 왜 차 트렁크에 숨겼을까. 이시가와는 죽은 여자가 남긴 흔적을 찾아내고 수사에 착수한다. 운전 강사에서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으로 이사가와의 모습이 바뀐다. 『세상 끝의 살인』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을 보여준다. 평범하지 않은 인물을 만들어 내는 솜씨 또한 훌륭하다.
지구 멸망의 소재는 흔하디흔해서 이제는 그래 어떻게 망해가는 이야기를 보여줄 건데 팔짱 끼고 건방진 자세를 취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소행성 충돌 설정은 더 그렇다. 그런데도 이제 첫 소설을 발표한 신인 아라키 아카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에 그렇지 않은 사건을 가져와 속도감 있는 전개를 펼친다. 방심하고 읽었다가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 뒤통수를 맞게 된다. 종말의 순간을 사실적으로 그려 진짜 지구 멸망이 다가올 때 『세상 끝의 살인』을 교본으로 삼아 버틸 수 있을 것도 같다.
하루와 이시가와는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린다. 두 달 후에 모두 죽을 것이라 경찰서는 폐쇄 직전의 상태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경찰관이 있었다. 민간인 신분이지만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정의감과 슬픔으로 사건을 직접 해결하기로 한다. 인류 멸망 직전에 살인범을 잡는 게 무슨 소용인가. 따위의 의문은 접어둔 채.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말하지 않아도 곧 지구는 어떻게 되리라 예감이 들지만 배울 건 배우고 납부할 건 납부하는 성실 시민의 자세로 살아도 나쁘지 않으리라. 『세상 끝의 살인』은 이상한 감동의 결말을 남겨준다.
길게는 1년 짧게는 한 달이나 일주일 뒤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일단 나는 어디로든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 피난을 간다든지, 다른 나라로 간다든지 하는 건 없을 듯. 그럴 여유도 없고 그렇게 살아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멸망하기 전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것들. 그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을 위해 내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것 같긴 하다. 가능하다면 내가 살았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싶은데 그건 쉽지 않을 듯. 진짜 그런 날이 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의 ‘내’가 될까?
두 달 뒤 지구는 소행성과 충돌한다고 한다. 이제 멸망을 앞둔 세계는 소행성과 격돌하는 지점에서 멀어지기 위해 떠난 사람들, 희망은 없다며 비관하여 자살한 사람들, 떠난 자리에서 약탈하는 사람들. 다양한 모습으로 전쟁 같다. 이런 혼란 중에 운전면허를 따겠다며 후쿠오카의 운전교습소를 찾은 23살의 하루. 이런 하루에게 운전을 가르치러 출근한 강사. 두 사람은 운전 연습을 위해 교습소 차 중 하나에 탑승하려 했고, 차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성의 시체를 발견한다. 조만간 다 죽을 텐데 굳이 왜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했을까? 의구심을 품은 하루와 운전면허 강사.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사정을 숨긴 채 이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어차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될까?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지하로 파고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그저 또 그렇게 하루를 어떻게든 보내게 될까?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고 먹을 것도 없어 편의점이나 슈퍼 혹은 마트를 털어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 결국에는 죽을 텐데도 우리의 신체는 너무도 당연하게 배가 고프고 배설을 하고 또 그렇게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전기도 가스도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는 세상. 솔직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 생활의 편리함. 전기, 가스 그리고 휴대폰이나 인터넷. 그것들 없이 과연 이들은 제대로 된 수사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남은 사람의 광기. 모두가 광기를 부리지는 않겠지만 사람은 아무도 모르지. 내가 나를 진짜 알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없듯이.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한다. 죽기 전까지는 인간이 인간답기를, 그렇게 마지막까지 내가 나이기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다 가기를. 그런 바람도 쉽지 않음을 안다. 처음엔 신박한 소재라고 생각했는데 살짝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늘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진짜 반성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맞는지,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그렇다고 그들이 한 잘못이 희석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 아니 그 순간을 기다리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
세상 끝나기 3시간 전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실 세상이 끝난다라는 말은 오래 전에도 유행을 했었던 그런 이야기였다. 성경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자기 임의대로 해석해서 종말이 온다고 즉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을 하고 생업을 때려치고 모여서 기도를 드리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소설 속에서는 그보다 조금은 더 과학적인 이유를 댄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것. 그것도 일본에 가장 먼저 부딪친다는 것.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일본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려고 이동을 하고 움직이기 힘든 사람이나 노인들이나 이런 저런 이유로 피난을 가지 못한 사람들이 남았다. 이런 배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희한하게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하루는 이런 설정 속에서 운전학원을 찾아서 강습을 받는다. 두 달 뒤면 모든 것이 없어지는데 그냥 무면허로 운전해도 아무도 잡을 사람조차 없는데 아니 차조차도 도로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말이다. 하루는 그렇다치고 그녀를 강습해주는 이사가와도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 둘의 조합이 과연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동생과 단 둘이 남아버린 하루. 이제와서 면허를 따겠다는 것은 물론 아닐테고 운전하는 법을 익히겠다는 것일테다. 분명. 그렇게 연습을 해서 하루는 어디에 가고 싶은 것일까. 그녀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는 강사는 왜 어디론가 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것일까. 하루가 운전을 배우겠다고 왔을 때 바보 같은 소리라고 치부하지 않고 왜 그녀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게 된 것일까. 강습생과 강사 그들이 시체를 발견하면서부터 사건은 발생을 한다.
만약 하루가 그 차량을 고르지 않았다면 묻혀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건이었다. 우연찮게 발견된 시체로 인해서 하루와 이사가와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아니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뒤면 모두 죽는데 타살임에 분명하지만 그 범인을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전직 경찰이었던 이사가와는 기어이 사건화 시키고 자신이 앞장을 서서 그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 사건이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된다.
종말론적인 배경이 조건화 되어 있어서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있는 이상 생활은 해야 하는 것이고 인생은 계속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둘이었던 그들의 공동체가 넷으로 늘어나고 다섯으로 늘어난다. 그렇다. 인간은 마지막까지도 사회적 동물임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건을 찾아서 떠나는 그들. 세상 끝의 살인은 어떤 답을 안겨다 줄 것인가.
잘 읽히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가 왜 에도가와 란포상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받았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준다. 역대 최연소라고 할만큼 젊은 이십대의 작가가 쓴 이야기는 앞으로도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