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큐멘터리가 희귀병에 걸린 환자들 이야기였어요.
차라리 암이면 좋겠다고. 치료법도 있고 약도 있고. 이런 희귀질환은
근야 평생을 달고 살아가야한다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듯 합니다.
너무나 어린 시절 병이 찾아왔고 그 병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쓰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억울함. 인간이기에 안생길수 없겠지요.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당신이 삶에 너무 지치지 않도록.
힘내시길 가족분들도 힘내시길. 지치지마시길.
<책 소개>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
_136p.
올해 19살 고등학생 된 저자는 3년 전, 전신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희귀 난치병, '타카야수동맥염(Takayasu's arteritis)'을 진단받았다. 병 자체가 희귀하고 연구된 바가 거의 없어, 발병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00만 명 중 2명꼴로 발병하는 타카야수동맥염은 그중에서도 대부분 '동양인', '여성', '20세 이하'의 진단 조건을 지닌다.
이러한 수치와 진단 조건이 보여주듯, 저자는 '소수자'의 삶을 살고 있다. 배제되는 것에 익숙해질 만큼 생활 속에서 수없이 배제되는 삶. 염증 수치를 낮추기 위해 복용하는 스테로이드제로 인해 얼굴이 붓고 수면장애에 시달린다. 스테로이드제 부작용으로 안압이 높아져, 시신경이 죽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토요일마다 먹는 독한 약 때문에 하루를 꼬박 침대에서 보내야 하는 것도. 몸은 언제 힘들어질지, 언제 괜찮아질지 예측할 수 없다. 주변인들에게 병을 알리고 배려 받아야 한다. 병원에 갈 때면 학교 수업을 듣지 못해 부족한 학습량은 스스로 채워야 하지만, 이마저도 떨어진 체력 때문에 쉽지 않다. '더불어 사는 삶'이 중시되는 대안학교에도 계단밖에 없는 통로가 있는 등 일상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하곤 한다.
병이 낫기를 기약도 없이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호의를 가지고 나를 ‘배려’해주기만을 바라야 하는 걸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배우지 않았다. 쉽게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하도록 배운 적이 없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인격체로서, 공동체로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 나의 다리에 모래주머니가 달려 있다면, 모래주머니를 달고도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겠다는 말이다.
_85p.
저자는 병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동안 유지되던 정체성이 후 순위로 밀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학생으로서의 자아보다 환자로서의 자아가 우선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시선과 편견에 맞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어쩔 수 없지'라는 말에 단념하기보다는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몸이 아프기 전에는 지향했던 목표가 있었다면, 지금은 추구하는 가치를 현실과 잇는 과정 속에 있으니까.
아울러 어떤 어려움에도 '배움의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잘 배웠는지, 배움의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충실함을 평가하기 위한 보고서다. 병을 극복하기보다는, 병과 함께 하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상황에 주저하고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태도를 지니는 것. 이것은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저자의 인생을 살아갈 이유가 될 것이다.
<좋았던 점>
그래, 맞아. 내 몸에 이상이 있지. 어쩌면 심각한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반드시 우울함에 잠겨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구나! 병은, 아픔은 내 즐거움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난 아파서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 하며 절망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반드시 절망에 짓눌려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_54p.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은 '어떻게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나도 주변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였다. 물론 주어진 상황과 처한 현실이 부정적이어도 모든 것이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의 상황이 이러니, 무조건 이런 결말일 거야'하는 섣부른 판단에서 떠올린 생각은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이 살아갈 마을이 되어준 사람들로 배운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삶의 배움이자 깨달음이었다. 19살, 결핍으로 가득 찬 시절로 돌아가,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위로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걱정과 두려움은 실체가 없다' 머리로는 수없이 되뇌지만 결코 품을 수 없었던 마음을 달랬다.
결국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똑바로 마주 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나아가겠다고 생각한다. 이건 사실 내가 믿는 나의 면모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나아갈 거라고 믿어, 그래서 지금의 주저앉음이 영원하지 않다고 믿어. 그런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계속 주입하는 거다.
155p.
책 3장, '마음이 꽉 차면 바다로 간다'에 수록된 <우울 노트>에는 '왜 내가 쓰는 글은 전부 다 끝이 희망차게 끝나지?'라는 저자의 질문이 담겨있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혼자 간직하고 있던 고민을 들킨 것 같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자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희극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라 그렇다고 말하지만, 회복 탄력성이 높다고 해서 느끼는 감정이 미약한 것은 아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그렇다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울어야 했는지, 캄캄한 어둠 속에 자신을 몇 번이고 던져야 했는지, 걱정과 두려움 앞에 '괜찮다' 수없이 주문을 걸고, 또 앞으로의 나날들에 어떤 용기와 희망을 채울지. 그것은 그 시간을 오롯이 견뎌낸 저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누구도 삶의 가치와 무게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다만, 그래서 더없이 잘 살아냈음에 박수 쳐주고 싶다.
<총평>
절망할 수도 있었다. 병으로 인한 변화뿐만 아니라 병 그 자체를 안타까워하며 슬퍼할 수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남 탓을 할 수도 있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칠 수도 있었다. 내가 포기하고 잃는 것들이 아닌 것보다 많다고 믿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울고, 속상해하고, 우울해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내가 배울 수 있는 것들과 생각할 수 있는 것들, 말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다고. 내 탓이 아닌 것과 남의 탓이 아닌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겠다고 노력했다.
_209p.
저자는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닮았다. 앨리스가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의 나는 '행복'으로 할래"라고 말한 것처럼 저자 또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간다. 견딜 수 있는 만큼만 견디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며,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는 일,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에는 상처받지 말자고. 사과할 일에만 사과하며, 누군가의 배려에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로.
사실 나는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에세이에 기대어 다시 살아갈 숨을 틔우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손에 꼽힌다. '힘내', '다 괜찮아질 거야' 하는 통상적인 문장들이 어깨에 무거운 짐처럼 쌓였고, 살아보지 않은 내 인생을 다 아는 척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런 미운 마음이 드는 나를 책망했다.
그래서일까, 담담하게 전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저마다의 아픔을 이겨낼 방법을 제시하거나 애써 좋은 말로 위안하며, 무작정 긍정을 그리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당당함은 탐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저자가 무언가 배우고 깨닫으며, 한 뼘 더 성장해 나갈 때마다 나도 같이 자라는 기분이었다.
아픔과 관련한 이야기는 신기한 힘이 있다. 같은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와의 관계가 절대로 이전과 같지 않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저 사람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결이 달라진다. (p.45)
'내가 나인 것을 잊지 않고 사는 일'.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았을 이 프롤로그를 펼쳐두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으나, 아프고 난 뒤에 진짜 '나'를 볼 수 있음을 경험한 나이기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책은 아닐까 넘기기 겁이 났다.
사실 군데군데 좀 울었다. 그녀가 담담히 이야기하는 아픔을 알 것 같아서, 또 모를 것 같기도 해서. 너무 어린 나이에 하루를, 사람을, 마음을 또 주변을 정리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서 속이 상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기특하다는 마음이 더 많이 들었다. 아프고 나면 자란다는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삶을 깊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어쩌면 누구보다 알찬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울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우는 것과 속상해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나. 만약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쓸데없이 흘려온 눈물들이 참 아쉽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 (p.136)
그녀의 이 마음에 온 마음을 담아 손뼉을 치고 싶었다. 물론 병에 걸린 사람의 일상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삶과 결이 다르다. 고려해야 할 것도, 확인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일상까지 빼앗길 수 없음을 잊고 살았다. 내가 많이 아팠을 때 그저 잘 걸어 다니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을, 상태가 호전된 지금 잊었던 거다. 그녀의 문장들을 읽으며 나의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깨닫는다. 나의 하루가 얼마나 빛나고 귀한지 또 깨닫는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매일같이 잊어도 매일 일깨우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너 힘 좀 빼고 살아, 그렇게 호전적으로 살지 않아도 돼, 매일 하루를 대할 때 투지를 다지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p.69)
내가 휴직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래,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잖아. 쉬어도 돼”라고 한 사람이 반. “복직할 거지? 아깝잖아.”라고 말한 사람이 반이었다. 지금? 나의 복직이 아까웠던 이들은 '남'이 되어있다. 쉬어도 된다던 이들은 여전히 지금 나의 모습이 보기 좋다며 나의 곁에 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아까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나의 복직을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힘 좀 빼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매일매일 전투하듯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저 오늘의 나로 살아가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오늘 하루, 가득히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려 한다. 나 힘 좀 빼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