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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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역사

침묵과 고립에 맞서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

리뷰 총점 9.3 (2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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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인문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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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장애의 역사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j*******6 | 2023.06.18 리뷰제목
이 책은 미국 장애사를 다루고 있는데, 미국이 생기기 전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장애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고 이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살았는지, 시기적으로 강한 부족원이 필요하기 시작했을 때 장애가 있는 몸을 어떻게 소외시키기 시작했는지,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자신들 안의, 원주민들 안의 장애인을 어떻게 갈라치기를 했는지, 선별한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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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 장애사를 다루고 있는데, 미국이 생기기 전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장애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고 이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살았는지, 시기적으로 강한 부족원이 필요하기 시작했을 때 장애가 있는 몸을 어떻게 소외시키기 시작했는지,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자신들 안의, 원주민들 안의 장애인을 어떻게 갈라치기를 했는지, 선별한 흑인 노예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면서 어떻게 이들을 학살했는지, 영국 식민을 벗어나려 했지만 함께 살고 있는 흑인, 흑인 장애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차별하고 억압했는지, 남북전쟁 시기 발생한 수많은 신체장애를 갖게 된 남성 퇴역군인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산업화가 어떻게 장애를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냈는지, 이민자들 중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골라내었는지까지 정말로 말 그대로 장애의 역사가 기록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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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구매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b*****3 | 2021.01.02 리뷰제목
존경하는 학자   나는 강자의 축에도 들지 못하면서 늘 강자의 논리로 살아왔다.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폄훼하고 차별한 일은 없지만 나도 모르는 가운데 일상 속에서 많은 이들을 차별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고, 깨닫지 못했으니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승섭 교수를 알게 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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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학자

 

나는 강자의 축에도 들지 못하면서 늘 강자의 논리로 살아왔다.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폄훼하고 차별한 일은 없지만 나도 모르는 가운데 일상 속에서 많은 이들을 차별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고, 깨닫지 못했으니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승섭 교수를 알게 되었다. 그가 발표하는 글과 그의 책을 읽으면서 사회에 수많은 차별이 만연하고 있는데도 대부분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고 있으며,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통해 그들에게 향했던 혐오에 가까운 내 감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고, 판매직 노동자가 겪는 어려움을 들으면서 인권이 생존권인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인으로서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그런 이들을 만나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지만, 그의 글을 찾아 읽으며 그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차별금지법이 발의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긴다는 교회에서 누구보다 먼저 반대하고 나선 것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 부끄럽다 못해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여파가 우리교회라고 비켜갈 것이 아니어서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그날부터 차별금지법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적인 관점에서, 의학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성서적인 관점에서 두 달에 걸쳐 열두 편의 글을 썼다. 그 출발은 김승섭 교수가 발표한 글이었고, 오랜 시간 그가 보여준 소수자 보호를 향한 집념이 내게 큰 격려가 되었다.

 

이 책의 번역자인 김승섭 교수는 2019년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만난 이 책에서 그동안 가져왔던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았다고 했다. 그의 학문적 집요함은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났다. 책의 의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저자를 만나 문장 뒤에 숨어 있는 문화적 맥락을 확인하고, 장애학과 영문학 연구자들을 만나 번역의 완성도를 높였다. 거기서 더 나아가 무의식적이라도 장애인에 대한 비하나 혐오의 의미가 들어가지 않도록 적절한 번역어를 찾기 위해 씨름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장애인에 대한 비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에 비춰 볼 때 그가 이런 용어를 가려내기 위해 씨름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관점이나 시각과 같은 말을 비하의 뜻 없이 사용하지만 그것이 장애를 가진 당사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그를 대체할 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때로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좌절하는 그의 모습은 감동을 넘어 존경받아야 할 모습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글 쓸 때마다 단어 고르는데 신중을 기하고 있다. 장애인 비하로 들릴 수 있는 표현은 당연히 사용하지 않고, 혹시라도 그들에 비해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표현은 없는지 몇 번씩 살피곤 한다. 최근에는 연민이라는 말을 대체할 수 있는 게 뭐 없을까 생각하고 있다. ‘연민이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시혜의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분간 공감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만족스럽지는 않다.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도 마음에 걸린다. 그건 스스로 강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해서이다.

 

내게 일어난 이 모든 변화는 김승섭 교수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지만, 정말 기적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는 훌륭한 학자이기보다는 성실한 학자이기를 꿈꾼다. 그러나 강퍅하기 이를 데 없는 내 생각을 기적처럼 바꿔놓은 그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훌륭한 학자이다. 자식 또래의 젊은이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존경한다.

 

의도하지 않은 차별

 

나는 저자인 킴 닐슨이 장애를 다루는 의학자일 것으로 생각했다. 뜻밖에도 그는 역사학자로서 장애와 여성의 관점에서 미국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고, 특히 헬렌 켈러와 그의 스승인 앤 설리번의 정치적 활동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로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열여섯이던 저자의 딸이 갑작스럽게 심각한 병에 걸렸고 결국 장애 여성이 되었다. 그로 인해 집필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저자는 그 경험 때문에 질문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더 나은 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당초 집필을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책이 된 것은 딸의 장애로 인해 자기 가정이 달라졌고, 자신이 그 일을 겪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장애를 연구하는 학자였으면서도 장애인 가족이 생기기 전까지 장애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학자도 장애인 가족이 생긴 것만으로도 생각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면, 하물며 일반인이 장애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장애인 본인이 느끼는 것 사이에는 얼마만한 간극이 있을까 

 

저자는 상당수의 차별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비장애중심주의적 태도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 때문에 장애인을 향한 혐오가 일어나고 그것이 차별과 무지와 편견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눈에 드러난 차별, 스탠딩 콘서트를 계획하면서 모두가 두 시간동안 서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무지, 그리고 미디어에 장애인이 나오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불쌍하고 슬픈 모습으로 그리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그들을 아예 사회로부터 배제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은 인종주의성차별주의동성애 혐오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구조 속에 축적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그렇게 축적된 편견이 장애인의 가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물론 장애인들은 고등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낮고 가난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그러나 저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백인보다 유색인종이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은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일이 아니며, 이는 역사법 집행세금 구조이념그 밖의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 사회구조가 원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모든 이들에게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 평등이고 그 이후의 결과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한 평등은 모든 이들이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이 같은 출발점에 설 수 없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닌 역사법 집행세금 구조이념과 같은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 사회구조의 문제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작은 실천이라도 할 생각으로 페이스북의 프로필 사진을 이렇게 바꿨다.

 

 

장애의 역사에 대한 저자의 서술

 

민주주의의 선진국이고 어느 나라보다 인권이 존중받는 나라인 미국도 처음부터 장애를 이해하고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식민지로 있었던 때로부터 독립하고 나서 2차 대전이 끝나도록 노예와 여성은 존재 자체로 장애인으로 취급되었으며, 노예와 여성과 장애인이 부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사회 구성원으로 동등하게 대우 받기까지 지난한 투쟁이 필요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콜럼버스가 북미대륙에 발을 내딛은 1492년 이전까지는 토착민에게 장애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냥과 채집이 생업의 주요수단이었던 당시로서는 신체적인 강건함이 필수적이었을 텐데, (따라서 지금 우리 사고방식으로는 그를 감당할 수 없는 신체적 장애는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이 당연했을 것 같은데) 그들에게는 오늘날 장애에 해당하는 단어나 심지어는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장애에 가까운 개념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신체적 상태가 아닌 사회적 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신체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그로 인한 인지적신체적감정적 역량과 관계없이 구성원으로 공동체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한 그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다만 공동체에서 축출되거나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그렇게 취급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매사에 그런 기준이 통용되지는 않았다. 농인이나 맹인처럼 움직이는데 제한이 있는 사람들은 추장이 될 수 없었는데, 이것은 낙인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가 요구하는 책무 때문이었다. 추장으로 일하는 동안 장애를 입게 되면 지도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부추장들이 그를 보좌해서 임무를 끝내게 했다.

 

전기 식민지시대에 유럽계 정착민들은 생산성을 기준으로 장애를 정의했고, 따라서 노동이 가능하다면 신체적 결함은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노예제가 만연했던 후기 식민지시대에는 북미대륙으로 온 아프리카인은 그 자체로 장애인 취급을 받았다. 인종차별이라는 부끄러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노예주인과 노예제 옹호자는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열등하게 태어났고 그들의 몸이 비정상적이고 혐오스럽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노예주인은 자신이 부리는 노예가 몸과 정신에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노예제가 돌봄이 필요한 노예에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1848년 세니커플스 여성권리회의에서 여성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시민으로서 적합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동등한 시민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우월한 인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동등한 시민권을 요구한 것이었을 뿐,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시민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출신인 노예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권리의 진정한 기반은 개인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노예 출신조차 같은 노예 안에서 차별을 주장한 것이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은 북미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이 공동체와 시민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지적신체적 능력, 심지어는 인간성도 백인과 동등하지 않다는 이념을 전제하고 있었다. 노예주인, 의학자, 신학자,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 특히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인물이자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유럽과 미국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노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정신적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장애의 개념은 노예제와 인종주의를 정당화시켰고, 심지어 많은 백인으로 하여금 노예제가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아프리카인에게 이득이 된다며 스스로를 기만하게 만들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나서 장애에 대한 이해가 크게 변화했는데, 광기(狂氣)를 신학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던 데서 점차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1825년 이전에 광기를 신의 손길이 닿아 초래된 끔찍한 불행이라고 판단했던 대법원은 그 이후 질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퇴역군인이 집으로 돌아오고 도시가 확장되고 산업재해가 증가하면서 미국의 도시들은 Ugly Law라고 불리는 법을 통과시켰고, 그 결과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1867년 샌프란시스코는 병에 걸렸거나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거나 몸이 훼손된 사람, 혹은 어떤 형태로든 신체가 기형이거나 보기 흉하거나 역겨운 존재를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추방했다. 포틀랜드는 불구나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구걸하는 것을 금지했고, 1911년 시카고는 병들었거나 불구이거나 또는 기형인 신체부분이 노출되는 것을 금지하도록 주법을 개정했다. 공무원과 이 법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추한 모습으로 구걸하는 장애인들이 도시의 공공장소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길에서 구걸하거나 물건을 파는 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인 사람을 처벌했고, 장애인들을 대중의 뇌리에서 지우려고 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저자는 이런 부끄럽고 쓰라린 장애인 차별의 역사를 지닌 미국이 어떻게 지금과 같이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 손색없는 인권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7장과 8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저자가 서술한 바와 같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뒤따랐다. 그러나 내 관심은 그를 극복해온 과정보다는 장애인이 그런 상황에서 여성이나 노예와 더불어 얼마나 차별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들이 당시에 받았던 차별이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적 약자에게도 동일하게 가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살피는데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우리 사회는 차별금지법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법안이 발의된 6월말부터 내 관심은 온통 거기에 쏠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이 책이 미국에서 일어난 장애의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고 있지만, 읽으면서 상당한 기시감(旣視感)을 느꼈다.

 

유럽인들이 북미대륙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토착민 세계에서는 장애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전기 식민지시대에는 생산성을 기준으로 장애를 정의했기 때문에 노동이 가능하다면 신체적인 결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 식민지시대에 들어서면서 장애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오히려 확장되어 아프리카인을 존재 자체로 장애인 취급해 노예제를 정당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적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노예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제도라고 주장하고, 그런 주장에 스스로 세뇌되어 그것을 사실로 믿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독립하고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는 Ugly Law를 만들어 장애인을 추방하고 아예 대중의 뇌리에서 지우려고까지 했다.

 

우리도 장애인을 천형으로 여겼던 때가 있었고, 장애를 가진 가족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며, 그들에게 유형무형의 차별이 가해졌다. 그러나 적어도 법을 만들어 그들을 추방하려 한 일은 없었고, 그들을 대중의 뇌리에서 지워버리려 한 적은 더욱 없었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내 기억에는 그렇다.) 그 후로 세월이 많이 흘렀다. 주변을 돌아보면 예전에 비해 장애인을 배려한 시설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장애인들도 그들에 대한 차별이 시정되고 있으며 편견이나 차별이 해소되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들었을 뿐 더 치밀하고 집요하게 확산되어가고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차별과 혐오, 그리고 배제의 대상이 날로 확장되어 간다는 것이다. 성소수자이슬람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문명국이기를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차별과 혐오를 신념이요 신앙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것을 차별과 혐오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희생해서라도 기어코 막아내야 하는 사회악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소수자는 그것이 존재의 문제임에도 전환치료를 통해 기어코 그들이 말하는 본래의 성으로 돌려놓는 것이 성소수자를 위한 길이라는 사명감으로 여긴다. 그것이 노예제는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아프리카인을 위하는 길이라는 인종주의자의 주장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저자는 북미 토착민 사회에서 장애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지만 자리가 요구하는 책무 때문에 농인이나 맹인이 추장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서술하면서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조화를 이상으로 추구했지만, 그 이상대로 살아가기는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라면 이상을 달성하고도 남은 것으로 봐야하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그것을 차별로 받아들이겠는가.

 

저자는 여성들과 노예들이 이런 부당함에 맞서는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차별받는 여성이 차별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노예였던 사람이 능력이 있어야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서 무능력한 노예를 차별하는 모습이 매우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또 다른 모습의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를 가하는 지금 우리 모습과 겹쳐 보인다.

 

역자에 거는 기대

 

그런 가운데 그나마 역자와 같은 학자들의 헌신으로 차별의 부당함을 알리는 주장이 동력을 잃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내게는 역자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과 이의 연장선상에서 읽게 된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 강릉원주대학교 김지혜 교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그동안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귀한 지침이었다. 그래서 누가 내게 인생서적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이 책을 꼽겠다.

 

오늘 아침 그렇게 소중한 책을 쓴 위의 저자 중 한 분이 널리 알려진 것과 다르게 판매부수가 4만 부에 불과하다는 글을 올렸다. 이 책들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었던 내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나마 그 분은 다른 이들에 비해 책을 쓸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이런 양서를 다시 보기를 기대하는 게 욕심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역자에게, 그리고 홍성수 교수, 김지혜 교수에게 크게 기대를 걸고 있다. 더욱 정진하여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지침이 되는 글을 계속 발표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독자의 반응 없이 저자의 의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이 펴내는 책을 열심히 사서 읽고 형편 되는 대로 주변과 나누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런 기대를 접을 수 없다.

 

어쩌다 보니 페이스북에서 출판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글을 통해 출판시장의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과 신간을 펴내게 하는 동력은 수익보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도 아울러 깊은 감사를 전한다.

 

역자인 김승섭 교수가 천착하고 있는 연구주제에 대한 소식도 듣고 현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고 싶어 오래 전부터 페이스북에서 관계를 맺어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글을 읽을 수 없었다. 활동이 뜸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색도 되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물으니 여전히 글이 올라온다고 했다. 차단당한 게 아닌가 싶다. 댓글을 몇 번 달기는 했어도 결례가 되었던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내가 올리는 글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아직도 차단한 이유를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생각날 때마다 일일이 김 교수의 이름으로 검색해서 소식을 듣고 있다. 혹시 누군가 페이스북 말고 그의 근황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차단을 풀어주도록 김 교수께 말이라도 넣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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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장애의 역사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d******s | 2020.12.22 리뷰제목
(스포일러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킴 닐슨 지음 / 김승섭 옮김 <장애의 역사> 리뷰 입니다. 2020년 예스 리뷰 이벤트 덕에 언젠가 구입하겠노라고 카트에 담아두었던 책을 얼른 사서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저자도 낯설고, 다루는 주제도 무겁게 느껴져서 아마 김승섭 역자가 아니었다면 제가 소장할 책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김승섭 교수가 번역을 맡았으며, 자신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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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킴 닐슨 지음 / 김승섭 옮김 <장애의 역사> 리뷰 입니다. 2020년 예스 리뷰 이벤트 덕에 언젠가 구입하겠노라고 카트에 담아두었던 책을 얼른 사서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저자도 낯설고, 다루는 주제도 무겁게 느껴져서 아마 김승섭 역자가 아니었다면 제가 소장할 책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김승섭 교수가 번역을 맡았으며, 자신의 연구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여 책을 번역했다는 이유를 인터뷰로 알고나니 도저히 읽어보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요. 책은 정말 잘 만들어졌습니다. 역사학을 공부한 저자가 어떻게 "장애"의 역사를 세부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책의 전체를 아우르며 간략하게 주제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책에 대한 호감이 한껏 올라가기 시작하더라고요. 책의 내용은 쉽게 읽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새삼 나 자신이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았는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굉장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책입니다. 역자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주의 깊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필독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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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쟁취해낸 장애인 인권의 역사 - 미국 평점9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r******3 | 2021.01.07 리뷰제목
1. 본 책은 미주대륙에 청교도 이주 전 원주민들이 장애인과 몸에 대해 어떻게 보았는지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 관점이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저자가 현대 미국인으로서 원주민이 유럽 이주민에게 지배당한 시기를 식민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신기하다-를 거치며 장애인과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3장까지 전개된다. 2. 이후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며 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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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책은 미주대륙에 청교도 이주 전 원주민들이 장애인과 몸에 대해 어떻게 보았는지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 관점이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저자가 현대 미국인으로서 원주민이 유럽 이주민에게 지배당한 시기를 식민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신기하다-를 거치며 장애인과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3장까지 전개된다.

2. 이후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며 올바른 몸을 지닌 시민 개념과 '자율:비장애 의존:장애' 개념이 어떻게 장애인과 소외계층을 배제했고 이주민, 장애인 등에 대한 극단적인 단종정책 및 탄압의 역사가 이루어졌는지 6장까지 서술된다. 마지막 7, 8장에서는 장애인들이 단체를 만들고 투쟁을 통해 비장애중심주의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는 주체로서의 장애인을 조망한다.

3. 올바른 몸을 가지지 않았던 원주민,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노인, 소아 등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사회적인 차별 뿐만 아니라 무차별적인 폭력과 성적 학대가 이루어진 역사가 적나라하게 써져있어서 읽는 중에 많이 불편했다. 현대 자유와 인권의 상징인 미국이라는 나라가 좋게 말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느꼈고 나쁘게 말하면 그러한 이미지와 거의 반대가 되는 추악한 역사를 지닌 위선적인 것인지 동시에 느꼈다.

4. 하지만 책을 읽다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서론부터 저자는 몬트리올 학술대회에서 만난 맹인과의 일화를 소개하는데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는 몬트리올에서는 소위 비장애인인 저자가 프랑스어에 능한 맹인보다 장애에 가깝지 않은가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는데 장애라는 단어의 외연을 굉장히 넓게 생각하는 오류가 아닌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물론 동시에 모두가 장애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장애로 인한 고통을 덮는 행위라고 저자 또한 지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장애에 대한 사회적, 시간적 맥락이 없는 고정된 정의와 이념은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학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정의를 유동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긴 했다만..)

5. 책에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잔인했던 차별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쉽게 분노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자자가 생각하는 대로 현실에서 대부분의 소위 정상인을 '비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보다는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견 성적 지향성 스펙트럼에서 소위 대다수의 일반인을 이성애자라고 칭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마치 의료계에서 비주류인 한의사가 자신을 기본으로 두고 (양)의사를 비한의사라고 칭하면 과연 국민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을까?

6. 물론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개념들이 많은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이뤄낸 결과고 투쟁할 당시에는 나같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했지만 현재는 당연해진 만큼 '비장애중심주의' 또한 앞으로는 보편적으로 쓰일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음표를 붙이는 것조차 굉장히 공격받을 수 있는 걸 보면 인권분야는 무조건 배우고 납득해야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일종의 백래시로만 이해되야하는지 조금 의아하다.

7. 그럼에도 장애는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많은 장애인들이 지하철 리프트 추락사고에서 이동권을 부르짖어서 생긴게 지하철 엘레베이터의 보편화이다. 비록 정작 장애인보다는 어르신들이 주로 많이 타긴 하지만.. 인지 못한 사이에 세상이 빨리 바뀐다.

8. 아쉬운 점도 있다. 미국 장애의 역사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지하철 이동권 투쟁처럼 먼나라의 일이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불편감을 겪었고 의아함을 느낄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책이 있다면 보다 우리 삶에 와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아시아 #김승섭 #장애의역사 #비장애 #비장애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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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평점9점 | YES마니아 : 로얄 e***n | 2020.12.26 리뷰제목
장애의 역사. 킬 닐슨. 김승섭 역☆☆☆☆믿고 보는 작가 김승섭 교수님 책. 우리몸이 세계라면, 아픔이 길이도려면에 이은 세번째 책. 미국의 역사를 "장애"의 역사로 풀었다. 킬 닐슨이라는 미국의 학자의 논문을 번역해서 미국토착 원주민들 역사에서 노예무역, 미국의 독립, 미국 남부전쟁, 산업화, 세계 1.2치 대전, 자본주의 성장기에 이르는 역사에서 장애의 개념이 어떻게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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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역사. 킬 닐슨. 김승섭 역

☆☆☆☆

믿고 보는 작가 김승섭 교수님 책. 우리몸이 세계라면, 아픔이 길이도려면에 이은 세번째 책. 미국의 역사를 "장애"의 역사로 풀었다. 킬 닐슨이라는 미국의 학자의 논문을 번역해서 미국토착 원주민들 역사에서 노예무역, 미국의 독립, 미국 남부전쟁, 산업화, 세계 1.2치 대전, 자본주의 성장기에 이르는 역사에서 장애의 개념이 어떻게 왜곡되어왔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설명한다.

책의 서두에 있는 번역자의 말이다.
"차별은 공기와 같아 기득권에게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지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차별과 함께 살아간다. 번역하며 책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했다. 우리 모두는 상처받고 다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인 동시에 그 약함을 응시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간의 존엄은 독립in-dependent 보다도 상호의존inter-dependent을 통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실은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힘이라는 사실을 그 대화에서 배웠다."

새롭게 배운 개념이 LPC법조항이다. LPC, “공공의 부담이 될 것 같은 (Likely to become a Public Charge)"
. 앨라배마주는 “영아, 정신이상자, 농인, 병어리, 노인, 병약한 사람, 사지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과 같이 부담이 될 수 있는 이들을 태운 배를 지휘하는 사람”에게 500달러의 보석금을 요구했다. 매사추세츠주법에 따라 각 항구마다 검사관이 있었다. 검사관이 “승객 중에서 정신이상자, 백치, 사지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 노인, 연약한 사람,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발견할 경우, 선주는 1,000 달러의 보석금을 내야 했다.

공공의 부담...많은걸 되돌아 보게하는 용어다.
논문을 정리한 책이라 읽기가 쉽지않다. 하지만 역자의 노력으로 그나마 용이하게 읽었다. 오래걸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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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시민인 우리는 “자신의 두 발로 서 있어야 하고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얼마나 비장애중심주의적 표현인가!) 이러한 서사에서, 독립은 좋은 것이고 의존은 나쁜 것이 된다. 의존은 타인에게 기대는 연약함을 의미할 뿐이다. 장애를 의존과 동일시할 때, 장애는 낙인이 된다. 장애인의 몸에는 열등한 시민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역사학자인 린다 커버Linda Kerber가 개인주의라는 미국적 이상의 성차별적 요소를 지적하며 말했듯이, 외톨이 개인이라는 신화는 비유이고, 수사적인 도구다. 실제 삶에서 스스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온전히 혼자인 사람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의존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의존은 모든 인간의 삶 한가운데 존재한다. 의존이 공동체와 민주주의를 만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완치 하기 위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명확한 원인"이 있는 의학적 문제로 장애를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은 장애를 신체적 결함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진단 가능한 그 결함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장애인을 배타적으로 정의한다. (그러한 결함이 없는 사람들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장애를 몰역사적이고, 고정불변하는 개념이라고 잘못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협한 관점은 수많은 장애인의 다양하고 풍성한 삶을 지워버린다.
장애인에게 장애는 분명 삶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와 동시에 인종, 성적 지향, 젠더, 계급, 정치적 이념, 신체적 강건함, 취미, 그들이 사나운 개를 좋아하는지 여부도 그들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한다. 장애는 질환(疾患)을 수반할 수 있지만, 비장애인도 아플 수있다. 질환으로 인해 장애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이후 질환은사라지고 장애만 남는 경우도 있다. 질환과 장애는 동의어가아니다.

장애를 이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몸을 기준으로 이루어지지만, 어떤 몸이 장애가 있다고 분류하는 것은 젠더, 인종, 성적 지향, 교육수준, 산업화와 표준화의 수준,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 여부나 보조 장비에 접근 가능한지 여부, 계급 같은 요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뿐 아니라 나이, 의료서비스, 일상생활의 조건에 따라서도, 우리는 “장애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범주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고나 질병 때문에 일시적으로 장애를 갖기도 한다. 언어장애나 휠체어를 사용하는 경우처럼 사람들이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장애도 있고, 정신적 장애나 신경학적 장애처럼 쉽게 구분해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장애인의 능력을 폄하하거나 그들의 잠재력을 한계 짓는 이념과 관행은 비장애중심주의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비장애 중심주의적 태도는 장애인을 향한 혐오와 공포, 차별과 편견을 반영한다. 그것은 눈에 띄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것처럼 노골적인 차별로 혹은 스탠딩 콘서트장에서 모두가 두 시간 동안 서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미묘한 편견으로도 드러난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와 마찬가지로, 비장애중심주의는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 구조 속에 축적된다. 그것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우발적으로 또 때로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조용히 작동한다. 예를들어, 장애인이 미디어에서 전혀 보이지 않거나 불쌍하고 슬픈 모습으로만 묘사될 때, 비장애중심주의는 우리의 미디어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섹시한지, 춤이란 무엇이고 건강함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리더십과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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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인지, 신체, 감정적 역량과 관계없이 그 사람이 노동과 관계의 측면에서 호혜 활동을 하며 공동체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있는 한 그들은 조화롭게 살고 있다고 여겨졌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지 않았다. 호혜 활동과 그로 인한 유대는 누군가의 가치를 규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모든 몸은 그렇게 변형될 수 있었고 종종 실제로 변형되었기에, 그로 인한 신체적 차이는 특별할 게 없었다. 한 토착민 연구자는 퓨마와 곰의 공격, 천연두, 전쟁, 질병을 언급하며 “후천적으로 얻게 된 [신체적] 장애가 너무 흔했기 때문에,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1639년 매사추세츠는 영국에서 이미 확고하게 성립된 관행을 채택하여 “어린이, 백치, 실성한 사람, 그리고 모든 낯선, 새로운 이들”은 법을 지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처벌받지 않도록 했다. 1647년 로드아일랜드 역시 비슷한 조항을 채택했다.

제럴드 그롭erald Grob이 서술했듯이 “정신이상인 사람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하는 다른 집단의 운명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롭의 분석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신이상이라 여겨지던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치료가 “타인에게 의지해야 하는 다른 집단과 다르지 않았던 것은, 정신이상 역시 백치처럼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혁명과 새로운 국가 건설은 시민들이(물론 그 시민의 범주는 제한적이었지만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신뢰할 만한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전제로 가능했다.

1787년 채택된 미국 헌법에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라고 명시한다. 그러한 인간의 잠재력과 이성에 대한 믿음 위에서 새로운 과학적 사고방식은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의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와 그 성과는 질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고 더 많은 사람들이 깨우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했다.

미국 독립혁명 이전에 유럽계 정착민 공동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체장애인을 위한 제도가 없었고 그와 관련된 논의도 없었다. 이는 신체장애가 그다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그러한 신체적 다양성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예상 가능한 것이었고, 그 신체장애인이 공동체의 노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대응책이 만들어졌고 또 단순히 그런 대응책 없이 노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그냥 죽었다. 천연두와 다른 역병들은 식민지 마을을 주기적으로 휩쓸어 청력이나 시력을 앗아가거나 피부에 심한 흉터를 남겼다. 때때로 나무는 잘못된 방향으로 쓰러졌고 도끼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손가락과 사지를 잃었고 아이들은 불에 탔고 총은 잘못 발사되었다.

유목민이나 농민으로 살아가던 토착민 부족들과 비교해서 전사(Warrior)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토착민 부족들은 이상적인 신체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장애를 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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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무역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했기 때문에, 노예에게 장애가 있으면 수익이 감소했다. 당시 널리 퍼진 왜곡된 노예제의 논리, 실명한 사람들은 노동할 수 없다는 지배적인 비장애 중심적인 믿음, 그리고 “한쪽 눈만 보이지 않아도 헐값에 팔리"는 상황에서 선원들은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게 자신들에게 더 이익이 되는 사람들을 배 밖으로 내던졌다.

거의 모든 노예무역선에는 상어가 함께 따라왔다. 모든 항해가 르 로되르 사례와 같이 끔찍하게 끝을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가치가 폄하되는, 특히 장애를 이유로 인간을 가치 없다고 여기는 일은 노예무역 어디에나 있었다. 노예선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눈에 띄는 신체, 정신 · 인지장애를 가진 노예는 손상된 상품으로 취급받았다.

노예제의 잔혹성은 노예제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사람들을 점점 더 끔찍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인종주의, 비장애중심주의, 경제적 동기의 잔인한 결합은 장애를 가진 노예를 극단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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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건국되기 이전, 가족과 공동체의 법적·경제적 상황은 장애의 정의, 장애인의 경험, 장애의 사회적 의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것은 비장애중심주의라는 표준과 그 결과를 규정했다. 매우 약한 국가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기,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복지는 매우 중요했다.

미국 독립혁명 이후 수십 년 동안 새로운 국가는 좋은 시민과 나쁜 시민을 정의하고 구별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고 간주하는 거대하면서도 동시에 잠재적으로 위험한 실험이었다.

미국이라는 국가를 만드는 일에는 능력 있는 몸을 가진, 온전한 시민권을 체화한 사람들에 대한 법적 이념적 설계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배제되었다.

시민으로서 적합한 사람과 부적합한 사람을 구분하는 과정은 수많은 법적 · 이념적 · 실용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부적절함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언제 그것은 국가를 위협하는가? 부적절한 사람들은 구제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와 같은 이념은 시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일을 뒷받침하고 그 과정에 기여했다. 하지만 장애인으로 분류된 모든 사람이 배제 되었던 것은 아니다. 독립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장애를 가진 퇴역군인들은 자신들의 고용, 경제적 여건, 가족 관계가 능력있는 몸을 가진 다른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즐겁게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국가의 경제 구조, 성장하는 시장 경제, 주어진 일을 완수하기 위해 가족이 함께 일하는 방식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생산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이 그 노동에 적응하거나 혹은 노동의 형태를 그들에 맞춰 조정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훗날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심화되며, 이러한 일은 점차 어려워졌다.

백인 여성과 노예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일반적으로 백인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으로 얻은 경제적인 결과물을 관리하고 결정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거의 없었다.

노예제와 인종주의는 북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과 그들의 후손이 공동체와 시민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지능과 능력, 그리고 심지어는 인간성의 측면에서도 백인과 동등하지 않다는 이념을 전제하고 있었다. 노예 소유자들, 의학자, 신학자,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들, 그리고 유럽과 미국사회 주류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노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자유인이 정신적·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장애 개념은 노예제와 인종주의를 정당화시켰고, 심지어 많은 백인들로 하여금 노예제가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아프리카인들 에게 이득이 된다며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기만하는 척하는 데 기여했다.

과학적 인종주의의 사악한 믿음 중 하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그들 몸의 인종적 결함 때문에 육체적 통증과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믿었든 그저 단순히 신경 쓰지 않았건 간에, 오늘날 근대 부인과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의사이자 노예 소유주였던 제임스 매리언 심스 James Marion Sims는 "노예 여성 집단을 대상으로 어떠한 동의도 받지않고 마취제 없이, 악몽처럼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실험”을 수년간 시행했다.

이 나라는 유능한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장애는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는 하나의 이념적인 수단이 되었다.
장애, 즉 적합하지 않은 몸과 정신에 대한 우려는 초기 이민법에서 드러났다. 식민지 시기 매사추세츠주가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다리를 저는 무력하고 병약한 사람들이 해안에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 1848년까지 매사추세츠주와 앨라배마주는 오늘날 LPC, 즉 “공공의 부담이 될 것 같은 (Likely to become a Public Charge)" 조항으로 알려진 법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앨라배마주는 “영아, 정신이상자, 농인, 병어리, 노인, 병약한 사람, 사지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과 같이 부담이 될 수 있는 이들을 태운 배를 지휘하는 사람”에게 500달러의 보석금을 요구했다. 매사추세츠주법에 따라 각 항구마다 검사관이 있었다. 검사관이 “승객 중에서 정신이상자, 백치, 사지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 노인, 연약한 사람,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발견할 경우, 선주는 1,000 달러의 보석금을 내야 했다. LPC 조항을 집행하던 초창기 모습은 간략한 역사적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1860년 남북전쟁부터 1920년 초반까지,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에 관한(드물게 장애인에 의한) 시설의 수와 종류가 증가했다. 남북전쟁 시기 시민들과 시민이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은 교육을 사회개혁, 계급상승,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장애를 영웅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남성 퇴역군인, 그것도 눈에 보이는 신체장애를 가진 남성에게만 해당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적인 남성성조차 장애인 퇴역군인들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어 경제적으로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연방 연금과 지원 프로그램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가지게 된 독립전쟁 퇴역군인들은 일자리를 찾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기 위해 분투해야 했고, 이러한 어려움은 연방정부 퇴역군인보다도 남부연맹 퇴역군인에게서 더 두드러졌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장애인이 된 이들 중에서도 용맹하게 싸우다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과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이들은 구분되었다.

이 시기 중요한 이야기는 도시화, 산업화, 계급 불평등에 대한 것이다. 1870년과 1920년 사이 미국인 수는 1,000만 명에서 5,000만 명으로 증가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주요 도시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 미국은 경제위기와 정치적 불안을 겪었고 노동조합이 공고해졌다. 점점 커지고 붐비게 된 도시에는 학교와 수돗물, 하수처리시설, 교통시설, 식량 분배가 필요했지만, 그것들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다. 열악한 위생상황과 인구 과밀은 질병 전파를 촉진시켰다. 기술 발전으로 철강과 면방직 같은 산업이 성장해 일자리 증가로 이어졌고, 어떤 사 람들에게는 부유함을, 다른 이들에게는 빈곤과 비위생적인 환경을 선물했다. 산업 기술은 산업재해 증가로도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재활전문가들은 장애를 가진 퇴역군인이 성공적인 불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을 위한 재활산업, 직업 프로그램, 시민권 상담은 크게 확장되었지만, 퇴역군인이 아닌 장애인들까지 항상 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점점 선한 장애인과 나쁜 장애인을, 선한 시민과 나쁜 시민을 구분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사람이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 있는가 여부 였다.

그러나 스트래챈은 장애를 사회복지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로 이해했다. 당시 떠오르던 재활전문가들이 그랬던 것쳐렴 개인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장애에 감정적 신체적으로 적응 "Adjustment" 하는 것보다는,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구조와 행태를 바꾸는 정책과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스트래챈은 장애가 계급과 노동 문제라고 주장했다.

운동 참여자들은 장애가 단순히 의학적·생물학적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 운동은 때때로 장애를 정의하는 의학적 권위에 직접적으로 도전했다. 옹호자들은 어빙 고프면, 제이코부스 텐브뢰크, 어빙 케네스 졸라 같은 운동가나 학자의 작업을 이용해 장애가 장애인의 삶을 불필요하게 해치고 제한해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고립, 억압으로 이어지도록 차별하고 부당한 낙인을 찍는 사회적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장애인은 타인의 보호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맞서 싸우며, 로버츠를 포함한 이들은 전국적으로 자기 결정, 당사자 주도, 탈시설의 원칙 속에서 조직화된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자립생활 운동가들은 장애인이 시민활동에 거의 참여할 수 없게 하는 건축물과 교통 수단의 장벽을 제거하고자 했다. 장애인들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관리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지원과 편의시설을 만들기 위해 일했다.

장애인연맹연합의 소식지 《진보 Progress)의 회원인 스콧 로스트론이 1977년 칼럼에 적었듯이, “미국에서 흑인, 여성, 노인, 그리고 다른 집단에 대해서도 그러했듯이, 장애인 공동체에 평등은 천천히 들어오고 있다. 결핍으로 인해 특수한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사람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뀔 때가 되었다. 분리에서 통합으로 가야 한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밝혀야 한다. (…) 장애인, 흑인, 노인 모두 인간으로서 필요로 하는 게 있다. (…) 그것은 장애인의 권리만이 아니라, 평등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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