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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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3

동서융합의 세계제국을 향한 웅비

리뷰 총점 9.5 (42건)
분야
역사 > 역사이론/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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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리스인 이야기 3 - 시오노 나나미 평점9점 | g*******7 | 2018.12.02 리뷰제목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3]는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그리스 역사를 다루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교과서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한 번쯤은 들어본 부분이지만,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의 몰락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책의 초반부에 이 시기에 대한 그리스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시기와 더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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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3]는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그리스 역사를 다루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교과서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한 번쯤은 들어본 부분이지만,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의 몰락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책의 초반부에 이 시기에 대한 그리스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시기와 더불어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상황에 대한 설명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에 대부분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쉽게 느껴진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관련된 책은 시중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알렉산드로스 원정기](글항아리)를 읽었던 나의 입장에서는 내용이 다소 중첩된 느낌마저 받게 된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입장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하여 처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어렵지 않게 이 시기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리스인 이야기] 시리즈의 2권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참패한 아테네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 3권은 그러한 아테네의 힘겨운 상황을 이어서 설명한다. 민주정이 아닌 30인의 과두정이 성립되면서 민주정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혼란이 아테네를 더욱 힘겹게 만든다. 과두정 지지자인 크리티아스는 이전의 아테네에서 볼 수 없었던 숙청을 통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과두정 강화 및 친 스파르타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민주정과 과두정에 대한 시민의 선택이 아닌 공포 분위기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으로 인하여 트라시블로스의 봉기로 인하여 스파르타로부터 외면당한 크리티아스의 과두정은 붕괴된다. 하지만 트라시블로스는 페리클레스처럼 정국을 운영할 그릇이 아니었기에 아테네의 암흑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한 스파르타는 과연 어떤 상황이었을까? 폐쇄적 입장을 고수하는 스파르타의 패권은 불안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파우사니우스와 감독관인 에로포스의 대립, 여기에 헬롯 출신의 아웃사이더였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리산드로스의 개입으로 인하여 스파르타 역시 내부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하여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는 물론 스파르타의 패권을 의심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스파르타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국 페르시아의 아타크세르크세스와 '황제에 의한 평화'라는 협정을 통하여 그리스 본토는 스파르타가, 소아시아 해안 일대의 인접한 섬들의 영유권은 페르시아가 갖는 것으로 공표하면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일단락 된다. 그러나, 이는 스파르타의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페르시아와의 협정으로 인하여 테베를 비롯한 많은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의 무력 패권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테베는 원래 스파르타와 함게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일원이었지만, 민주정을 옹호하는 펠로피다스와 과두정을 옹호하던 에파미논다스가 서로 협력하여 테베의 안정과 군사 개혁으로 인하여 점점 강대해지면서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한다. 특히 300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테베의 '신성부대(Sacred band)'의 활약이 돋보였으며, 스파르타는 이 전투에서 중무장 보병을 단 700명만 보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쇠퇴한 상황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은 테베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테베의 패권 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테베는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라는 두 명의 걸출한 지도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었고, 그들의 정예부대인 '신성부대'의 규모가 300명이라는 점은 테베의 패권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의 몰락과 더불어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패권은 그리스의 암흑기를 예고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362년 테베를 질시한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여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병력 3만 3천(기병 3천 포함)의 테베 연합과 2만 2천(기병 2천 포함)의 반 테베 연합이 격돌한 만티네아 전투에서 테베가 전투에서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그리스 전체의 소모전으로 마무리된다. 테베는 이전에 사망한 펠로피다스와 더불어 페마니논다스가 전사함에 따라 급속도로 그 힘이 쇠약해진다. 훗날 테베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모든 시민들이 노예로 팔려가면서 완전히 소멸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의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국가가 바로 마케도니아였다.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이들은 그리스 민족이지만, 왕국이었기에 그리스에서 미개한 국가 취급을 받아 왔으며 심지어 그리스 모든 도시 국가의 제전인 올림픽에도 참가하지 못한 마케도니아였기에 이들의 대두는 눈여겨 볼만하다. 최근 [모차르트]라는 책을 읽으면서 모차르트의 성공이 그의 아버지의 기여분이 크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이 시기의 마케도니아의 역사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미개한 마케도니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한때 왕자 시절에 테베에 인질로 머무르고 있던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암투를 통하여 왕위에 오른 이후에 몸소 개혁을 실천으로 옮기게 된다.

 

 먼저 테베에서 운용한 기병의 존재를 더욱 확대하여 마케도니아 남부의 테살리아 지방을 흡수하여 이 지방의 우수한 말을 확보하여 대규모의 기병을 편성하였으며, '팔랑크스'라 불리우는 중무장 보병을 조직하여 길이 7미터에 달하는 '사리사'라는 장창으로 무장시켜 그 유명한 밀집 장창 대형을 갖추게 된다. 또한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정복을 통하여 획득한 땅을 농민에게 나눠주면서 자작농의 증가를 꾀하였으며 화폐의 주조와 광산의 개발을 통하여 경제 활성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필리포스 2세의 개혁으로 인하여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 연합을 격파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고,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와 동시에 20대에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 원정이 가능했음을 새로이 알게 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투에 연달아 승리하면서 동방을 호령하던 제국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3세의 죽음으로 인하며 몰락하게 되고, 히다스페스 전투에 승리하면서 인도에 다다른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이미 많은 책들이 다루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러한 원정 막바지에 마케도니아 상층부 지휘관의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불만과 함께 종군을 거부한 사건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알렉산드로스이 원정은 페르시아를 정벌하는 것이었기에 이미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 이전에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기에 지휘관들은 회군을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불만을 들어보면 당시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원정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패자인 페르시아인을 '지방장관'(비록 해정에만 국한되었지만)으로 임명하면서 우대한 것.

2. 페르시아인의 관습을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강요한 것

3. 페르시아풍 의복을 두르거나 옥과에 앉는 등 페르시아의 나약한 생활방식에 매료된 듯 보이는 것. 

4. 이집트의 신탁을 통하여 알렉산드로스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고 실제로 믿고 있다는 의심.

5. 다리우스의 죽음으로 동방 원정의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다는 것.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불만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이건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사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이 비판을 받는 것은 역사에 대하여 개인적인 생각을 마치 실제 역사인 것처럼 반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그녀 개인의 생각임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마지막 전투인 기원전 331년의 가우가멜라 전투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의구심 역시 비판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왜 페르시아가 수사와 같이 방어력이 강한 도시에서 수성전을 하지 않고, 한 번의 회전을 통하여 승부를 지었는지 의문을 표하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도 페르시아의 병력 대부분이 국왕의 직속 군대가 아닌 지방 장관과 부족에서 차출한 병사들이기에 한 도시에서 장기간의 수성전을 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러한 생각도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의견이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생각을 마치 역사인양 표하는 부분은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 이야기 3]은 여러모로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분량의 한계가 아쉽긴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그리스 역사와 더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분량은 좀 아쉽긴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되기에 그녀 역시 그렇게 판단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시리즈를 그녀의 대표작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와 연계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를 들면 아테네가 과두정이냐 민주정이냐에 따른 갈등과 불안정한 패권으로 인하여 혼란의 시기를 보이는 상황에서 로마는 이것을 본받아서 '리키니우스 법'을 제정하면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최소화하면서 '레스 푸블리카'를 지향하였다는 언급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인 이야기] 시리즈는 정통 역사서는 아니다. 각종 사료와 분석에 기반한 것이긴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개인적인 생각과 추측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실제의 역사라는 점과 더불어 어렵지 않게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의 역사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이 필요성을 충분히 짐작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타

466쪽 아래에서 4번째 줄 : 사 -> 사

: 이 오타가 흥미로워서 언급해 본다. 고대 페르시아의 지방 행정장관 또는 태수를 뜻하는 용어 "사트라프"는 나 역시 읽으면서 헛갈렸다. 즉, "사트라프"와 "사프라트"로 잘못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후자가 발음하기 편하여 그러한 오류를 범하였는데, 이 책 역시 막판 이 부분에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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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위대한 이유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n*****m | 2018.09.11 리뷰제목
몇 달 전 뉴스에서 마케도니아라는 지명에 대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갈등을 빚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유고슬라비아가 분열하면서 독립한 마케도니아는 당연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그런 국명을 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의 북부 지역의 한 주(洲)이 명칭이 마케도니아라는 것이다.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를 보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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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뉴스에서 마케도니아라는 지명에 대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갈등을 빚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유고슬라비아가 분열하면서 독립한 마케도니아는 당연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그런 국명을 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의 북부 지역의 한 주()이 명칭이 마케도니아라는 것이다.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를 보았을 때 더 넓은 땅은 그리스가 갖고 있음에도 독립한 국가가 옛 마케도니아 제국의 영토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런 국명을 썼다고, 그리스가 문제 제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이 명칭에 대해 양국이 타협을 보았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마케도니아가 국명을 북마케도니아 공화국(Republic of North Macedonia)으로 변경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마케도니아도, 그리스도 이 방안에 대해 반대가 심한 모양인데, 그만큼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을 양보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정작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마케도니아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일 것이다.

그리스가 반()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변방의 왕국, 마케도니아를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1권의 주인공은 1,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장군들이었고, 2권의 주인공은 페리클레스였다. 1권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었다면, 2권에서는 그 민주주의가 최고점에 다다른 시기를 다루었다(물론 페리클레스 이후 지속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이 시기의 그리스, 정확하게는 아테네를 숭상한다.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이상적인 국가로.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필체는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은 느낌을 자꾸 받았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페리클레스와 같은 인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굳건한 모습으로 존속할 수 없는 체제라는 느낌을 자꾸 준다. 부정할 수는 없되, 자꾸 약점을 캐는 모습이다.

 

그러나 3권에 와서는 시오노 나나미는 신이 났다. 당연히 『그리스인 이야기』 3권의 주인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될 수 밖에 없다. 앞 부분의 아테네의 쇠락에 이은 스파르타, 테베의 몰락은 물론이고,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왕에 대한 얘기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위한 서론에 해당할 뿐이다. 그는 말 그대로 대왕이니까.

 

이 위대한 정복자에 대해서 쓰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과 그 원대한 포부가 중간에 사그라지는 것은 못내 아쉬워한다. 그런 모습은 그녀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에 보인 애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성공한 동력 중 하나를 관용과 민족 융합 정책이라는 것으로 늘 강조해왔기에, 그것을 그들에 먼저 실현시키려 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야말로 시오노 나나미가 신이 나서 쓸 수 밖에 없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애정은 카이사르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 카이사르에 대해서는 애인을 삼고 싶다고 할 정도인데, 그건 카이사르의 자유분방한 성격와 여성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그가 활약한 나이(4,50)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본다면, 알렉산드로스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20대에 거의 모든 것을 이루고 30대 초반에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늘 젊은이일 뿐이고, 애정을 느낀다기 보다는 찬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 찬탄이 이 3권의 박진감 넘치는 문체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패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위대한 전쟁과 전투만이 그를 위대한 왕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는 위대한 이상을 가졌었다. 분명 그리스인이었지만 그리스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그 배타주의(심지어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던)를 박차고 나가 동서의 융합을 꿈꾸었고, 실현시키고자 했다. 비록 그 이상은 불운의 상황으로(그토록 전장의 맨 앞에 섰을 때는 죽음이 그를 비켜갔건만, 말라리아에 무너져버리다니) 한 순간에 중단되어버리지만, 인류에 헬레니즘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위대한 전쟁의 신이자, 고귀한 이상을 꿈꾸었던 인물이 그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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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리스인 이야기 3 평점10점 | s*****1 | 2019.02.27 리뷰제목
1편에서 그리스 국가의 기원과 발전, 그리스를 대표하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그리고 그리스 국가 연합의 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다루었고,2편에서는 페리클레스가 정권을 잡으며 시작되는 아테네 황금시대와, 그의 죽음 이후 시작된 우중정치의 시작, 혼란의 끝에 27년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아테네의 패배를 다루었다. 3편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의 패배한 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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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그리스 국가의 기원과 발전, 그리스를 대표하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그리고 그리스 국가 연합의 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다루었고,

2편에서는 페리클레스가 정권을 잡으며 시작되는 아테네 황금시대와, 그의 죽음 이후 시작된 우중정치의 시작, 혼란의 끝에 27년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아테네의 패배를 다루었다.

 

3편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의 패배한 아테네의 쇠락 뿐만 아니라 승리한 스파르타를 비롯, 그리스 도시국가 전체의 몰락의 과정속에 등장하게 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제국 건설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아테네의 쇠락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후 스파르타에 의해 세워진 30인 과두정권은 혼란만 야기한 채 붕괴된다.

이런 혼란은 아테네 정치의 불신을 가져오고, 문화 경제적으로 번영 번화한 아테네로 몰려오던 외국인의 발길을 끊고, 더 나아가 그리스 국가의 인재들을 해외로 유출하게 되는 부작용까지 낳게 된다.

저자는 이를 그리스 최대의 비극이라 평가한다.

전쟁에 승리한 스파르타는 폐쇄된 국가운영 체제에 경제력은 미약했다.

실질적으로 그리스 국가의 문화와 경제를 이끌던 아테네의 패배는 그리스 전체 경제력의 몰락을 야기했고,

실업자가 된 병사들은 헐값에 페르시아에 용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페르시아 내전에 용병을 파견한 스파르타에 대한 보복으로 페르시아 황제의 소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벌을 불렀고, 결국 에게 해의 동쪽 이오니아 지방은 50년 뒤 알렉산드로스의 발이 닿기까지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고 만다.

 

테베의 부상과 한계

스파르타에 대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불신은 테베의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스파르타를 타도하고 그리스 국가의 패권을 잡게되는 테베의 두 영웅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

스파르타를 제압하고 그리스 패권을 잡았지만 두 사람만으로 그 패권을 이어가기에는 테베라는 나라가 너무 작았고, 후계를 떠받들 인물이 없었다.

펠로피다스에 이어 에파미논다스가 사망한 기원전 362년 이후 시대를 저자는 이후 그리스에는 아무도 없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떠오르는 마케도니아(필리포스의 등장)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시대까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인 취급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변방의 고만고만한 나라에 불과했다.

이 신들이 등을 돌린 땅에 영웅이 등장하니 바로 필리포스다.

테베에 인질로 가 있던 필리포스는 아버지 사망 후 귀국하여 왕위쟁탈전을 치루고 23세에 마케도니아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테베에 있는 동안 테베는 두 영웅에 의해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필리포스는 테베의 군사개혁과 강국으로의 발전과정을 생생이 보고 배울수 있었다.

왕에 오른 필리포스는 군사개혁을 실시하여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밑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그 핵심은 첫째, 중무장 보병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농민층까지 확대하여 군사수를 확보하고

둘째, 팔랑크스라 불리는 6.5미터의 장창으로 무장한 밀집대형을 대형화 시킨다.

결국 남쪽으로 진격한 필리포스는 아테네를 비롯한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그리스의 지배자로 등극하나, 기원전 33646세의 나이로 암살당하고 만다.

 

영웅의 등장, 알렉산드로스

20세에 마케도니아 왕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13세부터 16세까지 스파르타식 군사교육과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교육을 받은 알렉산드로스는 약관의 나이였으나 리더십과 권위에 있어 왕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벌에서 중요한 3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어린시절부터 친구이자 눈빛만으로 통하는 헤파이스티온, 원정 중 헤파이스티온의 사망으로 알렉산드로스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둘째 전장에서 목숨을 맡기고 누볐던 애마 부케팔로스

셋째 어려서부터 스파르타 교육을 같이 받던 동료 집단

 

21세에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한다.

이 출발은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땅을 밟는 마지막이 된다.

32세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빌론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오늘날 지구본을 돌려보며,

그가 정복해 나간 지역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입이 벌어진다.

2400여 년전 그리스 동쪽 지역으로부터 오늘날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 파키스탄과 인도의 북부까지의 광대한 지역이다.

인도 북부에서 병사들 파업이 없었다면 오늘날 배우게 될 그의 점령지역은 어땠을까 

더 이상 동쪽으로 진출하길 거부하는 병사들을 강제할 수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돌아 귀국길을 돌아오다,

서방원정을 앞두고 사망한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서방원정을 계속하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후계자 쟁탈전 속에 그의 가족(어머니,아내,아들)이 살해되는 사건과 측근들의 비극적 말로를 겪게 되며 그가 이룩한 제국은 크게 넷으로 분할하게 된다.

 

2400여 년전 시대와 오늘날의 나이 개념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21세에 시작해 32세까지 오늘날 시각으로 철부지 청년의 나이에 그가 이룩한 업적은 실제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무시하다.

알렉산드로스 이후 명장으로 꼽는 3인 한니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카이사르도 나이로나 업적으로나 비교하기 힘들 정도다.

정벌기간 중에 일부 반란 사건이 있기도 했지만 어린나이의 왕에게 충성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낸 것에는 그만의 뛰어난 리더십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결정했지만 유연성을 겸비하였다.

항상 적은 군사수로 몇배의 적과 싸웠지만 다이아몬드 대형의 맨 앞에서 앞장섰고 군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때로는 같은 막사에 잠을 자며 함께 했다.

기본적으로는 그의 타고난 천재성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 천재성에 어릴 때부터의 스파르타식 군사교육을 이겨낸 인내심,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의 교육,

무엇보다 나이를 뛰어넘는 그의 위대한 리더십을 통한 역사적 업적이

어린 청년인 그에게 2400년이 지난 지금도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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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리스인 이야기3 평점10점 | l*****1 | 2018.09.30 리뷰제목
그리스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의 양대 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격전인 펠로폰네소스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30여 년 동안 지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육군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스파르타의 승리하고 아테네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100100여 년에 걸친 아테네의 민주 정치가 흔들리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30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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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의 양대 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격전인 펠로폰네소스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 30여 년 동안 지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육군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스파르타의 승리하고 아테네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100100여 년에 걸친 아테네의 민주 정치가 흔들리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30인의 정권과 과두 정권을 주시하며 아테네가 어떠한 정국을 맞이하게 될지도 매우 궁금하다. 이때 리더로서 활약했던 크리티아스는 철학자 플라톤의 외삼촌이었으며 아테네 명문가의 출신이었고,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혼란스러운 아테네에 과두 정권을 부활시키기 위해 동지들을 거느리고 귀국한 크리티아스는 과연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알려진 크리티아스, 철학에도 관심이 있었던 리더로 말미암아 결국 고배를 마시게 되는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500명 재판관 판결은 유죄 250, 무죄 230표였기에 벌금만 내면 모든 게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펼친 정공법의 변명을 들은 뒤에 이루어진 최종 판결에서 유죄 360, 무죄 140표로 큰 차이가 났기 때문에 사형이 결정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적당한 수준에서 정리하려고 생각했던 재판관들을 소크라테스가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중략)

360명은 왜 분노했을까? 나는 이 시기 아테네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조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순간에 소크라테스가 나타나 벌금형이나 망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바로 그 소크라테스에게 시민들은 반발했다. 초조해하는 자신과 달리 평온한 소크라테스에게 분노를 쏟아부었다. 그 결과가 큰 차이의 투표 수로 결정된 사형 판결이었다. 이런 상상 말고는 처음에 유죄를 선언한 사람이 250명이었다가 이튿날 360명으로 증가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도발적인 전술은 성공했다.

-p. 40~41

 

로마인 이야기로 알려진 이 책 그리스인 이야기 3」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인 저자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당대 역사적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두꺼운 책이지만 그리스의 역사에 흥미와 기대를 가지고 읽게 하는 책, 그리스인 이야기 1, 2권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저자를 따라 그리스인의 생각부터 인생, 정치와 문화, 사회, 외교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동서 융합을 이룬 세계화의 선구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거취를 흥미롭게 그려내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지 놀랍기 그지없다.

 

알렉산드로스는 달랐다. 스승이 말한 다음의 가르침에는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동등한 친구로 대해도 좋지만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즉 야만족)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다고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

페르시아로 갔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특히 이 가르침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은 태도를 취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읽고 느낀 개인적인 소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어쩔 수 없는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도시국가를 초월한 그리스인이었다.

아무튼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제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철학 자체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p. 223

 

저자는 다른 도서와는 달리 그리스의 쇠락에 대한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가 몰락해져 가는 과정에서 남기는 교훈은 무엇일까? 저자는 알렉산드로스라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인물의 유년시절부터 타고난 기질과 성격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단지 세계 역사 요약 부분에서 불과 몇 줄로 만났던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잘 짜인 다큐를 보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읽었던 그리스인 이야기 3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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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서평] 그리스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필생의 역작. 평점9점 | s*****m | 2018.09.20 리뷰제목
1.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3>입니다. 연대기로 구성된 시리즈인데 특별히 3편을 가져온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일 유용하고 재밌기 때문에. 그러니까 3편의 경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쇠락하는 시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페리클레스 이후의 시대까지를 다루게 됩니다. 얼마간 제 생각이지만 1부와 2부의 내용을 읽을 여유가 없다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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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3>입니다연대기로 구성된 시리즈인데 특별히 3편을 가져온 이유는 이렇습니다제일 유용하고 재밌기 때문에그러니까 3편의 경우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쇠락하는 시기에서 시작합니다그리고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페리클레스 이후의 시대까지를 다루게 됩니다얼마간 제 생각이지만 1부와 2부의 내용을 읽을 여유가 없다면 저는 3권만 독립적으로 읽는 것도 훌륭한 독법이라고 생각합니다많은 문학 작품들과 역사의 용례를 따질 때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원체 스토리가 생생한 시대기도 하니까요.

 

 

 

 

2.

 

저자의 경우 따로 설명이 필요하진 않겠지요. <로마인 이야기라는 희대의 밀리언셀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시오노 나나미니까요특히그 방대한 저술에 비해 시종 유려한 필체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지요. <그리스인 이야기의 경우 더욱 집요해진 사료추적과 컨텐츠가 돋보입니다게다가 상당히 깔끔해진 표지와수록된 지도를 비롯한 일러스트들의 퀄리티가 상당히 높아졌어요시오노 나나미의 저술의 경우가장 큰 장점은 역시 유려한 서술입니다서사가 눈에 선명하고 그 진행의 속도가 은근히 긴박한 구석이 있어요그 와중에 전문성을 잃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어서 상당히 넓은 범위의 독자층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3.

 

“ : 500명 재판관 판결은 유죄 250무죄 230표였기에 벌금만 내면 모든 게 끝날 수 있었다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펼친 정공법의 변명을 들은 뒤에 이루어진 최종 판결에서 유죄 360무죄 140표로 큰 차이가 났기 때문에 사형이 결정되었다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한마디로 말하면 적당한 수준에서 정리하려고 생각했던 재판관들을 소크라테스가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360명은 왜 분노했을까나는 이 시기 아테네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조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런 순간에 소크라테스가 나타나 벌금형이나 망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바로 그 소크라테스에게 시민들은 반발했다초조해하는 자신과 달리 평온한 소크라테스에게 분노를 쏟아부었다그 결과가 큰 차이의 투표수로 결정된 사형 판결이었다이런 상상 말고는 처음에 유죄를 선언한 사람이 250명이었다가 이튿날 360명으로 증가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도발적인 전술은 성공했다.

 

-본문 p50“

 

 

 

 

 

 

그러니까 적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이처럼 한편의 서사시를 완성해내는 저자입니다대부분의 페이지에 걸쳐서 상당히 분류가 잘 되어 있고 내용도 재밌어요문명의 중심이었던 그리스가 몰락하는 과정을 수려하게 담아내어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를 예단하고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을 제시한달까요중세시대를 돌아보는 미시사로는 손색이 없을 뿐더러현대를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교양서로서 큰 함의를 가지는 멋진 책입니다자신있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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