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되는 1편 「學而」에서부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不知言 無以知人也)" 인간 진면목을 말하는 20편 「堯曰」로 맺는 인(仁)과 예(禮)의 덕목을 중심으로하는 '사람 됨과 정치 정도(正道)'에 대한 공자(公子)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무릇 대부, 제후, 임금들과의 대화록이다.
이 번역 판본은 '한당(漢唐) 대에 나온 고주(古注)인 《논어주소(論語注疎)》를 저본'으로 하였다고 역자 오세진은 밝히고 있다. 걸출한 논어 주석서들이 무수히 써졌으며, 우리 국내에는 12세기 주희(朱憙)가 쓴 《논어집주(論漁集註)》인 신주(新注)를 저본으로 한 판본이 다수인 모양이다. 아마 다양한 해석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역자의 노고였던 듯하다.
이러한 해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논어(論語)』는 지극히 정제되고 함축적인 문장일 뿐아니라 어떤 일관된 논리적 순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깊은 함의를 헤아리는 문전에서 돌아서기 일쑤였다. 당대의 상황에 대한 이해도 일천하며, 내적 성장도 충분치 못했기에 지식에 머물러 진정한 앎, 삶에의 실천적 지혜로 체화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 읽기에서 모든 문장에 감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 삶의 인식 범위를 비롯한 관심 현안에 대한 이해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1. 인(仁)과 예(禮)의 서(書)
20편을 구성하고 있는 매 문장들은 인간들 사이의 가장 조화롭고 안정된 관계을 함축하고 있는 인(仁)과 이에따라 수반되는 행위에 대한 규범적 자질로서 예(禮)를 기저로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3편 「이인(里仁)」 2장, "인한 사람은 인을 평안히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인자안인(仁者安仁) 지자리인(知者利仁)"에서와 같이 비유적으로 개념을 설명하고 있기도 하지만 12편 「안연(顔淵)」 1장, 자기 몸을 규율하고 예로 돌아가면 인이 된다는 그 유명한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처럼 직접의 개념 설명으로 그 본질의 실천 가르침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다.
2편 「위정(爲政)」 5장에는 위배되지않게 행동하는 것, 즉 무위(無違)를 통해 예(禮)는 단순히 인간들 약속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인간사회에 적용한 것이므로, 예에 어긋나지 않은 것은 자연의 이치대로 부모를 모시는 것이라며 효(孝)의 본례를 알려주기도 한다. 學而 13장의 공근어례(恭近於禮)는 예가 공손함에서 어떻게 기능하는 것인지를 살필 수 있게하는데, 자칫 비굴함이나 치욕이 되지 않기 위해 예가 기본으로 작동하여야 함을 깨우치게 한다.
이 때의 예는 인간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도덕적 욕구를 충실히 따르는 것, 이를테면 스피노자가 겸허를 말하며 자기만족(자기애)이라 부르는 그 자연 본연의 욕구를 존중하는 기반위에서만 비굴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 것과 그 이해를 같이하는 것만 같다. 예는 삶을 형식과 규범으로 얽어매는 굴레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거닐어야 하는 도리가 된다. 우리네는 관혼상제(冠婚喪祭)라하여 이제는 사라진 성인의식에서부터 혼례, 장례, 제례등의 예가 치루어지고 있다. 지나치게 엄격한 규범으로 예의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현대적 삶의 굴레로 속박이 되기도 한다. 주희(朱熹)는 인(仁)이란 천리지절문(天理之節文)이라 하여 자연의 이치가 구체적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며,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중용(中庸)을 알아차릴 일이다.
8편 「태백(太伯)」 2장에는 용이무례즉난(勇而無禮則亂)이라 "용감하되 예가 없으면 (반란을 일으키고)질서를 어지럽히고..."하는 문장이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부류의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만 같다. 너도나도 자기 목소리를 크게하고 그것만이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다. 공자의 말처럼 예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1장과 12장에는 마치 오늘 한국인들에게 들려주려했던 것처럼 교만과 인색, 부정직과 무지와 불성실, 무능과 불신의한 인간에 대한 외면을 얘기한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부족한 사람에게 묻고, 많이 알아도 적게 아는 사람에게 묻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하고, 가득찼으면서도 빈 것처럼 하고, 남이 나에게 해를 가해도 보복하지 않는다. 옛날에 나의 친구가 이를 실천하였다. " - 태백(泰伯)편 5장 , 192쪽에서
이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공자가 이른 죽음을 그리 안타깝게 여기던 제자 안연(顔淵)으로 추정되는 태백(太伯) 5장에서 증자가 얘기하는 위 문장이 될 것 같다. 공자의 철학적 계승자로 불리는 증자(曾子)의 사상이 압축된 3~7장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구절들이다. 명쾌하고 설득력있는 문장으로 공자의 인예사상을 이해하는데 놓칠 수 없는 구절들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어쩌면 12편 「안연(顔淵)」은 인(仁)에 대한 본격적이고 집약적인 사상편이라 할 것이다. 일명 안회로 불리는 안연은 공자 사상의 실천가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던 인물같다. 그리하다보니 여기에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 등장하는데 사실 오늘 불평등과 계층화라는 불편함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선을 부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1장에 '臣臣 父父 子子'라 하여 게급과 신분적 고착화라는 명분을 높이 세운다. 이는 13편 「자로(子路)」 3장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必也正名乎! 반드시 온갖 명칭을 바로 잡을 것이다! "라며 계급 사회의 실질을 제대로 갖추겠다고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2500년전 청동기 시대, 분문열호(分門裂戶)하는 춘추전국 시대의 한 인물을 생각하며 도덕적 진리의 무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2. 열(說) 과 색(色)
최초의 『논어(論語)』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편집되었건 모든 주석서의 제 1편이 기쁘지 아니한가? 혹은 즐겁지 아니한가? (不易說乎)로 시작된다. 여기에 주목하게 되는 까닭은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인간 감정에 대한 언어가 중요성을 지니고 표현되고 있다는 측면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3부, 정리 11, 주석에 따르면 기본 감정으로 기쁨,슬픔,욕망 세 가지만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삶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긍정의 감정이야말로 자연의 이치임을 강조한다. 이들 철학자의 인간 삶의 활력성에 대한 이해의 일치는 인간 도덕율의 불변적, 근원적 요소처럼 여겨진다.
스피노자는 "기쁨이란 인간이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엇, 혹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충만감을 느낀다. 조금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며 삶의 풍요와 유쾌함을 느낀다. 이것이 도덕, 인간 삶의 질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學而」에 들어서면 7장에서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는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어진 이를 반기는데 색(女色)을 대하듯이 한다면 그것이 기쁨이지 않겠는가? 색(色)을 가히 좋아함, 즐거움의 덕으로 비유한 문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위령공(衛靈公)」편 12장에는 "덕(德)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자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면서 감정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 누군가에게 호색자라 칭하면 분명 발끈할 언어이다. 공자에게 색(色), 그 자체는 결코 부정의 언어가 아니다. 중용의 언어로써 여기에 무엇인가 덧칠해졌을 때 변화된 판단이 가해질 뿐이다. 자연의 이치,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한 감정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책을 좋아하고 푸르게 펼쳐진 녹색의 자연을 좋아하며 여인들의 우아한 몸짓을 좋아한다. 또한 벗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움으로 삶의 활력을 찾는다. 열과 색은 인과 예의 다른 시선일 것이다. 논어를 읽는 것은 이처럼 정돈되지 않은 길을 걷는 길인것 같다. 이 언저리 저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상황 마다에 맞추어 발설되는 현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름의 길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리라.
3. 관계(關係) 그리고 정치(政治)
「위정(爲政)」편 5장에는 자연의 이치에 위배되지 않게 행동하는 것, 무위(無違)를 말한다. 인간 사회라 무엇이 달라야 하겠는가? 한편 「이인(里仁)」편 22장에는 "옛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이는 행동이 따르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 했기 때문이다.(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라며 자신의 행동을 둘러 볼 것을 권한다. 말, 말, 말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분별 없는 이것들이 세상의 혼돈만을 더한다. 수치를 모르는 인간들이 넘실대고, 그 위배됨을 외려 자랑 삼는다. 한국 정치배들이야 늘 그래왔던 것 아니냐며 외면만 하기에는 그 부정성이 너무 위태롭다.
「선진(先進) 」편 19장의 "論篤是與 君子者乎? 色莊者乎? "하는 물음은 그대로 오늘 기회주의적 담론세계를 주도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픈 문장이다. "말하는 것이 미덥다해서 그를 인정해준다면 그가 군자다운 사람이라는 것이냐? 겉모습이 그럴듯한 사람이라는 것이냐? "
「계씨(季氏)」편 10장의 항시 생각할 9가지 군자의 표상이나, 「위정(爲政)」편 15장의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연히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문장은 오늘 우리네, 대중의 현실을 반성케 한다. 많은 석학들이 격변하는 오늘의 세계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부지불식(不知不識)중에 빠져들어가는 전체주의화된 인류 속박의 세계로의 이행에 대한 깨어남의 경광등은 대중의 사유를 촉구하고 있다. "시기소이(視基所以), 관기소유(觀基所由), 찰기소안(察基所安)", 이것은 보는 것의 세 가지 깊이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두 알았다고 그쳐서는 안된다. 동기와 의도를 살피고, 그리고 가장 밑바닥의 진상까지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편벽함은 무지이다. 게으름도 무지이다. 무능함도 무지이다. 편녕(便?)함에 속는 것도 무지이다. 줏대 없음도 무지이다. 사유해야한다, 그리고 실천해야한다.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얼굴빛을 꾸며 남이 자기를 좋아하게 하려는 사람중에는 인한 사람이 없다. (巧言令色 鮮矣仁) " - 양화(陽貨)편 15장, 403쪽에서
「옹야(瓮也)」편 25장에 "글을 아무리 널리 배워도 예로써 단속되지 않는다면 도리에 어긋나게" 된다고 했다. 절제 되지도, 자기 반성도 없는 거친 혐오와 조롱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 했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서(恕)'라고 한다. 인과 예는 구속적 형식이 아니다. 곧 배려이고 타자에 대한 이해이며, 존중과 겸허라는 삶의 이치이다. 한 마디로 평생할 것을 '서(恕)'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은 25세기가 지난 오늘에 그 의미가 더욱 살아서 다가온다.
『논어(論語)』 한자 원문은 200쪽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압축된 언어에 담겨있는 삶의 언어들은 오늘 수천 쪽에 달하는 빼어난 해설들로 살아나 인간 세계의 귀감이 되어주고 있다. 역자는 책이 상세해질수록 어려워지기에 쉬움과 상세함 사이의 균형을 택했다고 한다. 중간이란 그리 객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원문 해석과 한자의 사전적 주석을 넘어서는 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해설을 기대하면 지나친 욕심일까? 다만 고주(古注)를 저본으로 한 판본의 독자성을 열었다는 번역서의 다양성 측면에서 이 특별판의 간행에 대해 독자로서 깊은 고마움을 갖는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