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옆의자 / 무관심 연습 / 심아진 짧은 소설
다소 생소하게 다가온 '심아진'이란 작가의 이름만큼 '짧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호기심이 동했던 <무관심 연습>은 짧지만 묵직하고 강렬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소설이지만 에세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면서도 철학적인 사유가 담겨 있어 몇 장 되지 않는 분량임에도 한 편 한 편마다 '어쩌면 이야기를 이렇게 담아냈을까?' 여러 번 감탄하게 됐던 것 같다. 주저리주저리 읊조리며 분량만 차지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들을 다 쳐내고 짧으면서도 핵심만 임팩트 있게 담아 독자로 하여금 '헙'소리를 토해내게 만든다.
별생각 없이 펼쳤는데 이어지는 단편마다 '심아진'이란 작가의 매력에 퐁당 빠져들게 되는 짧은 소설 <무관심 연습>
이야기 속엔 음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끊어내고 싶은 각오가 들어있기도 하고 결혼한 배우자의 주변인들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결혼이란 제도 자체에 대한 현실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도토리를 갉아대는 습성 때문에 귀여운 캐릭터로 자리 잡은 설치류에 대한 오해는 그들이 갓 태어난 새끼 새를 잡아먹거나 도마뱀 따위를 잡아먹을 거라는 것을 알려 하지 않은 채 보고 싶은 것만 보며 판단하는 인간의 선입견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살면서 사과하는 것에 인간이 얼마나 인색한지, 그게 무어라고 자신의 자존심과 연결하여 결국은 쏟지 못할 응어리로 담아내는지, 어쩌면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슬픈 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었다.
살면서 경험하는 것, 느끼는 것, 타인을 보며 반성하는 것, 점점 고착화돼버리는 나 자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 부딪치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겪어내며 나 자신이 더 자라거나 더 피폐해짐을 느끼는 것......
이 모든 감정들을 이야기 속에서 느낄 수 있어 어느 소설 하나 공감되지 않는 게 없었고 짧은 글에 이토록 강렬한 통찰을 넣었다는 게, 이러한 문체가 퍽이나 감동적이라 소설마다 빗대어진 모순을 찾아내는 일 또한 즐겁게 다가왔던 것 같다.
누군가 짧은 소설은 필력이 미치지 못하는 글이라 깎아내렸던 글을 본 적이 있다.
짧은 소설들이 많아지는 사회에 대한, 작가들의 필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런 우려와 조바심은 넣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봤다.
장편소설을 즐겨 읽었었다. 단편소설은 왠지 미완성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다 썼겠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매 ‘촌철살인’이 빛을 발하는 소설집에 자꾸 손이 가는 것은 세상의 빠른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긴 소설을 조용히 사유하며 읽을 여유가 없다.
단편소설도 길다고 요즘은 스마트소설이라고 해서 그야말로 짧은 소설도 많이 나오는데 이 책은 그 짧은 소설의 정석같이 느껴진다. 서너 장의 분량 속에 반전이 있고 웃음이 있고, 감동이 있다.
제목이 무관심 연습이라기에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애를 발휘하는 내용인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하면 바깥을 보는 시선이 좀 더 깊고 냉철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만남, 어긋남, 얽힘, 열림, 던져짐. 다섯 가지로 분류된 책의 차례만 봐도 인생의 변화무쌍함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니, 순서라고 해야 되나. 만남 뒤에 오는 악연과 인연들, 용서와 망각, 혼자 남거나 사라지는.
<섬의 여우>의 ‘여자’는 뒤뜰에 나타난 여우의 밥을 챙겨주는 일이 중요한 일과인데 나중에는 그 일에 매우 골몰하게 된다.
자신이 여우를 못볼까봐가 아니라 여우가 자신을 못볼까봐 양치질도 주방에서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는 ‘여자’의 모습에서 도시에서 섬으로 떠나왔지만 여전히 완전한 고립을 원하지 않는 인간의 외로움을 보았다.
비록 저자는 위태한 상황의 ‘여자’를 살리는 것이 관심을 주고 돌봐주는 여우 한 마리면 충분하다는 의도였겠지만 그랬다면 여우의 밥만 챙겨줘도 되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여자’가 원한 것은 여우와 마주보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얼마간의 거리를 둘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부대끼면 문제가 생긴다. 선의의 거짓말도 하게 되고<두 자매>, 공포를 일으키기도 하고<낙차>,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개와 개>.
어느 정도의 무관심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유용하다는 것을 이 짧은 소설들이 말해주고 있다. 짧지만 내용만은 장편 못지않은 독서였다.
모두 28편의 아주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네요. 짧지만 선명하고 때로 반전도 담은 작품들이라서 전혀 안 지루하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섬의 여우>는 처음에 "여우"가 어떤 비유인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익숙한, 그러나 실제로 잘 보지는 못했을 그 동물 여우를 그대로 가리키더군요. 구름과 그 외에 다른 애들에게도 순위가 밀리는 해가 나와서 저 여우가 아마 여우비를 말하는 가보다 착각했었죠. 섬인데도 "여전히 일할 사람은 많다"고 하는데 거제도나 남해도쯤 되는 제법 큰 섬일까요? 이런 섬에서라면 나 한 사람 설 자리 정도야 없겠나 싶어도 결국은 실망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조금씩 포기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는 남는 장점"을 가진 게 섬이라고 합니다.
여우나 여자나 이 섬에서는 겉돌고 환영받지 못하는 게 닮았으며, 그래서 여자는 어린왕자처럼 여우를 길들이려 하지만 여우는 여우라서 (여우답지 않게 우둔하게) 여자하고 거리를 계속 두려 하네요. "간두지세에 이른 이"에게 백 가지 행운이 필요 없고, 그를 홀리는 한 마리 여우면 충분하다." 마치 불교 설화에서 벼랑 끝에 매달린 이에게 작은 산딸기 한 점이 구원을 베푼다는 그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크고작건 간에 인생은 사실 누구도 견딜 수 없는 고해이며, 우리는 우리를 홀릴 무엇인가가 필요한 건지. 여우가 아니라 해도 우리 주변에는 고양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여우 대용으로 홀릴 만하죠. 여기서 문제의 여우는 얼굴이 넓적하고 덩치가 크다는데, 우리 상식("여우같이 생긴" 어쩌구 할 때)과는 많이 다른 외모인가 봅니다. 하긴 동료들을 제압하려면 간사한 재치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떤 완력이 필요하죠. 이 여우는 저 뒤(p110). <두 자매>에서 나이 지긋한 곽 여사와 그의 언니한테 다시 나타났다가(?), p161에서는 방생된 랍스터(<랍스터 도난 사건>)를 훔쳐 먹으며 까다로운 식감을 뽑냅니다(...).
<산책>. ATM 아래에 진을 친 노숙자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어째 어디서 본 듯 눈 앞에 그려집니다. 품에 안은 개는, 노숙자라든가, 혹은 시선을 마주하기 부담스러운 노인들을 적당히 외면하기에 좋은 핑계네요. 사실 소통을 하나 안 하나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니 모든 소통은 가식이고 피곤한 연극입니다. 이 노숙자는 저 뒤 <우연의 도시>에 나오는 개토끼(p65)와 사실 같은 사람 아닙니까? 아일랜드 더블린과 한국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읽던 이솝 우화는 매 꼭지마다 끝에 "교훈"을 요약해 둔 판이 있었는데 아마 숙제 같은 것 할 때 편하라고 그리 만들어 놨던 것 같습니다. 1992년에 출판된 로버트 짐러의 <패러독스 이솝 우화>도 본편 못지 않게 끝에 달아 놓은 한 마디가 비중이 큰 뭐 그런 형식이었는제. 이 단편집도 우리 독자들이 혹시 작가분 메시지를 놓칠까 염려가 되셨는지 "흐르는 말"이 꼭 붙어 있는데 흘려 들을 수 없고 자꾸 눈이 가더군요.
<한 사람>은 "한 사람은 결코 한 사람이 아니다. 무수한 사람이 깃든 한 사람과의 사투가 삶이다.(p33)"는 문장이 구태여 아니라도 아 그 말이구나 하는 느낌이 모든 독자한테 들지 싶습니다. 남편 안에는 시아버지, 시할아버지, 시증조, 또 그를 가르친 은사 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영혼을 만들며 들어앉아 있겠죠. 근데 여자는 왜 남편 안의 무수한 인간들은 버겁게 하나하나 만나면서, 자신의 네트워크는 의식하지 않을까요? 여자(아내)는 남편이 아니라 네트워크까지를 같이 대하지만, 이 힘겨운 싸움을 여자는 (자신 안에 깃든) 친정엄마나 자매의 도움 없이 혼자 치러내는 게 보통이라서일까요? 더미에 깔린 건 (그) 남편뿐이 아닌데도요. 자세한 걸 물어 보려면 저 뒤 p79에 나오는 "도끼에 꽃을 달면 도끼가 아닌가요?"라고 형사에게 반문하는 그 아내를 만나야 하겠습니다.
<감자와 나>의 화자는 마치 체홉의 단편에 나오는, 남 이야기는 신나게 하면서 정작 자신은 누군지 알 수 없(게 하)는 그런 1인칭 영혼 같았습니다. 본질은 그게 아니라면서 따지지 말라고도 합니다. p35에는 수학 문제가 하나 나오는데 "기본도 안 되는 문제"라는 그의 평가 전혀 "황당"하지 않고, 문제 푸는 요령만 익히면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그런 거죠. 생긴 건 아주 어렵게 보이지만.
풀었다는 사실을 숨기라고 하셨으나, 디스토마(p232)처럼 입이 근질근질해서 기어이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자, 이 그림에서 파랑 원이 왼쪽 직선에 접할 때 그 반지름의 길이가, 이 문제가 원하는 최솟값이 되며, 이 값은, 점(원점)과 직선(왼쪽 직선) 사이의 거리 공식을 갖고 숫자 대입을 통해 기계적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답은 9/5가 되죠.
검색을 통해 내가 원하는 정보는 뻔한게 그거 하나 얻어 내려고 주인의 쓸데없는 주절거림까지 먼저 읽어 줘야 하는 데서 오는 짜증. "본질"은 그게 아닌데도, 안물안궁인데도 말이죠. 정작 필요한 정보는 흐릿하게 제시된 통에 애먼 손까지 다치고. 다 이게 본질에 집중하지 않는 비효율과 산만함의 폐단입니다. 본질은 사실 성공적인 감자채볶음도 아니고, 내가 손수 뭘 해봤다는 그 체험이라고 위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전>은 알고보니 반전이 있죠. (내용 누설 유의하세요) 빌라 입주자 모두가 싫어하던 "그 녀석"은 알고 보니 나였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친절하지 않았으면 그걸 핑계로 한 끼 정도 건너뛰고 흡입 칼로리를 줄일 수 있었겠는데... 그러나 만약 불친절했으면 그걸 또 핑계로 다른 가게에서 뭘 시켜도 시키고 쓰레기를 엄청 배출했을 테고. 결국 결전은 매번 패배이며,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이웃들을 다 끌어모아도 가망이 애초에 없었던...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 비빔밥은 솔직히 참기름맛으로 그간 먹어 왔던 거 아닌가. 마치 저 앞에서 "내"가 현실이 아닌 여우에게 홀려 힘든 삶을 버텨내듯 말입니다. 여우인지 뭔지도 사실은 모르는 거죠. 고양이인데 그냥 여우라고 여기고, 비빔밥은 밥과 채소 맛으로 먹는다고 스스로에게 우기고...
<징후>에서 진은 쿨한 여자네요. 미리 차근차근 징후를 충분히 고지하고 이별을 단행하는. 공정하고 깔끔합니다. 이렇게 절차를 잘 밟아 이뤄지는 이별이라 해도 언제나 갑작스럽습니다. 물론 그리 여기는 사람(남자) 잘못입니다. 전혀 천사 같지 않고 토하고 먹고 깨고를 반복하는 남의 아기, 멍청한 부하 직원.... 알고 보니 이런 것도 진이 아닌, 누군가(?)가 알려 준 징후.....였을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유 없이(p95) 울지는 않습니다. 다 알고 보면 이유가 있었다는. 호모 라크리모수스라는 명명이 그래서 타당하네요(p144).
<천사의 벌>. 어른이 되어 갈수록 속에 들어온 천사는 목소리가 낮아지고 아이는 자기의 에고와 육신을 만들어 갑니다. 왜 3번 교향곡이, 하늘로 돌아온 천사한테 고문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좀 뜬금없는 소리를 하자면 나폴레옹의 한자식 표기가 "나팔륜"이기도 합니다.
<그저 우연일 뿐이겠는가?>에는 많은 한자성어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굴곡지고 비루한 삶을 살아가려면 여러 개념어를 고안해서 자신을 전술적으로 기만할 필요가 있을 텐데 현학적인 간디스토마들도 우리와 별 다를 바가 없나 봅니다. 남의 (더러운) 내장 속도 보기에 따라 가시광선의 시중을 받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될 수 있겠죠? 이 지구도 알고 보면 누구 창자의, 항문의 한 구석일 수도.
<혁명>. "혁명"은 거대한 사기극입니다. 지켜 낸 이들이 결국 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아예 우리들이 적이었던 거죠. 인간 역사는 한 치도 진보한 적 없고, 다만 디스토마의 입김이 번잡한 거짓말을 만들어 냈을 뿐입니다.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그냥 대변이고 토사물이죠. 명도 혁이도 다 지옥에 가야 합니다.
간혹 만나는 삽화가 묘하고 예쁘던데 책 뒤에 적힌 유지안이라는 분이 그 웹툰 작가인지 다른 예술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적이고 시니컬한 짧은 이야기들이 매우 유쾌했네요. 잘 모르면 그냥 웃기만 해도 결국 그게 남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