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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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

리뷰 총점 9.4 (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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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 >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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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엄마의 말뚝 - 박완서 평점9점 | c****s | 2021.10.12 리뷰제목
어렸을 때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아이들도 모두 없이 사는 처지라 가난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했다. 다들 그만그만하게 비슷했으므로...   그 무렵의 기억이 거의 사라졌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나 물품을 걷어 반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친구에게 전달하는 행사가 있었다. 가난을
리뷰제목

 

어렸을 때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아이들도 모두 없이 사는 처지라 가난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했다. 다들 그만그만하게 비슷했으므로...

 

그 무렵의 기억이 거의 사라졌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나 물품을 걷어 반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친구에게 전달하는 행사가 있었다. 가난을 겨루는 방법은 다름 아니라 집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서 학생들을 추리는 방식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아이가 영광의 '가장 가난한 학생'이 되어 불우이웃 돕기 물품을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선생님이 집에 티브이가 없는 사람 손을 들라고 하니 학급 인원의 반 정도가 추려지고, 그다음은 냉장고, 전화 등의 순서로 계속 좁혀나갔다. 나도 거의 대여섯 명이 최종 겨루는 단계까지 남을 수 있었고 옆 친구보다 조금만 더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불우이웃 돕기 물품'은 나의 차지가 되는 거였다. 나는 설레고 긴장되었다.

 

나는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탈락했는데, '엄마와 아빠가 둘 다 일하는 가정'을 물었을 때였다. 사실 그때 아버지의 벌이가 여의치 않아, 어머니도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날품을 팔던 때였다. 선생님의 물음에 외벌이를 선택할 수도 있고, 맞벌이도 반은 맞는 말이었다. 나는 사실관계의 정확성을 따지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겨 물품을 집에 가져가고 싶은 욕망이 앞섰다. 어떻게든 가난함을 증명해 보이는 답을 선택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외벌이'를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최종 단계에 오르지 못하고 탈락했다. 어린아이의 셈법으로는 혼자 버는 집은 당연히 둘이 버는 집보다 수입이 적으니 가난을 경쟁하는 최종 후보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가난 겨루기 대회에서 탈락하게 되었고, 하교 후 어머니께 '불우이웃'이 거의 될 뻔했다고 무용담처럼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가난은 정 반대로 나를 공격했다. 나는 갑자기 가난이 창피하고 감추고 싶은 치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빈한하게 사는 모습을 친구에게 보이기 싫어서 사는 곳을 감추기도 했고, 가난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도 여럿 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조사하는 목록에는 왜 그리 적기 싫은 항목들이 많았던지...

 

세상에는 감추기 어려운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재채기, 사랑, 가난이다. 아마 내가 창피하고 부끄러워했던 가난을 나는 성공적으로 숨겼다고 생각했으나 꼭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적어도 지금 내 기억과 마음속에 어떤 흔적과 상처를 남겼으니, 가난을 숨길 수 없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세상에 누구도 가난으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그냥 가난에 반대할 뿐이다.

 

12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2 댓글 2
종이책 구매 엄마의 말뚝 - 박완서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b**********3 | 2023.07.17 리뷰제목
엄마의 말뚝은 ‘아버지의 부재’로 시작된다. 도시에서 어렵게 두 자녀를 키우는 엄마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리에 장자인 아들을 내세울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엄마에게 박적골을 떠나는 동기가 되었다. 엄마는 남편의 병을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도시의 의술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부모님과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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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은 ‘아버지의 부재’로 시작된다. 도시에서 어렵게 두 자녀를 키우는 엄마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리에 장자인 아들을 내세울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엄마에게 박적골을 떠나는 동기가 되었다. 엄마는 남편의 병을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도시의 의술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부모님과 살고 있는 박적골을 떠나 친가가 있는 대처로 떠나게 된다. 서울에서 어렵게 살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이겨낸다. 박완서의 책을 일다 보면 식민지와, 6?25전쟁이 일어나고 어려웠던 시절을 엿볼 수 있어서 꼭 읽어야 된다고 생각이 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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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평점10점 | o*****s | 2020.03.25 리뷰제목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엄마의 말뚝 2」는 「엄마의 말뚝 1」에 서술된 이야기를 잇고 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 문안에 말뚝을 박은 어머니는 이제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박적골에서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는 다섯 남매를 둔 엄마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고, 아이는 엄마가 되었다. 이야기는 여든 살이 넘은 엄마가 눈길에서 넘어져 수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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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엄마의 말뚝 2」 

 

 

「엄마의 말뚝 2」는 「엄마의 말뚝 1」에 서술된 이야기를 잇고 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 문안에 말뚝을 박은 어머니는 이제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박적골에서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는 다섯 남매를 둔 엄마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고, 아이는 엄마가 되었다. 이야기는 여든 살이 넘은 엄마가 눈길에서 넘어져 수술을 받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예민한 촉감으로 집안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차리는 의 촉감 얘기가 앞에서 나오지만, 그것은 모녀 사이를 잇는 애틋한 정을 표현하는 매개일 뿐이다. ‘는 어머니에게 하나 남은 유일한 일촌이다. 오빠는 어떻게 됐느냐고? 6.25 때 죽었다. 아들은 엄마가 땅에 깊이 박은 말뚝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아들이 죽고 어머니와 딸은 살아남았다. 목숨이란 참으로 모진 것이다. 아들과 오빠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은데도, 문득 정신을 차리면 자신의 손으로 입속에 음식을 넣는 걸 확인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죽은 사람을 따라 죽지 않는 한, 산 사람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그게 삶이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아들을 잊은 것은 아니다. 수술을 한사코 거부하던 어머니는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남은 아들에 대한 기억으로 수술을 승낙한다. ‘산골이라는 약초에 대한 기억이다. ‘산골을 이야기하려면  엄마의 말뚝 1 에 나온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곳에서 가족들은 예년에 없이 혹독한 겨울을 보낸다. 추위도 추위지만,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날 며칠 계속되는 눈이 특히 문제였다. 충직한 물장수 김 서방도 자주 물을 걸렀다. 부족한 물이야 눈을 녹여 어떻게든 쓰면 됐지만, 정작 문제는 불을 피우는 데 쓰는 장작이었다. 어머니는 가늘게 패서 새끼로 한 아름씩 묶은 장작을 매일 한두 단씩 전차 종점이 있는 나무장까지 가서 사왔다. 오빠가 그 일을 맡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장차 큰일 할 사람이 이런 자잘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딱 잘라버렸다.

 

그예 일이 벌어졌다. 추위가 그악스럽게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장작단을 이고 눈길을 걷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다. 손목이 뒤틀렸다. 밤새 끙끙 앓던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평상시처럼 움직였다. 삯바느질만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기생집 삯바느질을 대던 노파를 불러 끝맺지 못한 바느질거리를 돌려보냈다. 노파가 부어오른 어머니 손목을 보고 장안의 용한 침쟁이들을 여럿 소개했지만, 어머니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노파가 부러진 뼈를 붙이는 데는 산골이 그만이라는 말을 혼잣말처럼 하고 돌아간 날, 오빠와 나는 노파의 집을 방문에 산골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노파의 말을 따라 둘은 눈구덩이를 뚫고 무악재 고개를 넘어 산골 굴에 당도한다. 흰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남자가 열흘 치 약을 주며 신령님께 정성을 들이면 약효가 더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오빠는 간절한 마음으로 신령님 영전에 절을 한다. 신령을 모시는 젊은 남자조차 감복할 정도다.

 

오빠의 마음에 감동한 어머니는 행복감에 들떠 매일매일 모래시계처럼 정확하게 약을 먹었고, 열흘 만에 완쾌를 선언했다. 손목은 여전히 비틀어진 채였지만, 열흘이 되던 날부터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 솜씨는 전과 다름없이 빼어났다. 이런 산골과 수술이 무슨 상관이냐고? ‘는 어머니에게 부러진 뼈에다 쇠붙이를 끼고 튼튼히 이어놓는 것이 수술이라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뼈를 붙이는 쇠붙이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눈 덮인 고개를 넘어 오빠가 구해온 산골을 떠올린다. 좁쌀보다 클까말까 한 반짝거리는 쇠붙이가 바로 산골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아직도 오빠는 종교였다.”는 말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어머니는 쇠붙이라는 말을 듣고는 죽은 오빠를 떠올린다. 오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머니는 한없이 행복해진다. 죽은 오빠가 아픈 어미를 생각해 수술을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죽은 아들을 여전히 인생의 말뚝으로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수술이 끝난 다음에 발생한다. 어머니가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도 잠깐 곁에서 눈을 붙였는데, 잠결에 나는 주변이 몹시 술렁이는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가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젓고 있다. 무작정 휘젓는 게 아니라 뭔가 신중하고 규칙적인 움직임이다. 얼결에 물으니 마른 빨래를 개어놓는 거란다. 어머니는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눈의 푸른 기가 한층 깊어져서 귀기(鬼氣)까지 감돈다. 간호원을 부른 사이, 푸른 귀기가 돌던 두 눈에 극단적인 공포가 서린다. 어머니는 그놈이 왔다고 외친다. 그놈이라니? ‘는 처음에 그놈을 저승사자로 생각한다. 저승사자를 보고 어머니가 저리 놀라는 거라고. 그런데 아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오라비를 숨겨야 한다고 외친 것이다. 죽은 오라비를 숨기라고? 어머니가 손으로 사방을 더듬더니 붕대 감긴 다리를 만지며 날카롭게 속삭인다. 가엾은 내 새끼 여기 있었구나. 꼼짝 말아. 다 내가 당할 테니.”(95)

 

어머니는 지금 죽은 아들을 떠올리고 있다. 아들이 죽은 그 시점에 어머니는 매여 있다. 어머니가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군관 동무, 군관 선생님, 우리 집엔 여자들만 산다니까요.”라고 말한다. 군관 동무는 북한군을 가리킨다. 6.25 때 죽은 오빠는 아마도 북한군과 연관되어 있는 모양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어머니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댄다. 내가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며 정신 좀 차리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어머니 입에서 안된다, 안돼. 이 노옴. 안돼. 너도 사람이냐? 이 노옴, 이 노옴.”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수술한 다리만 빼고 어머니의 온몸이 성난 파도처럼 출렁인다. 어머니는 안된다 이놈아!’라고 호통을 치다가는 이내 군관 동무를 부르며 아부를 떤다. 틀니를 뺀 상태로 어머니가 이를 가는 시늉을 내기까지 내며 다시 이 노옴을 외친다. 어머니는 이미 오빠가 죽은 그 시간으로 돌아가 있다. 가슴 깊이 파묻어 놓았던 오빠가 어머니의 의식을 뚫고 올라와, 어머니를 이도저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한 것 중엔 물론 어머니의 얼굴도 포함돼 있었다. 어머니는 늙어갈수록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건 드물고도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어머니가 말년에 믿게 된 부처님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부처님을 믿는 걸로 어머니가 당한 남다른 참척의 원한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닮은 곱고 자비롭고 천진한 얼굴로 늙어가셨다.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거기서 난 손자들을, 그의 짝들을, 거기서 난 증손자들을 딸과 외손자들을 사랑하며, 그러나 결코 집착하진 않으시며 행복하게 늙어가셨다. 누구보다도 화평하게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거의 황홀하리만큼 아름답게 늙으신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저분이야말로 참으로 보살(菩薩)이라고 숙연해지곤 했다. (98~99)

 

어머니는 아들이라는 말뚝을 자신의 삶에서 뽑은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부처를 믿으면 믿을수록 죽은 아들은 더욱 더 어머니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다. ‘는 환각에 빠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비로소 어머니가 아들을 여전히 마음속 깊이 묻어 두고 있음을 알아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놓은 보살이 아니라 보살인 척 행동한 셈이다. 본마음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을 보았다. 어머니는 아마도 이것만이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죽은 아들을 그리워한다고 아들이 살아 돌아올 리는 없다. 괜히 살아 있는 사람들 마음만 처연해질 따름이다. 이성으로 갈무리한 이 마음은 그러나 이성이 제 역할을 못할 때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엄청난 힘으로 마음속에 깊이 숨었던 분노를 표출한다. 아들을 죽인 군관 동무가 표적이지만, 어머니가 분노하는 대상은 그 너머를 향한다.

 

6.25가 터진 해에 가족들은 현저동을 벗어나 중산층이 모인 점잖은 동네에서 살았다. 오빠는 해방 후 한때나마 좌익운동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적이 있다. 그 때문에 오빠는 남하를 못하고 적 치하의 서울에 남은 걸 극도로 불안해했다. 권력자들은 이미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남기고 한강 다리도 끊은 채 도망친 상황이었다. 국민들을 적 치하에 팽개치고 도망친 정부에 대한 원망을 키우며 오빠는 날로 정신이 망가져 갔다. 그런 오빠를 이웃이 고발했다. 인민군에게 끌려간 오빠는 인민 총궐기대회에서 제일 먼저 의용군에 지원했다. 오빠 덕에 남은 식구들은 적 치하에서 보리밥이나마 배 불리 먹으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석 달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이웃들이 이번에는 빨갱이 집이라고 고발을 했다. 청년당원들이 몽둥이와 총을 들고 달려들어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머니는 다시 전세가 기울어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의용군에 끌려간 아들을 기다린다. 어머니에겐 아들이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지 빨갱이냐 흰둥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102)라는 진술에 세상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자꾸만 아들을 빨갱이나 흰둥이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빨갱이가 가면 흰둥이들이 난리를 치고, 흰둥이가 가면 빨갱이들이 난리를 친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빨갱이도, 흰둥이도 아니다. 그저 아들이다. 오빠는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은 완전히 망가진 채로였다. 오빠 머릿속에는 오로지 빨갱이를 피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피난을 가려면 시민증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오빠가 어떻게 경찰서에 가서 시민증을 얻겠는가. 이웃 두 명이 오빠 보증을 서면 되지만, 어머니가 아무리 애원을 해도 이웃들은 냉담하기만 하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난 가족들은 예전 살던 현저동 산꼭대기에 숨어 지내기로 한다.

 

동네는 텅 비어 있다. 가족들은 우물이 있는 집을 골라 들어간다. 며칠 동안 사람이라곤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빠는 조금씩 정신을 차릴 기미를 보였다. 남쪽 친정에 가서 몸을 푼 아내와 아들을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은 결국 인민군들에게 발각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고 인민군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을 본 어머니 첫말이 이 집에는 여자들만 산다는 말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인민군 군관은 오빠는 뭐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대뜸 병신자식이라고 말한다. 인민군들은 틈만 나면 가족들이 사는 집으로 온다. 그때마다 군관은 오빠를 보며 국방군인지 아닌지를 따진다. 또 다시 전세가 바뀌어 인민군이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 어느 날, 군관이 사실을 밝히라며 오빠 다리를 향해 총을 쏜다. 어머니가 짐승 같은 소리로 이노옴!’을 외쳐도 소용없다. 군관은 사실을 말하라며 오빠 다리에 서너 발의 총을 쏴댔다. 총상은 치명상이 아니었는데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오빠는 며칠 만에 죽었다.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개풍군 땅은 우리 가족의 선영이 있는 땅이었지만 선영에 못 묻히는 한()을 그런 방법으로 풀고 있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111)

 

어머니는 서울이 수복되고 화장장이 정상화되자마자 무악재 고개 너머 벌판에 가매장한 오빠를 화장했다. 며느리가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뜻은 완강했다. 한 줌의 가루가 된 오빠를 어머니는 개풍군이 보이는 바닷가에 서서 바람에 훨훨 날려버렸다. 개풍군은 선영이 있는 땅이다. 한 맺혀 죽은 아들을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일까? ‘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재로 남은 아들을 바람에 날리는 어머니 모습에서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인 모습을 본다. 아들을 죽인 빨갱이와 싸우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이 소설은 반공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은 이데올로기 너머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分斷)이란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111)라는 진술에 나타나는 대로, 작가는 분단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려는 어머니의 당찬 모습을 그리고 있다.

 

분단이란 괴물은 이데올로기다. 우익을 신봉한 남한과 좌익을 신봉한 북한은 이데올로기 싸움을 벌였고, 그것은 6.25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에게 이데올로기는 천금 같은 아들을 빼앗아 간 괴물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아들처럼 장례를 치르라고 에게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괴물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천명한 것이다. 오빠를 그렇게 보낸 는 기가 막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런 일을 해야 하다니. 그후 삼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그 괴물을 무화(無化)시키는 길은 정녕 그 짓밖에 없는가?”(111)라고 는 한탄한다. 분단이라는 괴물은 지금도 우리를 옥죄고 있다. 누군가는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호의호식하는 도구로 삼는다. 누군가에게는 한없는 비극이 누군가에게는 돈을 모으는 수단이 된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빨갱이흰둥이로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한다. 무엇이 빨갱이이고, 무엇이 흰둥이일까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을까?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왜 도리어 사람들을 죽이는가? 이데올로기에 새겨진 지나친 욕망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욕망을 이상(理想)’으로 바꾸어 부른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를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데올로기를 모르는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백성들은 어차피 개돼지가 아닌가. 어머니는 아들을 개돼지로 만든 이데올로기를 향해, 그 이데올로기로 이상을 꿈꾼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인 만든 분단이라는 괴물을 향해 홀로 맞서려고 한다. 물론 어머니 혼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괴물과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고? 그것만이 인간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말뚝을 잃은 엄마는 스스로 말뚝이 되어 험난한 세월과 맞선다. 분단된 국가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양쪽으로 갈라 다른 쪽을 증오하게 만든다. 울타리 밖에는 무서운 적들이 있다. 울타리 밖에 있는 무서운 적을 이기려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야 한다. 민주니, 자유니 하는 것들은 무서운 적을 이겨낸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 국민들이여,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라고 권력자들은 소리친다. 그래야 국가가 국민을 지켜줄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까지 외워댄다. 죽은 자식을 마음 깊이 묻은 어머니는 이제 아들이 간 길을 또 다시 가려고 한다. 분단이라는 괴물이 여전히 이 사회를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은 이 땅 깊이 말뚝을 박은 사람들을 뿌리 채 뽑아 저 멀리로 내쳤다. 권력을 쥔 사람들만이 분단의 비극에서 자유로울 뿐이다. 서민들은 아직도 분단의 고통 속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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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그야말로 '엄마의 말뚝'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i****a | 2022.08.30 리뷰제목
너무 흥행한다 싶은 영화는 왠지 집단적인 분위기에 편승하는 게 꺼려져서 일부러 보지 않듯이 박완서라는 이름도 너무 많이 들어와서 그의 글을 읽지 않는 고집을 유지해 왔었다. 단지 거대한 명성만으로 편견을 심을 수 있다는 게 나의 단점인데 이 소설을 읽게 만든 사람 또한 내 편견이 깃든 인물들이다. 조금 결이 다른, 무슨 글을 쓰시든 내가 허그의 자세를 잡게 만드시는, 그야말
리뷰제목

너무 흥행한다 싶은 영화는 왠지 집단적인 분위기에 편승하는 게 꺼려져서 일부러 보지 않듯이 박완서라는 이름도 너무 많이 들어와서 그의 글을 읽지 않는 고집을 유지해 왔었다. 단지 거대한 명성만으로 편견을 심을 수 있다는 게 나의 단점인데 이 소설을 읽게 만든 사람 또한 내 편견이 깃든 인물들이다. 조금 결이 다른, 무슨 글을 쓰시든 내가 허그의 자세를 잡게 만드시는, 그야말로 편향된 사심으로 바라보는 분들이지만. (유시민 작가, 박민정 작가)

단지 세 편의 연작으로 구성된 <엄마의 말뚝>을 읽기 위해 이 책을 구입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속했었던 6.25 즈음에 읽으려던 계획이었으나 여섯 편의 다른 단편도 수록된 600페이지 가까운 두께에 주눅 들어 한동안 주춤거리다가 여름의 끝에서야 품에 안았다. 소설을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아직 풍부하게 남은 미개척 용지들이 오히려 안도감을 줄 정도로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들이 모두 의미 있었고 어디서도 보지 못할 귀한 문장들로 가득했다.

<엄마의 말뚝>은 여러 분야에서 교안처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한 시대상이 담겨 있지만 나는 이 소설이 교과서에 실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미 어딘가에 실렸으려나...). 문학의 마음으로, 우연히 들여다본 찰나에, 뜻밖의 정신적 충격을 받는 소설로 남기를 바란다. 놀라고 당황해야 이 소설을 읽은 것이다. 내가 한글을 알고, 한국의 역사와 정서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해지게 만드는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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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우리가 잃어버렸던 이야기 /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평점9점 | j*******4 | 2013.02.13 리뷰제목
한 번은 친구가 물었습니다. "박완서를 읽는 재미가 뭐냐?"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니가 재미 없어하는 그 부분 때문일 거다." 박완서. 이 분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고민이 앞섭니다. 한국문학의 고전인 분 - 그래서 사람들이 꺼리는 분, 우리의 옛 말을 온전히 글 속에서 살리신 분 - 그래서 사람들이 안 읽는 분. 이 분은 철저히 '인간'에 대해 쓰셨고 골수까지 관통하는
리뷰제목

한 번은 친구가 물었습니다.

"박완서를 읽는 재미가 뭐냐?"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니가 재미 없어하는 그 부분 때문일 거다."

박완서. 이 분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고민이 앞섭니다. 한국문학의 고전인 분 - 그래서 사람들이 꺼리는 분, 우리의 옛 말을 온전히 글 속에서 살리신 분 - 그래서 사람들이 안 읽는 분. 이 분은 철저히 '인간'에 대해 쓰셨고 골수까지 관통하는 묘사로 인간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리셨습니다. 그래서 박완서씨의 책을 읽을 때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요. 그러나 조금은 가볍게 느낄 수 있도록 제가 느낀 박완서의 중독성에 대해 밝히고자 합니다.

 

 

이 사람 은근짜일세

절체절명의 순간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에 관통당하는 것이 삶 아니겠습니까. 눈 앞에서 자식이 총질을 당하는 걸 목격한 엄마의 참척의 원한<엄마의 말뚝2>,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시엄마가 보는 가운데 낙태를 한 여인의 끈질긴 죄의식<꿈꾸는 인큐베이터>, 전쟁 때 성폭행을 당해 낙태를 한 여인이 소파전문 의사로 30년을 살아낸 삶처럼<그 가을의 사흘 동안>. 사건들을 똑 떼어 그 부분만 두고 본다면 엽기적인 운명이지만 사람들은 인생의 여러 양념으로 버무려 그것조차 인생의 양념인양 여깁니다. 사건이 세월의 한 부분이 되고 인생이 되어 그것을 멀리서 내려다 본다면 한 '인간'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죠.

박완서씨의 글은 양념으로 버무리기 전의 인간을 파헤쳐 그 안에서 절대로 들추고 싶지 않은 자신과 마주하게 합니다. 마치 전이된 암 세포를 찾아내는 의사의 손길처럼 날카롭고 매정합니다. 주인공을 고문하여 그 안에 감춰진 터럭의 진실까지 토해내게 하는 수법이지요. 그 수법 앞에선 직업이나 성별, 귀천도 얄짤이 없습니다.

엄마의 말뚝에 실린 작품 중 하나인 <유실>에서는 당뇨병 말기의 중년남자가 등장합니다. 몇 해를 걸쳐 식단과 운동, 인슐린으로 조절하여 정상수치로 몸을 회복합니다. 조금의 자유가 생기자 그는 허기를 느낍니다. 먹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본인이 절제했던 욕망의 허기입니다. 자신을 조그만 시험관처럼 빤한 존재로 여겼는데 자기도 모르는 그 허기가 만취된 무의식 중에 틈을 비집고 나와 여관방에서 발산되지요. 술이 깬 남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술에 취해 드디어 감추었던 모습을 드러낸 절제되지 않은 자신을 찾고자 여관방을 함께 썼던 미숙이란 여자를 찾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는 망설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이 안 나요? 내가 다 얘기해줄게요. 그 대신 그 이상은 절대 상대 안할 테니 그런 줄 알아요...(생략)... 그만 훌쩍훌쩍 울면서 현금 3백만 원만 있어도 하다못해 구멍가게라도 내서 이짓에서 발뺄 수 있겠노라고 했더니 영감님이 깜짝 놀라더군요. 단돈 3백만 원이 없어서 그 노릇을 하다니 말도 안된다면서 같이 눈물을 흘려 주시더군요. 그러고 나서 손자한테 천원짜리 세뱃돈 한 장 내주듯이 가볍게 그 수표를 내주셨어요. 정말이에요. (생략)"

창녀의 신세 한탄을 듣고 3백만 원을 쾌히 내놓았다니 점점 더 그답지 않았다. 그는 친척이나 친구의 어려움이나 불쌍한 이웃을 보고 주머니 끈을 만지작거리는 감상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살아왔다. 남에게 한푼도 신세진 일도 없거니와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베푼 일도 없었다.

그렇담 녀석의 짓이 틀림없으렸다. <유실> 175-176p

 

중년남자가 은근한 쾌락까지 느끼면서 찾고 있던 것이 '녀석'입니다. 평형감각을 잃고 화려하게 일탈한 자신이죠. 적당히 성공하고 퇴직연금까지 다 부어 준비된 노후를 맞이하는 남자에게 찾아 온 허무는 표면적으로 건강의 문제였지만 막상 들여다 보니 빠듯했던 평형감각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영혼은 일탈을 하고 싶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이상 감내할 수 있는 적정수준의 일탈은 창녀에게 3백 만원짜리 어음을 끊어준 선 까지였습니다. 누가 들으면 망신이지만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귀여운 가십거리입니다. 일탈에 성공한 '녀석'은 자신의 존재가 작은 시험관 속의 현상처럼 빤하지 않다는 무게감을 줍니다. 주인공인 중년남자를 막장까지 몰아 찾아낸 것은, 잃어버린 것을 스스로 응시하는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을 발견하기까지가 저자의 역할이었다면 그 후의 이야기가 주인공과 독자의 역할로 남습니다. 이러니 박완서씨가 어려워질 수 밖에요. 결국은 독자에게 짐을 떠안기지요. 잃어버린 것을 스스로 응시하는 너의 시선을 찾아봐. 박완서씨는 능구렁이같은 작가입니다.

 

 

아찔하고 황홀한 문학적 조우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작가는 작중 인물들의 심리 너머의 심리까지 포착해 냅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겠죠. 그러나 작품 안에서는 절대로 작가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칼날 같은 펜 끝으로 가차없이 해부에 들어가지요. 인간 심리에의 해부, 증거를 박멸하려는 인물들과 그 내면에서 상충되게 증거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한 개인의 갈등을 통해 그 실상을 들여다 보는 독자는 그래 인간이니까, 라고 연민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치부가 들춰진 것 같아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나에겐 지금 우리반 미납자 여덟 명의 납입금을 다 내주어도 남을 돈이 있다. 그 돈은 저 더러운 판자촌 사람들에겐 그렇게 큰 돈이 된다. 나에게도 큰 돈이다. 그러나 주는 쪽에선 그야말로 촌지였다. 나는 촌지를 크게 보람있게 쓰려고 하고 있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을 선뜻 정하지 못하고 있다. 뭐가 뒤꼭지를 잡아다니는 것처럼 망설이고 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일까? 그것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나의 소득을 분배해 줄 대상의 자격에 대한 내 나름의 불만이 더 컸다.

모든 장학금은 불우한 수재에게 주어지기를 꿈꾸는 것처럼 내가 간직하고 있는 촌지도 어느 틈에 그런 아니꼬운 꿈을 꾸도 있었나 보다.

그러나 수재까지는 못 바라더라도 최소한 총명한 눈동자, 배움에 대한 순수한 갈망과 만나지기를 꿈꾼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꿈을 찍는 사진사 314p>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이란 것의 기준이 되었던 너무 뒤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밖 의식, 그건 아직도 나의 의식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아직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엄마의 말뚝1 60p>

 

삼우날 다시 찾은 산소에서 나는 어머니의 성함이 한 개의 말뚝이 되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정식 비석은 달포쯤 있어야 된다고 했다. 말뚝에 적힌 한자로 된 어머니의 성함에 나는 빨려들듯이 이끌렸다. 어머니의 성함 중, 이름을 따로 뜻으로 읽어보긴 처음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닌 부드럽고 나직하게 속삭이며 아직도 내 의식 밑바닥에 응어리진 자책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딸아, 괜찮다 괜찮아. 그까짓 몸 아무데 누우면 어떠냐. 너희들이 마련해준 데가 곧 내 잠자리인 것을.

생전의 어머니는 깔끔한 대신 차가운 분이어서 한번도 그렇게 곰살궂게 군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생애만큼 먼 옛날의 작명이 나에게 그런 위무를 해주고 있었다. <엄마의 말뚝3 131p>

 

박완서는 왜 6.25 이야기만 하는 거야?

유년기의 성장 과정을 그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이어 <그 산이 어디에 있었을까><나목><엄마의 말뚝1,2,3>에 이르기까지 박완서씨는 6.25와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많이 삼았습니다. 단편들에도 이 소재는 빠지지 않아 가끔은 부분적으로 내용이 섞이는 것 같아질 때도 있습니다. 왜 지금 세대는 향유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해 자꾸 말했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올곳이 살아낸 치열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에겐 지나간 시대이나 그녀에겐 아직도 진행중인 시대인 것이죠. 전쟁의 상처와 원한, 후에 자식을 잃고 난 다음의 아픔을 작가는 문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작가가 펜을 들고 수술을 한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를 복원하는 작업도 문학적으로 분명 필요하지만, 어찌 보면 한반도는 늘 전쟁의 위험 속에 있기에 전쟁은 지나간 시대의 전유물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돈을 벌러 전국에서 상경하여 콩나물 시루처럼 미어터지도록 밀집해 사는 현대인의 생활도 전쟁으로 치환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가끔은 박완서씨의 소설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시대가 잘 그려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이 되었던 것은 전쟁이나 우리가 겪지 않은 시대의 외피를 입어도, 작품 속의 상황이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에서 주인공은 전쟁통에 겪은 일로 낙태를 했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산부인과 여의사로 또 다른 여인을 낙태시키면서 박해를 또다른 박해로써 갚으려는 보복의 쾌감을 맛봅니다. 30년간 미군부대 옆 자리를 지켰던 산부인과의 폐업을 앞 둔 마지막 사흘의 시간, 그녀는 많은 생명을 앗아간 손으로 생명을 받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지요. 사흘 째 되던 날 고모부에게 성폭행을 당해 잉태한 아이가 산부인과를 찾아옵니다. 원치 않는 아기를 가진 생지옥을 아는 주인공은 소녀를 도와 아기를 처리해 줄 것을 승낙합니다. 8개월밖에 안 된 아기를 꺼내기 위해 소녀에게 촉진제를 놓아 출산토록 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아기를 죽이지 못합니다.

 

소녀의 미숙아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내가 모르게 미숙아에게 베푼 건 완벽하고 따뜻한 신생아 취급이었다. 배꼽처리도 잘돼 있었고 기저귀까지 차고 있었다. 

아아, 이제부터 나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겠다. 나는 아기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기르고 사랑할 수 있는 아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살아 있는 아기를 내 손으로 받아보고 싶단 소망도 실은 아기에 대한 욕심이 쓰고 있는 가면에 불과했다. 나는 나의 정직한 소망이 모든 억압과 가면을 박차고 생명력처럼 억세게 분출하는 걸 느꼈다. 

나는 가냘픈 기성을 지르는 아기를 품에다 품고 미친년처럼 계단을 뛰어내려 문을 박찼다... 큰 병원, 인큐베이터가 있는 큰 병원...,  <그 가을의 사흘 동안> 275p

 

미숙아는 주인공의 품에서 죽게 되고 주인공을 아기를 품에 품은 채 퇴직 후에 기거하려고 마련한 새 집으로 갑니다. 새 집의 양지바른 땅에 아기를 뭍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책 <엄마의 말뚝>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대게 여성으로서 극적인 한을 품고 있습니다. 화자가 남성일 경우 내면의 갈등 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여러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자신의 내면과 마주친 순간 그들의 삶은 폭로되고 또 복원됩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제스처는 독자들을 향해 책임 의식을 느끼게 할지도 모릅니다. 본인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고 말이죠.

독자의 감동이 본인의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작품에 빠져들면서 향유하는 감동을 통해 현재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현재성은 작품의 배경을 뛰어 넘습니다. 박완서씨의 작품이 가지는 특이한 중독성이겠지요. 한 번 발을 들이시면 헤어나지 못하실 것입니다. 저는 기어이 절판된 박완서 전집(세계사2판)을 다 모으고야 말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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