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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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리뷰 총점 8.9 (5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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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 >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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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단어의 집》 순간을 영원으로 붙드는 마법!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r*******n | 2021.12.14 리뷰제목
나의 책 읽기는 매번 이런 식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들을 붙들고 살다 보니 책이든 삶이든 페이지가 쉽게 넘어갈 리 없다. 소설을 읽을 땐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머무느라 방금 전까지 읽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오늘은 소망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해 길항이라는 단어에까지 다다른 하루였으니 이를 생산적 난독이라 말해도 될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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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읽기는 매번 이런 식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들을 붙들고 살다 보니 책이든 삶이든 페이지가 쉽게 넘어갈 리 없다. 소설을 읽을 땐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머무느라 방금 전까지 읽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오늘은 소망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해 길항이라는 단어에까지 다다른 하루였으니 이를 생산적 난독이라 말해도 될까. 그래서 "까다로운 작은 소망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소설에 등장하느냐고? 내용이 무엇이냐고? 아무래도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p.18

 

한때 책을 읽으면 단어와 문장들을 노트에 따로 적어서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던 적이 있다. 요즘은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못하고 있지만, 독서의 목적이 '단어' 그 자체에 있는 편이라 안희연 시인처럼 늘 특정 페이지에 시선을 빼앗기곤 하는 편이다. 작품의 전개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표현에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고, 한 동안 그 페이지에서 시선을 못 떼는 경우가 종종 있는 나로서는 이 책에서 특히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안희연 시인은 스스로를 '단어 생활자'라 부른다. 이유는 단어가 그저 단어가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피와 살처럼 느껴질 때가 많고, 한 단어에 대해 말하는 일은 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떤 단어는 시간의 역할을 대신했고, 어떤 단어는 공간의 역할을 대신했다. 어떤 단어는 시인을 소용돌이처럼 휘감았고, 어떤 단어는 정수리에 번개처럼 내리 꽂히기도 했다. 단어로 이루어진 놀이터를 떠나고 싶지가 않다고 말하는 시인은 단어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 함께 단어를 골라보자고 손을 내민다.

 

 

탕종의 힘은 나날이 커져갔다. 놀랍거나 두렵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탕종, 탕종 하고 입 밖으로 되뇌는 것이다... 탕종이라는 말의 비밀스러운 느낌은 오래도록 내 곁에 남아 있다. 비록 단호박크림치즈 탕종식빵은 하루도 못 가 사라져버렸을지라도. 탕종, 탕종. 나는 단어 하나로도 나를 지킬 수 있다. 단어가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려 한 사람의 집이자 우주가 된다는 것. 참 따뜻한 움막이다. 뜻밖의 신비다.        p.163

 

안희연 시인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집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문장들 속에 숨어 있는 감정들이 공감도 되고, 삶과 슬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덕분에 시인이 쓰는 에세이는 어떤 모습일지 매우 궁금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역시나 수많은 단어들의 안팎을 살아가는 시인이기에, 여타의 가벼운 에세이들과는 뚜렷하게 달랐다. 포스트잇 플래그를 너무 많이 붙여서 책이 두툼해졌을 정도로,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가득했고, 오랜만에 노트를 꺼내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 말이다. 단어들을 꼭꼭 씹어서 먹고, 문장들을 제대로 외우고, 행간 사이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유추해 여운을 즐기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어들은 길항, 적산온도, 주악, 삽수, 버력, 피막, 유루, 내력벽, 선망선, 플뢰레, 벼락닫이, 밀코메다, 파밍, 기저선, 시드볼트 등등 분명히 한번 들어본 것 같은데 뜻을 모르겠거나, 대충 의미는 알겠는데 어쩐지 낯설다. 특히나 너무도 비문학적인 단어들에서 가장 문학적인 순간을 길어 올린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욱 흥미롭다. 대파 한 단 가격에 놀라고, 단추 하나 다는 값이 비싸 무거운 겨울 점퍼를 들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시인의 일상은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그 평범한 매일의 일상들 속에서 발견하는 '단어'들을 통해 바라보는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순간을 영원으로 붙드는 마법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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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평점8점 | 이달의 사락 n***8 | 2022.09.14 리뷰제목
책 제목 《단어의 집》을 봤을 때 사전이 생각났어요. 김소연 시인은 《마음 사전》을 쓰기도 했지요. 이 책 제목을 보고 그런 책인가 했는데,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시뿐 아니라 글쓰는 사람은 낱말을 자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그러지 못합니다. 따로 말을 정리하지도 않고 잘 적어두지도 않아요. 뭔가 떠오르거나 느낌이 와야 적을 텐데 그런 일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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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 《단어의 집》을 봤을 때 사전이 생각났어요. 김소연 시인은 《마음 사전》을 쓰기도 했지요. 이 책 제목을 보고 그런 책인가 했는데,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시뿐 아니라 글쓰는 사람은 낱말을 자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그러지 못합니다. 따로 말을 정리하지도 않고 잘 적어두지도 않아요. 뭔가 떠오르거나 느낌이 와야 적을 텐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가끔 찾아오기도 했는데, 이젠 그런 일은 없네요. 그걸 생각하니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이 책이 어떤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워요. 어떤 낱말을 생각하고 글을 썼는지, 쓰다 보니 그 낱말이 떠오른 건지. 둘 다일까요. 안희연은 아직 쓰지 못한 것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거 생각하니 부럽기도 하네요. 저는 언제나 쓸 게 없고, 언젠가 글이 될 것도 없습니다.

 

 마음이 안 좋을 때 저는 자거나 아무것도 안 해요. 여전히 그러는군요. 안희연은 음식을 만들더군요. 음식 만들기는 먹을 사람을 생각하고 마음을 담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안희연은 여름에 당근을 채썰어서 라페를 만든답니다. 라페는 이 책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음식 만들기도 집중해야 하고 그거 하나만 생각해야 하죠. 마음이 시끄러울 때 음식을 만들면 다른 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뜨개질도 만들기와 다르지 않겠습니다. 사람마다 마음 푸는 게 있으면 좋은 거죠. 저도 자기보다 다른 거 하는 게 나을 텐데. 기분이 안 좋아서 편지 못 쓰겠다 했는데, 막상 쓰니 기분이 좀 나아지더군요. 그것도 집중하고 다른 걸 생각해설지도. 손을 움직인 것도 있겠네요.

 

 여기에서 재미있는 말을 만났습니다. 가시손이에요. 자신이 손 대면 물건이 부서지거나 고장 난다고 하는 사람 있잖아요. 전자기계일 때가 많기는 한데. 그건 그 사람 손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때문일 텐데. 전자기계와 체질이 안 맞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보통 사람보다 몸에 뭔가 많아서(물?). 뭔가는 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시손은 북한 말인가요. 이건 때렸을 때 아픈 걸 말하는 것 같기도. 저는 평범합니다. 뭘 만졌을 때 부수지 않고 그대로 씁니다. 거기에선 영화 <가위손> 이야기를 했어요. 가위손을 가진 에드워드를 슬프게 보더군요. 저는 조금 거리를 두면 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도. 좋아한다고 해서 꼭 붙어 있어야 할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제가 이상한 건지. 에드워드는 가위손으로 나무를 손질하고 얼음으로 눈을 만들기도 하네요. 안희연은 가위손이 멋지게 되기도 한다고 말했어요. 가시손은.

 

 저도 힘이 들 때 뭔가 잘 안 될 때 떠올릴 말이 있으면 좋겠네요. 안희연은 탕종이라는 말을 떠올려요. 탕종은 빵을 만드는 기법에서 하나로 탕종 기법으로 만든 빵은 식감이 좋고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지고 손가락으로 꾹 눌러도 천천히 본래대로 돌아온답니다. 삶도 유연하고 회복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안희연은 독일에 사는 친구와 편지를 쓴대요. 한나라에 사는 사람한테 쓰는 편지도 잘 갈지 안 갈지 걱정되는데 다른 나라는 더 걱정될 것 같아요. 그건 그것대로 멋지겠습니다. 안희연 친구 이름은 한여름이었어요. 지금도 편지 쓰겠지요.

 

 살면서 이기는 때는 얼마나 될까요. 안희연이 친구한테 ‘오늘도 질 것 같아.’ (150쪽)하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친구는 ‘비긴 걸로 해라. 슬프니까.’ (154쪽) 했답니다. 삶에 이기면 좋겠지만 졌다고 늘 아쉬워하기보다 비겼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다. 사람이 산다고 하지만, 사람은 다 죽음으로 갑니다. 죽는 날까지 즐겁게 살아야죠. 그게 잘 되지 않지만. 글쓰는 사람만 세상을 잘 바라보고 비밀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닐 거예요. 누구든 세상을 잘 보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 하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겠지요. 그게 작다 해도 그냥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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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삶의 온도 평점10점 | p******0 | 2022.01.21 리뷰제목
독서가 일상이라고 하면 독서생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하루의 시작과 끝이 독서라는 얘기다. 어디 그뿐인가? 독서는 나의 현재인 동시에 미래를 비추는 얼굴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지 않는 게 문제의 실마리다. 현재를 조금이라도 낭비해서는 안 되며 무기력해서도 안 된다는 다짐.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빛은 독서의 작은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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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일상이라고 하면 독서생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하루의 시작과 끝이 독서라는 얘기다. 어디 그뿐인가? 독서는 나의 현재인 동시에 미래를 비추는 얼굴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지 않는 게 문제의 실마리다. 현재를 조금이라도 낭비해서는 안 되며 무기력해서도 안 된다는 다짐.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빛은 독서의 작은 불꽃에서 시작된다. 만약에 가슴 속에 작은 불꽃이 없었다면 일상은 얼마나 허무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싶다.

 

잠시, 독서에 대한 단상을 하게 된 까닭은 시인 안희연의 산문집『단어의 집』때문이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당연히 시생활자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시인은 ‘단어 생활자’라는 말을 꾹꾹 눌러 쓴다. 돌이켜보니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단어는 목숨을 요구할 만큼 치명적이다. 단어는 영혼이다. 단어에는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니 단어를 찾는 일은 운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상에 마주치는 단어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비문학적이다. 단어의 정체성을 따져보면 비문학적인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단어는 정확해야 하니까. 일찍이 마크 트웨인은 “정확한 단어와 거의 정확한 단어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라고 말했다. 번갯불에는 번갯불이라는 관념에 딱 맞는 정확한 표현이다. 번갯불을 나두고 굳이 반딧불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틀린 단어다.

 

단어의 집』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산다.

 

어떤 단어는 시간의 역할 대신했고 어떤 단어는 공간의 역할을 대신했어요. 어떤 단어는 기울기가 상당해 미끄러지기 좋았고 어떤 단어는 시소와 같이 혼자서는 탈 수가 없었죠, 어떤 단어는 저를 소옹돌이처럼 휘감았고 어떤 단어는 정수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혔고요.

 

시를 쓰는 시인에게 단어는 성냥갑 속의 성냥 같다. 피와 살이 되는 감정의 불꽃이 타오르며 어두운 세상을 좀 더 밝고 따뜻하게 헤아린다. 단어의 모양은 성냥처럼 단순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감수성은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럴 때 단어의 낡은 단순한 관념은 사라지고 삶의 온도를 느끼게 된다.

 

삶의 온도는 적산온도와 같다.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이 저절로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때가 되면 꽃이 피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한 ‘때’는 꽃의 입장에서 보면 ‘적산온도’이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은 꽃이 몸에 온도를 저금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저금한 온도가 가득차면 꽃망울이 터져 비로소 꽃이 피는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가? 살아가면서 얼마큼 시간을 저금했을까? 그렇게 해서 언제쯤 꽃망울을 터뜨릴 수 있을까? 사는 것은 기본적으로 쉽지 않다. 더구나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그럼에도 몸 안에 온도를 묵묵히 저금하는 사람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들 또한 실패와 좌절을 겪었을 텐데 어려운 과정을 참아낸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분명 삶의 지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들의 몸 안에 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꽃은 우리가 피어야 할 최선의 꽃이다. 삶의 온도는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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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단어의 집. 안희연 산문집. 한겨레출판 간행 4 평점10점 | s*****m | 2023.07.08 리뷰제목
다음에 답하시오. “선생님, 그런데 태풍이가 왜 우리 학교에 와요?”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태풍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이른 귀가 조치가 내려졌다. 선생님들은 마음이 분주했을 것이다. 학생들을 배웅하고, 교실 뒷정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초등학교 1학년 학생 한 명이 갑자기 교실로 되돌아와서는 집에 가기 싫다는 표정으로 선생님께 되물었단다.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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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답하시오. “선생님, 그런데 태풍이가 왜 우리 학교에 와요?”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태풍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이른 귀가 조치가 내려졌다. 선생님들은 마음이 분주했을 것이다. 학생들을 배웅하고, 교실 뒷정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초등학교 1학년 학생 한 명이 갑자기 교실로 되돌아와서는 집에 가기 싫다는 표정으로 선생님께 되물었단다. ”선생님, 그런데 태풍이가 왜 우리 학교에 와요?”” 시인은 오지선다형 문제의 4가지 보기를 적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섯 번째 보기를 작성하라고 권한다. 자신이 작성한 보기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에 대한 이해, 감정, 습관과 한계,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게 될 보기를 작성하는 것이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쓰기로 한다.

 

  태풍이는 우리가 보고 싶어 온단다. 너무 보고 싶어 달려와. 천천히 오라고, 천천히 와도 된다고, 그래도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우리가 너무 보고 싶어 달려온단다. 너도 뛰고 달리면 바람이 만들어지고 머리카락도 날리고 그러잖아. 태풍이가 달려오면 바람도 생기고 땀도 나서 그게 비가 되는 거야. 우리는 태풍이가 달려오면서 만든 바람과 비 때문에 태풍이를 피하는 거야. 아무리 말을 해도 태풍이가 말을 듣지 않으니, 우리도 태풍이를 오해하는 거지. 태풍이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보고 싶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화를 내려고 그러는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태풍이가 오면 피하는 거야. 그런데 태풍이와 우리가 대화를 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전하려고 해도 서로 보고 듣는 이야기가 달라서 쉽지 않아. 너도 친구들과 간혹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듣거나 오히려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 않니? 친구 집에서 놀고 싶은데 엄마가 “그런 친구와 놀지 마” “학원에 가야 하니 안 돼”라고 하실 때가 있어 답답한 적 없니? 태풍이와 얘기하고 싶은데도 잘 안 되는 것도 그래서 그래. 그러니 다음에 태풍이하고 얘기를 잘하게 되면 안 그래도 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으니 너도 일찍 집에 가는 거야. 조심해서 가거라.

 

  아이는 태풍이랑 이야기를 할 꿈을 가지게 되고 커서 기상학자가 되어 태풍이와 대화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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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단어의 집. 안희연 산문집. 한겨레출판 간행 3 평점10점 | s*****m | 2023.07.08 리뷰제목
시드볼트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다.     시드볼트란 씨앗(seed)을 저장하는 금고(vault)입니다. 기후 변화나 핵전쟁 등 지구 차원의 대재난에 대비해 식물의 멸종을 막고자 마련된 공간입니다. 시드볼트와 유사한 기관으로는 시드뱅크(seed bank)가 있는데, 시드뱅크가 그때그때 필요한 씨앗의 입출고가 가능한 공간이라면 시드볼트는 절대로 열려서는 안 되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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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볼트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다.

 

  시드볼트란 씨앗(seed)을 저장하는 금고(vault)입니다. 기후 변화나 핵전쟁 등 지구 차원의 대재난에 대비해 식물의 멸종을 막고자 마련된 공간입니다. 시드볼트와 유사한 기관으로는 시드뱅크(seed bank)가 있는데, 시드뱅크가 그때그때 필요한 씨앗의 입출고가 가능한 공간이라면 시드볼트는 절대로 열려서는 안 되는 장소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시드볼트나 시드뱅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십 편의 시가 자신을 관통해 가는 동안에도 굳게 닫힌 자신의 시드볼트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까지도 지키고 싶은 나의, 나의 가장 내밀한 장면들, 쓰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쓰고 나서도 번번이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가 시인의 시드볼트에 저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인이 말한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시드볼트가 나에게는 어디 있지?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내가 끝내하지 않는 말, 단어가 튀어나오면 스스로도 깜짝 놀라게 되는 그런 말들이 들어있는 금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만, 이야기를 할 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하고 나서도 번번이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가 보관된 금고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금방 후회한 경우가 많아 지금이라도 시드볼트를 만들자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부하직원이 경솔하게 구두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부풀렸습니다. 구두 보고를 받은 사주는 품의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직원은 이번에는 신중하게 여러 곳을 조사하고 대안을 확인한 후 품의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사전에 구두 보고가 있었다는 내용을 알지 못한 저는 결재를 하고 사주에게 보냈습니다. 사주는 구두 보고에서 보고한 금액보다 훨씬 줄어든 품의서 상의 금액에 화를 냈습니다. 저도 신중하게 조사한 후 구두 보고를 하라고 직원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특히 돈과 관련한 보고는 오해의 소지도 있으니 더욱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직원은 죄송하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이 안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회의 때마다 사주는 부하직원을 도둑놈이라며 질책을 하는 겁니다. 직원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지 말고 조금 더 기다리면 사주도 마음을 풀 것이라고 위로를 하였습니다. 잘못한 것은 사실이니 참으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직원은 도둑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침 회의 참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직원의 마음은 깨지고 부서졌습니다. 그날 아침 회의에는 회의실의 자리가 다 찼습니다. 사주는 도둑질한 직원을 매도하는 이야기로 회의를 시작하였습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비웃는 웃음으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웃은 이유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회장님의 지시를 받고 섣불리 경솔하게 깊이 없이 조사하여 가볍게 보고를 한 사실은 직원도 인정을 합니다. 보고가 정확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질책을 하는 것을 직원은 달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품의를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정확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앞선 잘못을 시정하였습니다. 직원이 허위로 비용을 부풀려 보고를 하고 차액을 횡령하려고 한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한 데 자꾸 도둑이라고 말씀하실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의실이 냉동실로 변했습니다.

저에게 시드볼트가 있었다면 절대 열리지 않았을 금고 속의 말이었습니다. 그때 시인의 책을 읽고 시드볼트를 알았다면 말입니다. 그저 듣고 입만 닫으면 될 일인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2017년 어느 날의 에피소드입니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는 걸 막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국제적인 망신을 받을 일이 되었습니다. 실제 막을 방법도 없다고들 합니다. IAEA보고서를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오염수를 방류하면 수산업이 망한다고 말을 하면 수산업을 방해하는 일이라고 업무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가짜뉴스라는 말로 오염을 시킵니다. 오염수와 처리수의 차이는 대통령을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로 갈립니다. 그래도 방송을 통해서 듣거나 기사를 보는 것은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것이라 그저 그러려니 합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 쉽게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있음에 자신감과 함께 자존감도 커졌습니다. 그런데 퇴근길이었습니다. 사주(이 사주는 그때 그 사주가 아닙니다)와 함께 퇴근하는 차속에서 갑자기 사주가 그럽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하여 토론을 하자고 하는데, 반대하는 쪽에서는 참가하려는 패널을 구할 수가 없대. 시민단체에서만 패널이 나온대.” 그냥 듣고 말 일입니다만 ‘어? 정말 그런가? 그럼 내가 듣는 방송에 출연한 과학자들은 누구지?’ 토론장의 분위기나 상대 토론자가 누군지에 따라 패널이 출연을 꺼렸을 경우도 있을 것이고,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반대한 과학자를 방송국에서 기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처음 튀어나온 나의 말은 “나가서 반대하면 압수수색을 할 것 같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말하고 바로 후회를 했습니다. 그 뒤의 상황은 차마 부끄러워 말을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도 저는 제 할 말만 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상대방의 동의는 구하지 못한 것은 물론입니다.

 

  2023년의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기 직전에야 시드볼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열려서는 안 되는 말들이 저장되어 있는 금고. 인류가 멸망을 예고하고서야 열려야 하는 최후 희망의 공간이 시드볼트입니다.

 

  시인은 “문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슬픔이라고 말하는 대신 복숭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슬픔은 안으로 감추고 복숭아 이야기만 실컷 하는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저에게는 시드볼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감추는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을 확인합니다. 제가 느끼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복숭아”라고 말했다면 상대도 흥분하지 않았을 일을, 그러면서도 위로를 전할 수 있었을 일을 날선 말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왜 복숭아가 문학적인지 책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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