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산문을 읽을 때가 있다. 시인의 시를 읽는 게 분명히 더 좋겠지만 시보다 산문이 더 끌리기도 하는 어떤 날.
이 시인의 이름은 시인이 운영하고 있는 서점 덕분에 알게 되었다. 방문해 볼까 어쩔까 하는 차에 코로나 19가 확산되었고, 이제 그곳으로의 이동은 영 기약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시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시를 즐겨 읽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행운이자 축복이자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시인은 알고 계실까. 이 책은 순전히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진하게 느껴 보고자 빌려 읽은 책이다.(구입해서 읽은 게 아니라 죄송하지만)
책은 시와 산문의 경계선을 덮고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시로 읽고 싶으면 시로 읽고 산문으로 읽고 싶으면 산문으로 읽고, 수필로 읽고 싶으면 수필로 소설로 읽고 싶으면 소설로 읽어도 좋을 만큼 어중간하고 묘하게 다 품고 있는 범위다. 나는, 내가 좋을 대로, 시 쪽으로 확 끌어 당겨서 읽었네. 그래서 한 줄 한 줄 찾아 가며 타이핑도 했지.
책은 '1부 밤의 낱말들'과 '2부 밤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낱말들에서는 제목에 해당하는 각 낱말마다 두 쪽에 걸친 글을 펴 놓고 있는데 제목 바로 아래에 본문에서 뽑은 짧은 글이 함께 실려 있다. 다음 사진의 모습과 같이.
읽는 초반에는 이 구성이 내 읽기를 방해했다. 시인이 스스로 뽑아 놓은 글이 본문의 어느 지점에 있나 자꾸만 먼저 찾으려고 하는 조바심이 일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제목 아래를 건너 본문을 먼저 읽고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찾아 시인이 뽑아 놓은 것과 비교하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시인이 골라 놓은 메시지와 같으면 같은 대로, 다르면 또 다른 대로 헤아려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으니. 그 문장들을 하나씩 타이핑하는 동안 나는 시인의 시 속으로 흠뻑 빠져들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언젠가는 그 서점에 가 볼 날이 오지 않을까. 가서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고르고 서점 주인의 시집도 골라서 사인도 받고 이 서점을 운영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도 드리고 그랬으면(마지막 것은 끝내 못하겠지만). 서점이 오래도록 번창해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24 생각보다는 빠르고 마음보다는 느리게. 그러면 당신은 내 곁에 있다. 26 손을 내놓아보라는 소리는 참 온도 높지. 열이 열을 만나는 순간이니까. 29 거리가 일제히 숨을 죽이고 빛은 언제나 먼 옛날의 것이 되었다. 33 좁고 길고 환한 시간. 35 감정에도 기척이 있구나. 그럴 땐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구나. 36 결심은 사소하고 쓸모없지.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에 동그란 새순을 내미는 저 나무처럼. 43 누구에게나 뽑히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이야기가 하나쯤 있으며, 깊은 밤 벚나무 같은 그것을 오래오래 잊으려 노력하는 법이다. 47 어째서 그 아이를 그토록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지. 51 궁금해하지 말아야지. 이 밤처럼, 작게 빛나는 것만 몇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79 평생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남은 삶을 다 살아보지도 않고서도 안다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81 검은빛이 다 녹아 이제는 먹빛 구름을 닮아가는 우산은 이따금 기우뚱 마음을 기울였다. 88 나는 곧 지나가버릴 지금을 사랑하고 있다. 115 한참 서 있어도 좋은 계절. 129 나는 이따금 역 앞의 무수한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이따금 손을 내려다보며 낯선 자신을 발견하는 생각을 하는 그저 흔한 사람이기도 하다. 133 오래전에 태어나 먼 여행을 마친 빛과 함께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점심을 그와 함께해야겠다. 139 숨이 마음에 닿을 때 걸음은 가벼워지고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지. 153 오지 않은 것까지 오지 않으려는 것까지 떠올리고 잡았다 놓쳐버린 물고기의 자맥질을 보듯 막막하게 지켜본다. 163-164 두근거리던 날들과 시큰거리던 날들이 쉼 없이 지나가고 있었구나. 168 올 날이 아니라 가버린 나이라서. 나는 자꾸 그날을 곱씹는다. 그 저녁과 밤. 177 버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감정일지라도. 182 괜찮다, 괜찮다, 비가 세 음절로 떨어진다. 193 시간은 멈춘 게 아니라 한꺼번에 지나간 것이다. 왜 기억 위로 눈이 내리는 건지. 197 그것은 기억이 아니며 기록도 아니고 망설이며 서성이다가 삼키고 마는 사라짐 같은 어떤 것. 201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 시작되는 것일까. 206 설령 잊더라도, 조금만 잊어야지. 아주 까맣게는 아니게. 더듬대면 언제든 찾을 수 있게. 210 당신은 구름처럼 가장 멀고 아득하려다가 흘러간다. 215 사람들로부터. 나의 일상으로부터.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이곳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곧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만큼. 225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사람 곁에 있을 수 없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 227 어느 집의 생활은 물에 씻겨 내려가는 중이어서 너무 늦은 밤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니 되기도 한다. 236 여전히 아무것도 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저녁이라니, 이 속절없음이 그래도 좋았다. 237-238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몰랐던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고 내가 몰랐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240 그것을 사랑하기 위해 단숨에 일생을 써버리는 어떤 사람은 겨울을 산다. 244 적지 않은 글자를 받지 않은 당신을 조금 미워했다가 아니 그럴 수 없으므로, 없는 일이니까 나는 깜깜한 창밖보다 더 깜깜해져서, 어떤 소리든 안으로 건너왔으면 바라고 있다. 247 왜 매번 눈은 사람을 혼자로 만드는 것일까. 250 귀에는 먼 소음이 닿았다 사라지고 들렸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아무도 어떤 일도 나를 깨우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눈을 뜨지 않는 그런 꿈. 270 모두 각자 자신의 쓸쓸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는 친구를 만들고 이 일 저 일에 참견하면서 쓸쓸로 쓸쓸을 덮는 것이 아닐까. 273 누구도 말하지 않고 무엇도 말해지지 않습니다. 사이에는 오직 기대만이, 언어의 몸을 갖기 전, 짐작만이 맴돌고 있어요. 277 당신도 모르게 당신이 된 당신은 듣고 있을까. 279 오늘 내겐 뒤가 없었고 세상은 종잇장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끝없이 그 앞으로만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285 생각해보니 우산에게는 정말 못 할 짓이지만 여행하지 않는 우산 하나쯤은 있어도 좋은 일인 듯합니다. 288 그렇게 매번, 돌아보게만 만드는 단어, 청춘. 293 나의 무탈함이 누군가에겐 큰, 커다란 선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299 어떤 것도 분명해지지 않는 두 시에, 어젯밤 두 시에, 내가 참 좋아하는 두 시에. 3006 발견하는 순간 생이 환해지고 조금은 살아 있구나 하게 만드는 그런 구름의 기분. 317 미래의 일과 과거의 일이 만나 그것이 사람을 간절하게 만들다니. 오지 않은 일들이 오지 않을까 봐서 안달하는 마음이 그만 깊어지고 말았지요. |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
며칠째 시인의 편지가 배달된다.
도착 시간은 한밤중, 도착지는 내 베개 옆이다.
그 편지가 다 밤에 쓰이지는 않았을 테지만,
다 밤에 다시 쓰였을 것 같은 편지들이다.
올가을 나의 키워드는 “밤”과 "기억"이다, 그렇게 되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을 건너고 있기 때문에,
기억을 지우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이기 때문에.
읽기 숙제로 받은 시집에는 “밤”과 "기억" 시시각각 출몰한다.
선생님께서는 “밤”을 넣어 시를 써오라고 하셨다.
루이스 글릭(Louise Gluck)의 시집과 시의 제목은
“Faithful and Virtuous Night”이다.
나는 그 시가 밤과 기억에 대한 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이 도착했다.
이 책 속의 낱말들을 읽기를 쓰듯 밤마다 야금야금 읽으면서
낯선 시선, 몰랐던 단어, 서늘한 위로에 살금살금 도달했다.
저녁이 “관제엽서 같”을 수 있다는 것을,
“빛에 반짝이는 수면”의 이름이 “윤슬”이라는 것을,
“덜 마른 온기로 손바닥이 따뜻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시절과 작별”하는 일이 설렐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간질간질 아리아리 토닥토닥해주는 깃털이 심장에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유희경 시인의 목소리와 어법을 들었다.
책을 통해 짐작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서 참 흥미로웠다.
“삶은 버티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내내 유쾌하고 즐거운 웃음을 웃었다.
솔직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그려졌다.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더 작은 것들을 볼 수 있”고 “더 들을 수도 있”게 된
그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나도 이 가을 “깊어진 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들,
그들의 기척을 살피며 기억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그와 같은 사람 하나가 되어, 나에게 대책없이 내린 이 밤을 건너가 보기로 한다.
그러는 중 때때로 시인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생각에 잠겨 한참 서 있었습니다. 몸 구석구석 한기가 들어 떨렸지만 조금이라도 더 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사이 어둠에 적응한 눈은 더 작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것들이 보이면 그만큼 더 들을 수도 있는 거여서 나는 그것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깊어진 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들, 그들의 기척을 살피며 기억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것이 기억이 되고 또 어떤 것은 기억되지 않는지, 기억되지 않은 순간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또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p.314) |
2. p. 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