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 스포일러 있습니다.]
“청소년의 꿈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인가?”
책을 처음 받아볼 때 표지 겉면에 적혀있던 저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의 꿈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인가?” 라는 문장으로 치환되어 다가왔기 때문이다.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가볍게 보인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의 양, 청소년문학이라는 분류가 덜어주는 마음의 부담감은 책을 일단은 쉽게 손에 들게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가 계속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곱씹게 한다. 책이 술술 잘 읽히는 것과는 별개로 생각을 곱씹다가 잠시 책장을 덮게 만드는 것이다.
책의 주인공 선휘는 주변의 부모들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소위 ‘영재’였다. 그와 쌍둥이 형 건휘는 엄마의 ‘철저한’ 관리와 아빠의 ‘적절한’ 무관심 속에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엄마는 병원장 외동딸로 자라나 아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아버지 역시 부장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받고 있다.
두 형제에게 비극이 시작된 건 엄마의 일그러진 이상향 때문이다. 엄마는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엄마가 생각하는 완벽의 기준은 자녀들이 전교 1등을 하고, 입시결과에서 상위 1%안에 드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엄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고, 엄마가 자녀에게 행하는 모든 일은 다 ‘네가 잘되라고 하는 일’이 된다. 사소하게는 먹는 것부터 모든 것들이 유기농이어야 하고, 두뇌 활성화를 위한 주사도 맞을 수 있으며 각가지 영양제도 반드시 먹어야 한다. 엄마의 뜻에 반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당연히’ 체벌을 통해서라도 교정되어야 하고, 아이에게 친구는 경쟁상대일 뿐이며, 1등을 향해 달려 나가는데 불필요한 것들은 다 배제되어야 한다. 심지어 아이가 잘못한 일이 발생한다 해도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므로 모든 문제를 이를 빌미로 덮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 길이 형제를 위한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책을 읽으며 내가 감정이입이 되면서 너무 무서웠던 장면은 엄마의 체벌 장면이다.
“엄마의 매는 어려서부터 친숙하게 맞아온 훈육의 매였다. 우린 엄마의 구타에 길들여졌다. 또 사랑의 표현이라 여겼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를 너무 사랑해 문제였다. 상습적인 구타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우린 저항하지 않았고 한동안 소리도 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도 주변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모범생이었던 것 같다. 책의 주인공처럼 나도 성적에 대한 강박이 없잖아 있었고, 체벌도 당연시 여겼다. 등수가 떨어지거나 우등반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였고, 성적이 떨어지면 당연히 혼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의 체벌은 생각해보면 매우 심한 편이었음에도 주변에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이거나 혹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나의 목표는 단순했다. 얼른 성인이 되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나만의 온전한 집을 갖는 것.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이 목표가 과연 나만의 목표였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것이 부모님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였고, 이 이야기는 나에게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그 ‘당연하다’는 정의는 내가 오롯이 내린 결론이 맞는걸까?
주인공과 그 형은 이에 반발한다. 엄마가 정해놓은 그 길에 서는 것을 반대함에도 엄마는 끊임없이 이들을 엄마가 규정한 그 길 안으로 밀어넣는다. 결국 형은 엄마 몰래 빠져나간 농구장에서 시비가 붙을 때 그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상대방을 목졸라 죽일뻔한다. 엄마는 심지어 이 사건을 덮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주인공인 동생에게 형 대신 본인이 한 일이라고 진술할 것을 종용한다. 결국 이후 형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엄마의 일그러진 강요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결국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형의 죽음 이후 엄마는 동생인 선휘를 형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선휘가 형과 동일하게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심지어 형의 이름을 동생에게 부르는 착각까지 하는 엄마는 읽는 내내 소름끼치면서도 안타까웠다. 과연 엄마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자식들에게 집착을 했던 것인가.
어쩌면 엄마는 자식을 통해서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들을 이루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흔히 양육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이기도 한데, 본인이 유년시절 채우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투영해서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책에서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본인 역시 엘리트로 자라났고, 주변의 사촌들 역시 소위 ‘엄친아’라고 하는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다. 아이를 오랫동안 갖지 못했다는 것이 하나의 흠결로 여겼다는 표현에서도 마찬가지로 엄마는 본인의 삶이 완벽해야한다는 강박에 빠져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본인이 정해놓은 이상적인 삶의 틀에 하나하나씩 채워넣다보니, 이 길을 방해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어떠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정리를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단 의미는 아니다. 아이를 잘 키우려는 생각으로 아이에게 본인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좋은 것들을 모조리 쏟아붓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엄마 역시 엄마가 처음인 사람이고, 서투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아이를 해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면,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아이의 반응을 살펴서 엄마 스스로가 바뀌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선휘의 자살시도에 이르러서야 엄마가 이를 깨달았다는 부분은 슬프고 안타까웠지만, 동시에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아가야만 모두가 이해를 할 수 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종국에 이르러서야 엄마는 본인의 잘못을 깨닫고 심리치료를 받을 것을 결심한다. 또한 선휘가 하고싶어하는 길을 응원해준다. 선휘 역시 마찬가지다. 모범생이 되어야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살고자 한다. 본인이 가고 싶어하던 100일간의 여행을 해보려 한다. 그 첫 시작지는 산티아고 사막이고 말이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형이 선휘에게 남긴 메모처럼, 선휘는 선휘만의 삶을 살아간다. '형처럼 되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처럼 선휘는 새로운 길로 발을 딛기 시작한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 모든 비극은 사회적인 통념인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업’을 갖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어야만 성공한 삶이라고 하는 허황된 신화에 매여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타날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 신화를 믿어왔고, 아직까지 어느정도는 믿고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선휘가 말하듯 여러 가지의 삶의 방식이 있지 않을까? 그 방식을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뿐. 그 선택이 좋다 나쁘다를 평가할 권리는 당사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이 짧은 책이 나에게 준 경험은 과연 나는 주변사람들이 이야기하던 정상적인 길, 모범적인 길에 대해 강박이 없었는가를 되돌아보게 한 것이다. 더불어 화자인 선휘에게 어린시절의 나를 투영해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선휘에게 그리고 어린시절의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과거의 너는 니가 원하던 그 길을 잘 알지도 못했고, 어렴풋하게 알아차렸다 해도 애써 체념해야했지만 이제는 아니니 앞으로 나아가렴. 니가 원하는게 뭔지 직접 부딪치면서 경험하고 그 길을 하나씩 나아가렴.”
※ “YES24 리뷰어클럽 체험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