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은 진화심리학의 대표적인 도서인 '욕망의 진화'를 읽었을 때였다. 진화심리학은 다윈의 진화론과 심리학을 결합한 20세기의 신 학문이다. 이 학문은 다윈의 진화론에 기대어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성은 진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이고, 가정에 소홀하며, 바람을 피운다. 반면에 여성은 양육의 부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성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다윈이 주창한 진화 매커니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된'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성에 따른 성향의 차이가 변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진화심리학자들, 특히 데이비드 윌슨은 말한다.
평소에 '남성은 이렇고 여성은 저렇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은 다분히 폭력적으로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더없이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미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계에서 타당한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진화심리학이 심리학 분야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인 결과이듯이, 다른 학문들도 진화론을 자신의 학문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다윈의 모든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상황에서, 다윈을 운운해가며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주장하는 진화심리학의 이론 앞에서 나는 손발이 묶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차이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니. 성차별과 불평등이 변화가 불가능하다니. 진화심리학의 이론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 불쾌함을 감히 표출할 수는 없었다. 다윈의 이론은 진리가 되어버렸으니, 나의 불쾌함이 과학을 부정하는 것처럼 내비칠 까봐 두려웠다.
<암컷들>은 내가 데이비드 윌슨의 '욕망의 진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불쾌함을 다독여주고, 내가 느꼈던 그 불쾌함이 과학을 부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알려준 고마운 책이다.
이 책은 다윈의 빈틈을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성차별적인 논조를 당당히 드러냈다.
"거의 모든 동물에서 수놈의 열정이 암놈보다 강하다. 따라서 싸움을 벌이고 암컷 앞에서 부지런히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수컷이다. 반면에 암컷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수컷보다 덜 열심이다. 암컷은 일반적으로 '구애를 받는 쪽'이다. 암컷은 수줍음이 많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다윈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성차별이 인간의 DNA에 고정된 것이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했다. 하지만 저자는 다윈 역시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이 살던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윈의 살던 시대는 빅토리아 시대로 여성 인권이 기를 펼칠 일 없던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시대였다.
성차이에 대한 다윈의 주장을 뒤엎을 만한 사례들이 자연에 널려 있었음에도 다윈은 이 사례들을 단순한 예외로 치부해버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동물학을 연구해온 학자로서 다윈이 예외라고 무시했던 암컷들의 모습을 세세히 밝혀나간다.
이 책에서 기술되는 다양한 동물 암컷들의 모습은 다윈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이 암컷들은 소극적이기는 커녕, 알파 메일이 되어 무리를 장악하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수컷을 얻기 위해서 맹렬히 싸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암컷은 자기 새끼를 죽이기도 하고, 방금 전에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수컷을 죽이기도, 혹은 다른 암컷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한다.
암컷들은 다윈의 생각처럼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생식을 주도하는 것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섹스 후에 정자가 암컷의 생식기로 '돌진'하는 사이에, 암컷의 난자는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암컷의 난자는 수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난자는 정자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다. 난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수정을 주도한다. 정자가 난자에 이식되려면 호르몬이 결합되어야 한다. 이때 어떤 호르몬과 결합할 것인지는 오직 난자가 결정한다. 이처럼 암컷들은 가만히 남성을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암컷은 오직 남성우월주의자들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어떤 암컷은 대단히 방탕하기도 하다. 온순하고 복종적인 암컷의 모습을 허구로 만들어버리는 종들이 여럿 있다. 그 암컷들은 혼외 관계를 끝없이 맺으며 일부일처제에 만족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수컷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관계를 수도 없이 맺는다. 방탕하게도!
여성은 이렇다, 고 고정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암컷들>만 보아도 자연 세계에는 여성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이나 편견을 무력화시키는 사례들이 널렸다. 이 사례들은 단순히 예외적인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많고, 여러 종에 걸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루시 쿡 작가님의 암컷들 을 대여해 본 후 남기는 리뷰입니다. 강렬한 표지와 제목들!
사회에 만연한 여성성에 대한 편견 고정관념 같은 것들을 깨부수는 책입니다.
읽으면서 다윈이 여자였다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더라고요. 철저하게 남성의 입장과 시각에서 펼쳐진 그의 이론들. 제대로 공부 해 본 적 없었던 터라 더 실망이 큽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다윈 씨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