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과 시간이 오롯이 쌓인 곳, 서울역을 중심으로 한 골목 산책
일상에서 만나는 도시의 공간들은 익숙하기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그 공간들에 쌓여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간을 살펴보고, 독자에게 이를 보는 방법을 소개한다. 아직도 유행하고 있는 올레 길 걷기처럼, 서울역을 중심으로 7개로 구성된 서울의 산책길을 제시함으로써 낯설고 새로운 방법이 아닌 친숙하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방법을 선사한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부에서는 서울역 동편, 숭례문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 일대와 그 주변부, 그리고 남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경로를, 2부에서는 서울역 서편의 널따란 구릉지 일원과 옛 경의선 및 그 지선들의 흔적을 따르는 세 개의 경로를 다루고 있다.
무심코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제시한 산책길에는 강남이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62년까지만 해도 강남이 경기도 시흥군[서초구]과 광주군[강남구, 송파구, 강동구]에 속한 농촌지역이었기에, 서울의 시간이 오롯이 쌓인 곳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역 동측: 도심과 남산
1부는 어떻게 보면 ‘골목으로 본 서울의 근현대사’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경로에서는 정동(貞洞)의 붉은 벽돌 건축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 붉은 벽돌 건축물들은 붉은색 벽돌 마감이 주를 이루던 당시 영국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영국대사관 건물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좌), 본관(뒷편), 100주년 기념관(우)
출처: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pp. 38~39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정동 곳곳에 들어선 근대건축물들이 모두 적벽돌을 사용함으로써 적벽돌은 근대화된 서양건축의 상징이자 정동의 건축 콘텍스트가 되었다. [p. 35]
이곳에서는 같은 붉은 벽돌 건축물이지만 외세의 유입이 본격화된 19세기 말부터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진 20세기 초까지 한반도 침탈과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건축물과 1970~80년대 서학당길에 연달아 들어선 한국 현대건축 거장들의 작품이 당시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경로에서는 도심 안쪽의 낙후되었지만 조용하던 동네가 2000년대 이후, 시대의 새로운 욕망에 의해 어떻게 이지러졌는지 보여준다.
새문안로5가길에서는 운동하는 셈치고 서둘러 발을 놀릴 수 밖에 없다. 세종문화회관 뒷길에서부터 경복궁역이 있는 사직로에 이르기까지, 백운동천 위를 아스팔트로 복개한 새문안로5가길에는 그림 한 점 그릴 만한 인상적인 경관이 없기 때문이다. 길 주변 내자동, 내수동, 적선동, 도렴동 등은 광화문과 육조 거리에 인접하여 조선 시대부터 주요 관청과 기관, 고급 관리들의 사택이 자리했던 유서 깊은 동네이지만 2000년대 초, 오피스텔과 주상복합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서 동네 고유의 도시조직과 역사성을 뭉텅이로 잃어버렸다. [p. 68]
‘집장사집’으로 폄하되던 1930년대 도시형 한옥이 시간이 멈춘듯한 풍경을 자랑하는 서촌(西村)을 만들었지만, 이로 인해 서촌이 ‘핫플레이스’로 떠올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기도 한다.
통인시장_체험형 전통시장
출처: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pp. 78~79
1930년대부터 낮은 비용으로 대량 공급하기 위한 새로운 주택 양식, 도시형 한옥이 등장한다. 도시형 한옥은 대부분 전문 주택업자에 의해 공급된 이른바 ‘집장사집’으로서, 전통 한옥의 특징을 갖추면서도 도시환경에 맞게 개량되어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 서촌에 남아 있는 대다수 한옥은 그 당시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서촌의 고풍스러운 풍경이 도시형 한옥에 의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특별할 것 없는 대다수 집장사집들 역시 언젠가 재평가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p. 89]
세 번째 경로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명동 일대의 서양 근대양식의 건축물과 개발시대를 상징하는 청계천과 세운상가에 대한 단상을 얘기한다.
낡은 콘크리트 계단을 밟고 ‘김수근의 공중 가로’ 위에 올라와봤다. 세운상가 일대의 험하고 괄괄한 경관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1960년대라고 해서 지금 이 모습과 퍽이나 달랐을까? 이런 곳에 이런 무지막지한 건물이 들어선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이 무지막지한 곳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생각을 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서울시의 미래다. 다만 소심하게 믿어볼 뿐이다. 미시적으론 좌충우돌,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더라도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더 살기 좋은 도시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p. 127]
네 번째 경로는 일본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明治] 일왕을 모시는 신사(神社)인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오르기 위해 조성된 소월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어 후암동에 지어진 일본인에 의한 서구식 주택, 즉 ‘문화주택’과 해방촌이 재개발에 대한 기대감으로 건축행위가 제한되면서 쏟아진 저렴한 임대료의 점포들로 핫플레이스[明]로 변신하면서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暗]도 언급한다.
서울역 서측: 구릉지와 철길
2부의 경로들은 구릉이라는 지형적 특색, 그리고 도시 구조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철도라는 기반시설을 중심으로 한다.
다섯 번째 경로는 한국 아파트 역사의 산 증인들을 살피며 시작한다. 겸손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성요셉 아파트와 서소문 아파트, 한반도에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이자 가장 오래된 아파트 충정아파트, 영화 <기생충> 속 달동네의 배경인 아현동의 저층 서민 주거지 등.
건축물에도 인격이 있다면 성요셉 아파트의 인격은 겸손이겠다. 겸손의 미덕은 평면에서도 발견된다. 남쪽으로 완만하게 굽은 도로의 형상을 따라 아파트도 동일하게 마디를 굽히고 있다. 건물이 땅의 형상을 따르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경사지에 들어서는 요즘 아파트들이 대지를 반듯하게 짓누르고 굽은 도로를 똑바르게 펴낸 땅 위에 거만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나의 의견에 수긍이 갈 것이다. [p. 175]
여섯 번째 경로는 먼저 도화동과 공덕동 일대에서 1960~80년대 개발시대의 유산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1960년대 도원동 언덕에서 내려다 본 주변 풍경을
마포아파트가 서 있는 도화동이 저렇게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한강이 흘러가고 오른편으로 공덕동이 마주 있고, 철길 건너로는 신공덕동, 만리동이 이어지고, 벼랑 밑으로 들고 나오는 당인리 발전소로 가는 낡은 기관차 소리도 어딘가 서울 같지 않은 인정을 풍겨주었다. [pp. 223~225]
라고 묘사했듯이 용산선 기찻길 인근에 위치한 이 동네들은 구석구석 사람 냄새가 풍기는 정감 가는 서민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추진된 주택 재개발사업들이 완료되면서 옛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어졌다.
이어 옛 경의선의 용산역과 서강역 사이 구간[용산선]의 수난사를 훑는다.
4월 흐드러지게 핀 벚꽃 동산을 걷고 있노라면 용산선의 수난과 역경의 기나긴 여정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하다. 도심 한복판에 이토록 아름다운 벚꽃길이 조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과정을 놓고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일제가 강요한 제국주의의 흔적은 비록 좌충우돌할지라도 대한민국 국민에 의해 조금씩 바로잡히고 있다. 그래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향연 속에서도, 숲길 옆에 들어선 술집과 카페에서의 한바탕 흥겨운 시간 속에서도, 이 비워져 있는 공간에 담긴 역사를 되짚어봄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소소한 일상조차 거저 얻어진 것은 없으니 말이다. [p. 246]
오늘 다시금 와우교에 올라서니 다리 양 옆으로 길게 이어진 푸른 숲이 낯설다. 사라진 철길뿐만 아니라, 철길로부터 등을 돌렸던 건물들이 언제 그런 적 있었냐는 듯이 공원을 향해 독특한 외관과 인테리어를 뽐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거리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곳이 이렇게 쾌적한 공간이 될 수 있었고, 이렇게 활기 넘치는 곳이 될 수 있었던가 새삼 놀랍다. 그러고 보면 도시의 빈 공간(void)은 역시 사람으로 채워져야 비로소 찬란하게 빛나게 됨을 다시금 확인한다.
버려진 철길을 활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빈 공간을 채우거나, 채우지 않거나. 지금까지 걸어온 옛 용산선 철길, 경의선 숲길은 빈 공간을 채우지 않은 길이었다. 그리고 채우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사람들로 채워짐을 확인했다. [pp. 251~ 252]
이어 옛 용산선[경의선숲길]과 반대로 옛 것을 버리고 빈 공간을 새로운 것으로 꽉꽉 채운 신촌의 변화를 더듬는다.
신촌의 도시형 한옥은 하루빨리 철거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자, 금싸라기 땅을 생으로 놀리고 있는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창천동 서측 주거지역 내에 있던 한옥들은 셋방을 놓기 용이한 주택으로 재건축되었고 창천동 동측, 유동 인구가 많은 신촌로터리 주변 한옥들은 상가건물로 대체되었다. 결국 그 많던 도시형 한옥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다. 도시형 한옥이 비교적 잘 보존된 인사동과 삼청동, 북촌, 서촌, 익선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지난 십 수 년간의 유행만 놓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신촌은 지역색이 살아 있는 상권으로 재조명 받을 기회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생각하면, 신촌은 애초부터 비물질적 가치나 여유 따위는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치열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현장으로 계획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p. 256~258]
일곱 번째 경로에서는 먼저 ‘홍대앞’의 역설을 얘기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대학 정비령’(1961)으로 종합대학이었던 홍익대학교가 미술대학만 정상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자유분방함과 창의성, 개성, 대안 비주류와 같은 이미지로 대표되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홍대스러움’이 부각된 것은 1990년대 독특한 카페가 모여 있는 소위 ‘피카소 거리’의 인기와 신촌에서 이탈한 라이브 카페가 언더그라운드와 인디밴드의 주된 활동 무대가 되는 것 등이 한 몫 했다. 불행히도 이 거리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들 대표하는 것이 홍대 앞의 상징, ‘서교 365’다.
(당인리선의 철거 이후) 서교365는 저렴한 임대료와 흥미로운 공간구조 그리고 홍대앞이라는 문화환경으로 인하여 다양한 예술가들로부터 사랑 받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예술가들은 서교 365를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복합예술공간이자 다양한 문화활동이 이루어지는 가장 ‘홍대스러운’ 공간으로 구축하였다.
~ 중략 ~
건축가들이 서교365에 대해 논할 때 유독 기억이란 개념에 천착하는 이유는 뭘까. 이 낡아빠진 건물군에서 건축의 3요소인 기능, 구조, 미를 모두 제거한 후에도 콘크리트, 철, 유리, 나무의 표면과 틈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인 에피소드부터 사회, 집단적인 사건과 역사까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될 수 있겠다. 기억은 구상적이고 물질적인 건축물에 시간이란 추상적 관념을 연결시키는 매개체와 같다. 비록 서교365를 살린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정작 살인적인 임대료 때문에 이 건물을 떠나야 했던 또 한 번의 아이러니가 있긴 하지만, 서교365는 그러한 시간까지 물질적인 형상으로 품게 되었다. 과연 이 기억의 집합체는 홍대의 어느 시간까지 품게 될 것인지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다. [pp. 295~298]
저자는 이 여정(旅程)의 종착지인 옛 당인리발전소, 즉 서울화력발전소에 대한 글에서 어쩌면 뻔한, 그러나 핵심적인 말을 남긴다.
건축, 그리고 물질적인 공간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간을 운영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공간의 운명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pp. 310~311]
아마도 이 말이 저자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걸어라. 그러면 너의 도시가 보일 것이다.
우리도 나름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다. 하지만, “당신의 도시는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지만 ‘나의 도시’를 제대로 경험하고 관찰하려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이렇게 조언한다.
도처에 흥미롭고 주위를 끄는 것들이 너무 많은 오늘날, 도시 그리고 동네의 역사에 도통 관심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무작정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비교적 가볍고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도시 걷기 덕분에 장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길 것이고, 그러한 애정은 장소의 역사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장소의 역사를 알게 됨으로써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며, 다시 그러한 경험은 개인의 심상지리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다. [pp. 320~321]
*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뜨인돌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