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디낭을 스케치한 그림이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처음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여행이라는 소재도 있지만 그림에 더 관심이 가서 읽게 된 책이다.
그런데 책 표지의 제목 위에 작은 글씨로 '사랑을 부르는 배종훈의 여행 그림 이야기'라고 적혀있다.
처음 책을 읽기전까지는 여행지에서 만난 도시나 풍경에 매료되어 스케치를 하면서 느끼게 된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왠걸 책을 몇 장 읽다보니 로맨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주인공의 몰랑몰랑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네요.
그렇다고 소설처럼 뭔가가 전개되지는 않지만 꽤 설레는 기분이 들게 하더군요.
일단 사랑이야기는 뒤로 접어두고 여행 그림 이야기를 들여다 봅니다.
저자는 여행과 삶의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소개된 그림들을 보면 그림의 구성이나 표현 방법들이 취미로 그리시는 분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림에 대해 아는 건 없는데, 어째든 뭔가 다르더군요.
그리고 현직 중학교 교사시라고 하네요. 그래서 방학에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게 된 모양입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을 담아내기 위해, 몇 분이나 몇시간정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뭔가에 몰두하게 되면서 세상의 온갖 잡념으로부터 벋어나는 경험을 하게 될까요.
저자는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잊어버리기 전에, 그 순간을 오래 정지해 두고 싶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고 하네요. 그러면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을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다고 하면서...
그래서 한장한장의 그림들을 보면 정성이 느껴집니다. 여행지의 기억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선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그렸다는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소개된 그림들 중, 어떤 그림들은 스케치로만 담기 그림도 있거나 약간의 채색이 입혀진 그림도 있는데, 일부는 유화로 그려진 그림도 있더군요.
아마 여행지에서 돌아온 후, 그때의 기억을 더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오래도록 그려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책 뒤표지에 '그리다가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가 다시 그리는 유럽'이라는 글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책을 읽고나니 기분을 알 수 있겠더군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게 되지만, 원래 없었던 일처럼 헤어지게 되고
그렇게 여행은 마무리 됩니다.
여행 후의 일상에서 그 때를 그리다가 그리워하게되고, 그 그리움에 다시 그리게 된 그림들.
유럽을 그리다.
[유럽을 그리다]는 말 그대로 유럽의 풍경을 그린 책, 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사진으로 바라보는 유럽의 풍경도 멋있지만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 역시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담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며 이 책에 어떤 글이 담겨있든 그림 하나만으로도 책을 보는 만족감은 충족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런데 처음 글을 읽기 시작할 때는 그림보다 글이 먼저 들어온다.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찮게 옆자리에 앉게 된 그녀와의 어색한 인사에서부터 이상하게 비슷한 취향을 가진 주제로 대화는 자연스러워지고, 세상의 모든 우연은 필연으로 이어져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긴 비행끝에 도착한 파리에서 그들은 서로 남남처럼 헤어지고 끝이 나야하는 인연은 비행기가 연착되어 늦은 밤 도착한, 더구나 비마저 내리는 파리 공항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그녀를 지나치지 못함으로 인해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뭐야, 이건 한편의 소설이야? 라는 의심이 들 때쯤 저자가 그려낸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그의 마음을 따라,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의 풍경은 그가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저 '아름다운 풍경'인 것이 아니라 따뜻해보이지만 쓸쓸함이 묻어나기도 하고, 시간이 쌓여 하나의 풍경을 말없이 보여주기도 하고, 그들 서로만의 시간을 공유하는 연인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하고 그리움이 짙게 스며있기도 한 그림들이다.
유럽의 곳곳에 스며있는 저자의 감성을 따라가다가 문득 그녀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그녀가 궁금해질때쯤 그의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그녀는 보일듯 말듯 그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의 우연처럼 이어지는 운명같은 여행의 끝은 어떻게 될까.
솔직히 그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져서 새벽이 되도록 책을 놓지 못하고 다 읽어버렸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라는 그의 말을 끝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끝맺음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말처럼 "생의 가장 눈부신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여행도 사랑도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은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유럽의 여행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극히 사적인 여행이고, 저자 개인의 감성과 사랑이 담겨있는 여행과 그림이야기지만 묘하게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넘쳐난다. '유럽을 그린다'는 것은 그리다가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다시 그린다는 말을 그대로 담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낯선 지역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우리에게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가슴 떨리는 기분 좋은 설레임도 주는 일상 속 모험일 것이다..
[유럽을 그리다]는 저자가 유럽을 돌아 보면서 느꼈던 상념들을 감상의 일기와 같은 문체로 짧막 짧막하게 그 느낌을 고스란히 옮겨 놓고 있다. 그리고, 서양화가로 명성 높은 저자 답게 유럽 곳 곳의 풍경과 여행의 모습들을 산뜻한 그림으로 함께 표현하고 있어서, 마치 그의 그림 전시회를 보면서 큐레이터가 그림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듯 하다. 여행을 떠난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알던 세상과의 단절이 고독한 여행자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새롭고 낯선 풍경과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속해 있지 않은 새로움이 더없이 낯선 이방인으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해외가 아닌 국내 여행을 하면서도 충분히 일상에서의 탈출을 해볼 수 있겠지만, 왠지 어릴적부터 우리와는 사뭇 다르게 보아왔던 독특한 중세 문화와 미술 음악등 익숙하면서도 다른 환상을 만들어 내게 만드는 유럽의 여행은 더욱 더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 낯설고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들어내지 않나 싶다. 홀로 떠나는 홀가분한 여행 속에서 어쩌면 너무나 외로움을 싫어하는 이중적인 묘한 감정도 느끼면서 그 외로움을 즐기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렇게 외롭게 느끼는 여행길이기에 어쩌면 옆좌석에 가슴 설레게 하는 이성이 앉아 주기를 기대도 해보고, 처음 만난 낯선 이와의 사랑에 빠지는 영화 속 로맨스를 꿈꾸어 보기도 한다. [유럽을 그리다]에서는 저자의 실제 경험담일런지?, 나름의 창작인지? 이야기 속에서 솔직히 명확한 판단은 들지 않지만 중국을 경유해서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는 저자는 우연히 옆좌석에 저자의 시선을 사로 잡은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그림에 대한 관심사도 털어 놓고 고흐에 대한 깊이 있는 주제도 공유할 만큼 마음이 맞게 되면서 호감은 더욱 증폭되어지고, 프랑스에서 부터 함께 여행을 시작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그 둘의 여행 속에서 마치 로맨스 영화 속 한장면 처럼 가슴 속 설레임은 아름다운 유럽의 정취와 삶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바람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솜털 같은 여행자들이 이성으로서 느끼는 애틋함이 저자의 숨겨진 일기장을 보는 듯 이야기 하고 있다. 보통 여행을 떠나면서 사진을 찍고 마치 전투를 하듯이 빨리 빨리 사진을 찍어버리고 다음 진지를 정복하러 떠나는 듯 급하게 이동하는 여행이 대부분이었기에, 실제 여행에서 느꼈으면 하는 여유로움을 평소에 느끼지 못했었는데, 그림으로 그려진 여행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템포 쉬어가는 더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이게도 되고 더 많은 기억을 찾아 보게 되는 여유를 찾아보게 되는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을 해서 뒨헨 체코 독일등 유럽을 돌아 보면서 방문지에서 느껴지는 유럽의 정취와 에피소드들도 간간히 소개가 되고는 있지만, 그저 여행지 가이드 처럼 정확한 일정이나 해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동화된 저자만의 속 마음만을 살짝 들여다 보는 듯이 조금씩 풀어놓는 이야기들이다.. 한번즈음 꿈꾸어볼만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여성과의 로맨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속마음을 털어내놓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기다림의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여행을 다니면서 똑같은 관광객 대상 그림 엽서를 찍어내듯이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 버릴 것이 아니라, 여행지의 모습을 가슴으로 담아 두면서 오래도록 관찰하고 내 손으로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공을 들인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
산업사회가 되면서 개인소득수준이 높아짐으로써 우물안 개구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를 인지해서 더 넣은 세상과 마주하고자 밖으로 밖으로 나갔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기가 90년대라 생각되는데요.
그 시기를 지나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수많은 여행자분들이 전 세계를 누비면서 남겨온 발자취. 즉, 여행기 중에서 이 책과 같이 그림으로 남겨서 기록을 한 사례는 저는 처음 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사진을 통한 기록들의 홍수 속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 그림을 통한 생생한 유럽의 모습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아날로그적인 풍취가 느껴져서 저 개인적으로 감성적으로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여행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의 중요한 일부이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의 묘미를 즐기는 것이 가능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낯선 경험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인생에 한 번은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유럽을 스케치 삽화로 먼저 만나본 풍경이 생생합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하루, 한순간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고 늘 말하지만 우리는 무한한 시간을 사는 것처럼 일상의 시간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여행의 시간만큼은 1초도 그냥 보내지 않으려 애쓴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라도 여행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유럽을 그리다, 배종훈, p42>
자기 성찰의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여행이 있다고 합니다. You가 아닌 My를 위한 여행, We가 아닌 Me를 위한 여행이 필요합니다.
여행은 언제나 내게 후유증 없는, 완벽하고 강력한 진통제이자 판타지를 경험하게 하는 마법의 약이다.
<유럽을 그리다, 배종훈, p196>
그 마법의 약을 원 없이 먹어보고 싶습니다. 현실은 여기에 있지만...
끝은 끝이 아니라 언제나 또 다른 시작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여행할 이유도, 사랑할 이유도, 끝과 시작이 맞물린 곳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내 생의 가장 눈부신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여행도 사랑도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유럽을 그리다, 배종훈, p244>
인생에서 나를 찾는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아직도 우리들은 물리적인 여행을 통해서 정신을 혹사 시키거나 육체를 혹사 시켜서 찾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인생은 주관식이라 합니다.
4지 선다형 5지 선다형의 객관식에 젖어들어있는 우리들에게 백지의 주관식 답지는 본인들이 써 내려가야 하는 내용들이기에 그 내용들을 채워가는 것이 여행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