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사진보다 그림이 풍경이 담고 있는 분위기나 정서를 더욱 잘 표현하기도 한다. 여행 드로잉 작가 리모 김현길의 책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를 읽으며 여실히 느꼈다. 저자 리모 김현길은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여행과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여행 드로잉 작가가 되었다.
저자의 전작 <혼자, 천천히, 북유럽>이 워낙 좋았기에 신간도 많이 기대했는데 읽어보니 역시 좋았다. 책에는 저자가 그동안 제주를 여행하면서 직접 보고 화폭에 담은 그림들과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저자는 학부생 시절부터 한 달이 멀다 하고 제주를 들락날락했을 만큼 제주에 대한 애정이 깊다. 제주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섬의 다양한 표정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을 주었고, 여행 드로잉 작가가 되고 나서는 매혹적인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잠시 즐기다 떠나는 관광지가 아니라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알아갈 가치가 있는 장소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책을 펼치면 먼저 여행 드로잉을 위한 준비물이 나온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연필부터 펜, 만년필, 붓, 수채물감 등 다양한 도구의 특징 및 장단점이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장비(스케치북, 화판, 전용 가방, 의자 등)를 고를 때에는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는지 등이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목차는 동쪽 마을, 원도심과 동지역, 서쪽 마을, 중산간 마을 순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낯선 지명이 많았는데 읽다 보니 만춘서점, 소심한책방 등 익숙한 가게명이 많이 보여서 반가웠다. 카페 서연의 집(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을 비롯해 인기 있는 제주 카페, 제주 맛집 정보도 잘 정리되어 있다.
친하게 지내는 대학 동기 한 명이 있다. 역마살이 꼈는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사진작가로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계절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유랑하던 그가 결국 정착한 곳은 다름 아닌 ‘제주’였다. (이제 그 친구를 만나려면 나와 그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 물론 지금도 제주도 내에서 끊임없이 여기저기 다니긴 하지만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리 잡은 그를 보며, 방랑벽이 있는 그 친구를 붙잡아 둔 제주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독후감과 무관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그 친구가 이 책을 선물해줬기 때문이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전까지 여행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제주란 대한민국의 유명 관광지인 화산섬에 불과했다. 여태 살면서 총 6번 방문했었는데 육지에서 보기 힘든 야자수와 감귤밭이 신기하긴 했지만 제주의 숨은 매력을 찾아내기엔 너무 짧은 기간 동안 머물러서 표면적인 아름다움만 피상적으로 관찰했을 뿐이었다. 16년간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에 지쳐 아내와 함께 용기를 내어 올해 1년간 휴직을 결정하고, 퇴직 전까지 두 번 다시 없을 안식의 시간에 무얼 할 것인가 세운 계획 중 하나가 바로 ‘제주살이’였다. 그 결정을 친구에게 말하자 이 책을 보내주었다.
보름간의 제주 여행 일정을 짜며 이 책을 찬찬히 독서했다. 제주 여행에 관한 다른 책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각종 장소가 사진이 아닌 드로잉 작가인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소개된다. 저자가 현지인이 아니라 나와 같은 방문객임에도 제주에 대한 강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남들 다 가는 (소위 인스타 감성의) 핫한 곳이 아니라, 마치 오래 숙성된 술처럼 기다림의 시간을 견딜 줄 아는 자에게만 드러내는 제주 고유의 얼굴을 부드럽게 묘사하는 듯하다. 특정 장소의 역사, 문화, 신화, 관련 에피소드까지 진짜 여행의 진수를 제주에서 보여준다. 무엇보다 여행작가로서의 건전한 철학도 마음에 들었다.
“지역만의 자연과 문화적 가치를 전달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공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여행자로 하여금 이곳만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작은 책임감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 본문 中
이 책을 읽고 오롯이 나 자신만의 쾌락을 위한 이기적인 여행이 아니라 여행지와 공존하고 그 곳 사람들을 이해하는 진정한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이 책 덕분에 제주로 떠나기 전 제주의 역사를 공부하고, 잘 몰랐던 4·3 사건도 조사했다. 그리고 저자와 감히 비교할 순 없겠지만 계절과 날씨와 거주하는 생명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호흡을 천천히 들이고 내쉴 수 있는 여유까지 겸비할 줄 아는 제주 여행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15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 책이 알려준 모든 곳을 당연히 다 가볼 순 없었지만 몇몇 곳은 일부러 저자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중 가파도와 박수기정, 아부오름 등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번에 못 가봤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관광, 명소를 순회하는 굴레가 아닌 로컬에 스며드는 여행, 오래 머무는 여행, 깊게 들여다보는 여행을 지향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나 역시 제주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제 역마살 낀 내 친구가 왜 제주에 정착하였는지 이해했다.
그림에는 전혀 재능이 없어서 저자가 권한 그림 여행은 어렵지만, 제주를 여행하는 동안 이 책은 항상 내 가방 속에 있었다. 언젠가 다음 여행 때 올레길에서, 오름 길에서 우연히 저자를 만나길 소망한다. 그땐 내가 본 제주의 아름다움을 이 책에 대한 보답으로 이야기해 드리고 싶다.
작가님의 이야기와 그림이 꾸미지 않고 포근하고 아늑하게 와닿은 책입니다. 작가님이 그려놓은 풍경도 좋았지만 상점들이 작은 그림으로 나열해 놓으니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느껴졌고 언제가는 가서 작가님이 보신것처럼 바라보고 느껴보고 싶습니다. 스케치북에 남기며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풍경이나 사물등이 더 오래 그때의 그느낌 그대로 오래 이어질꺼 같습니다. 작가님의 여행작가로써의 마음가짐도 인상 깊었습니다. 작가님을 통하여 잘 몰랐던 제주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