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며 꽝! 한 느낌이 든 부분이 있었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아버지와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중상을 입는다. 아들이 병원에 실려오자 외과의사가 ”이 애는 내 아들이라서 내 손으로 수술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한 5초 내지 10초는 어리둥절해서 다시 읽어보았다. 다시 읽고 좀 생각한 다음에야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를 깨달았다. 2014년의 실험에서 참가자의 85%가 단숨에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인 셈이고, 나 역시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스스로 편견을 떨치려고 노력하고, 또 많이 줄여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무의식적인 편견은 내게서 떨어지기가 쉽다는 걸 깨닫게 되고, 이 책을 더 신중히 읽게 되었다.
앞의 이야기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편견을 설명하기 위해 든 많은 사례 중 하나다. 정말 많은 실제 사례와 연구 결과가 우리가 편견에서 절대 자유롭지 않으며,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크나큰 오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 혹은 나아가 남녀에 대한 편견만이 아니다. 인종(물론 인종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마땅한 개념이 아니지만, 과학적으로도 유효한 개념이 아니다)에 대한 편견, 외국인에 대한 편견, 소수집단에 대한 편견, 나이에 대한 편견 등등도 마찬가지다. 방금 지나쳐왔지만 편의점 앞에서 무알콜 음료를 마시고 있는 외국인, 그것도 흑인 셋을 보면서 순간 가졌던 생각, 대학원 진학을 타진하는 이-메일을 받고선 국적부터 확인하는 버릇, 금방금방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내 바로 앞의 할머니를 보면서 드는 생각 등등. 나는 나를 다시 봐야겠다.
인도 출신 여성으로 영국에서 살아가는 행동과학자 프라기야 아가왈이야말로 이런 주제를 다루기에 딱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 역시 편견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닫는다. 어떤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편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이 책에서 아가왈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적지 않게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얘기했을 때 개인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의 경험은 보편적 경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 여자로서, 혹은 남자로서, 한국인으로서, 미국으로서, 베트남으로서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긍정적인 것도 마차가지다. 이를테면 미국에 이민 간 한국 출신 가족의 학생이 수학 점수가 뛰어났을 때, “한국인이니까”라는 것 역시 집단에 대한 편견의 발로인 셈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은 노골적이고, 어떤 편견은 아주 은밀하다. 인종에 대한, 혹은 어떤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가 되고, 혹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노골적인 차별은 사라져간다고 하지만, 대신에 은밀하면서도 더 교묘한 편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본성이기도 하며, 또 굳이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의지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선 우리가 편견을 갖는 것이 본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생물로서의 본성이기도 하며, 인간으로서 진화한 이후 습득한 오래된 습성이기도 하다. 많은 “~~ 효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그것들이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적인 전제다.
그리고는 그런 편견에 따른 차별의 상황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내가 저질렀을 장면들도 있고, 혹은 내가 당했을 상황도 있다. 나는 편견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 편견을 가지고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편견과 차별, 나아가 혐오가 내(內)집단과 외(外)집단을 구분함으로써 집단 내 단결을 꾀하고, 자신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과 같이 그 구분이 흐릿해지는 상황에서도 그런 차별이 남아 있는 것은 의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도 편견을 없애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인정한다. 본능에서 오는 것이며, 만약 쉬운 문제였으면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다. 저자는 편견을 마주보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편견의 본능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극복 역시 기대하기 힘들다. 내가 가진 편견의 정체를 인정하고 나서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의식해야 한다. 그래야 반성할 수 있으며, 그래야 노력할 수 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차별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