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은 늘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무슨 소리냐고?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는 소리이다. 아무리 외부와 소통하고 다양한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고 내면화 한다고 한들, 우리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 큰 착각을 하고 살아갔다. 내게 타인과의 관계 중에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가 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신용이다. 나는 신용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야, 신용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있냐?" 물론 그렇다. 지나가는 사람 10명에게 신용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전부 중요하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신용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겪은 일화를 소개해보겠다.
오랜만에 군 동기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3년 만에 잘 지내냐는 연락이 왔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역시 갑작스러운 연락은 이유가 있는 법. 다짜고짜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뭐, 사실 그리 큰 돈이 아니고, 나 역시 그를 대상으로 한 가지 테스트를 해볼 심산으로 빌려주었으나, 3주가 지난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원래는 일주일 안에 상환하는 게 상호 간의 계약이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돈 안 갚은 이들의 특성을 그대로 CTRL + C, V한 꼴이었다.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빌려달라고 할 때는 세상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없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고 상환 날짜가 다가오면 연락이 잘 안 되길 시작한다(무슨 일이 그렇게 바쁘다는 건지. 직장일 그렇게 해봐라! 바로 부자됐겠다). 그 친구 역시 상환 기간이 다 되자 연락이 잘 안 되고 있고,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가 나와의 계약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에 대한 신용을 잃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 돈을 빌려간 친구는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신용이 중요하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과 행동에는 괴리가 있는 법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대단한 건 아니다). 첫 번째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다른 사람도 비슷한 층위의 가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신용이 뭐 엄청 특이한 가치는 아니지 않는가. 비단 자본주의 세계에서 강조되는 가치이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도 신용을 중요시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지금 단 하나만의 사례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 예시의 오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아닌 사람이 많다는 것을. 나는 단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을 뿐이다).
두 번째로 나의 사고 수준과 다른 사람의 사고 수준이 비슷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살아가는 시간이 많을수록 개인 간 사고의 품질의 차이는 커진다. 나는 내가 알고 있고 평소에 생각하는 개념이나 정보를 타인도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내가 책을 읽으면서 획득한 개념이나 기타 다른 활동에서 배운 정보들을 타인과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그 개념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당연히 모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대방이 당연히 알 것이라고 가정하고 대화에 임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 책에서도 한 챕터가 할애되어서 등장한다. 조망수용(Perspective-Taking)의 한계라고 하는데(이름이 무슨 이따구?), 조망수용이란 자신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바가 타인과 다를 수 있음을 인식하고 독립적으로 받아들여 타인의 상태를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쉽게 말하면 깊은 수준의 역지사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속으로 '떴다~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멜로디를 생각하면서 멜로디에 맞춰 책상을 두드리는 행동을 해보자. 그리고 본인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그게 무슨 곡인지 맞춰보라고 해보라.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당연히 맞출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아니 웬걸?) 매우 큰 착각이었다. 정답률은 매우 형편없었다(구체적인 수치가 기억이 안 난다. 여튼 그리 높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학창 시절에는 모두들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환경에서 같이 성장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사고 폭의 차가 크지 않았으나, 20대 이후의 각 개개인의 삶은 너무나 특수화되고 조각화되기 때문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온 사람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의 개인 차가 발생한다. 나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다. 타인과 나는 무인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무인도의 평수가 확장된다는 것을 말이다.
요즘 들어, 나는 내 사고의 품질을 더 높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왜 그러고 싶을까. 이 욕망의 근원, 즉 본질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다가 저자가 남긴 에필로그가 그 답이 될까 싶다.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생각을 더 잘하고 싶은 걸까? 무척 솔직해서 기억에 남는 대답이 하나 있다. "남들보다 잘 나가고 싶어서"
왜 우리는 더 나은 사고를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나 역시 위의 대답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즉 더 잘 나가고 싶은 게 내 욕망의 본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에 대한 병폐가 가끔은 너무 심한 탓에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여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하라고 요즘 들어 많이 개인들에게 가르치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사회 시스템과 충돌하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이토록 번영을 구가한 원인으로 개인 간 그리고 기업 간의 경쟁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높였기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니라고 답변하기 힘들 것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 자체가 경쟁을 통해서 발전한 체제인데 갑자기 개인 간의 경쟁을 멈추라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내가 외국에서 살아본 적인 없어 외국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내가 잘 사는 건 별로 의미가 없는 듯하다. 반드시 '남보다' 잘 살아야 한다. 남보다 잘 나가야 하고, 남보다 공부를 잘해야 하며, 남보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 즉 우리의 행복의 척도는 나의 내면이 아닌 타인이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인 거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스타에 뭐 그리 휘황찬란한 사진만 가득한가(이것도 대수의 법칙에 어긋날까?). 사진만 보면 재벌2세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스마트폰 프레임을 벗어나면 왜 그리 괴리가 큰 거 삶을 사는지 원. 단 한 명의 승자를 위해 모두가 불행을 택하는 게 아닌지 요즘 들어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나 역시 이 공간에서는 철학적으로 무슨 대단한 비판을 하는 사람인 양 행세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인스타에 올린 삶을 욕망하고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과 다를 게 없는 지극히 평범한 개인(아니 어쩌면 평범보다는 더 열등할지도)일 뿐이다. 내가 이렇게 책을 읽는 것도, 이 공간에 글쓰기를 함으로써 사고를 교정하고 싶은 것도, 더 좋은 사고 방식을 갖고 싶은 욕구도 전부 다 잘 나가고 싶어서, 우월해지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이행해가는 과정일 뿐이다. 참 멋없다. 그렇지 않은가?